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 (전 5:1-7)

첨부 1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 (전 5:1-7)


여러분, 축구경기를 시청할 때 실황중계(‘live’라고 하지요)를 더 좋아하십니까? 아니면 재방송을 더 좋아하십니까? 
어떤 사람은 실황중계를 더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실황중계를 봐야 스릴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재방송을 더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평안하게 볼 수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지난번 런던올림픽 축구 한일전에서 2:0으로 이겼잖아요?
경기결과를 안 다음 재방송을 보면, 공이 아무리 한국 문전에서 논다할지라도 걱정이 없습니다.
가슴이 조마조마하지 않습니다.
손에 땀을 쥘 일이 없습니다.아무리 일본 선수가 슛을 해도 우리가 2:0으로 이길 테니까요. 

바로 이런 태도를 기독교적 종말론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적인 종말론이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국 승리할 것이기 때문에 오늘의 상황이 아무리 어렵다할지라도 과념치 않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고난이 와도 걱정이 없습니다.
결국 승리할 것이니까요.
일이 잘 안 되어도 걱정이 없습니다.
결국 승리할 것이니까요.
일이 좀 늦어져도 걱정이 없습니다.
결국 승리할 것이니까요.
이해하시겠지요? 

이런 종말론적인 승리를 오늘 이 자리에서 확인하는 의식이 예배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결국 승리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신하고 오늘의 상황이 어떻게 펼쳐질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우리의 인생살이에서 예배드린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본문을 통해 설파하고 있습니다. 
전5:1절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제일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봉사생활을 통하여, 남을 섬기는 삶을 통하여, 그리고 구제활동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 중에서 최고는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사 43:21절 “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나의 삶의 목적이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예배를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비근한 예로, 입만 열면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자식이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자식이 부모님의 생신날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 날에 친구들과 함께 야외로 놀러갔다고 한다면 누가 그를 효자라고 말하겠습니까? 

거짓말쟁이지요! 
‘그놈 입만 열면 효도 효도하더니.....,..’하고 씁쓸해하지 않겠어요? 
자식이라면 최소한 부모님의 생신날은 기억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자식이라면 아무리 바쁘더라도 최소한 부모님의 생신날에 얼굴을 보여드려야 하지 않겠어요?

예배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성도들의 삶의 가장 기본적인 표현입니다.
예배에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예배를 잘 드리면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고, 병든 영혼이 고침을 받고, 잠자던 영혼이 깨어납니다. 
예배는 능력의 통로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무능한 자가 유능한 자가 되고, 무력한 자가 능력 있는 자가 됩니다. 영향력이 없는 보잘 것 없는 자들이 천하를 어지럽히는 자들이 됩니다.

예배에는 고침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배를 드릴 때 인간관계로 인한 상한 심령이 고침을 받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 병마가 물러나고 육체의 건강을 회복합니다.
예배는 우리의 특권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괴롭히려는 까탈스러운 규정이 아니라 복된 삶으로 이끄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드리는 날을 복 받는 날, 안식의 날, 회복의 날이라고 고백합니다. 

(285장 주의 말씀 받은 그날)

그러면 어떻게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솔로몬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려봅니다.

1. ‘하나님 앞에서’ (코람 데오의 원리) 

2절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은 라틴어로 ‘Coram Deo’라고 하지요. 
성도의 삶이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서의 삶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중요한 사명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끌어다가 하나님 앞에 세우는 이 회집이 중요합니다.

초대교회의 능력의 핵심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 역시 회집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행 2:46-47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모임이 능력인데 말세의 증상은 모이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히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말세가 되면 마귀가 우리에게 모이지 말라고 유혹한답니다. 

“교회에 꼭 가야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게 아니야! 방송예배도 있고, TV영상예배도 있고, 인터넷 예배도 있잖니? 혼자서도 조용히 예배드릴 수 있어! 모이긴 왜 모여!”
예배를 드리는 주일날 늦잠이 그렇게 달콤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토요일 심야 프로그램이 그렇게 재미있는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토요일 저녁 술자리가 그렇게 부담이 없는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주일 아침 교회 오기 전 그렇게 한바탕 부부 싸움을 하게 되는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다 예배를 방해하는, 모이기를 폐하는 사탄의 역사입니다. 

어떤 분은 ‘왜 주일예배를 오전 11시에 드렸는가?’ 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농경사회에서는 오전 11시가 농사일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고 일의 효율성도 가장 높은 시간이다. 그런데 그 좋은 시간을 예배시간으로 하나님께 드린 것은 가장 좋은 시간을 주님께 드리겠다는 우리 신앙선배들의 의지의 반영이다.” 
참된 예배란 뭐니 뭐니 해도 우선 하나님 앞에 서는(Coram Deo) 것입니다.

2. “……말씀을 듣는 것이” (집중의 원리)

1절 중반 절에 보면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예배는 듣는 것입니다. 
일단 말씀이 들리면 영광이 임합니다. 
말씀이 들리면 변화를 받습니다. 
말씀이 들리면 팔자를 고칩니다. 
두 마디는 그만두고 단 한마디라도 말씀이 들리면 그의 인생은 달라집니다.  
사무엘의 삶이 위대해진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삼상 3:9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어떻게 보면 ‘듣는 게 뭐 그리 힘드냐?’ 할지 모르지만, 말씀 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① 자기의 이기심 때문에 말씀을 잘 듣지 못합니다. 

자기의 뜻, 자기의 욕심을 가지고 말씀을 듣게 되면 자기 뜻에 맞는 말만, 자기 욕심에 맞는 말만, 골라 듣게 됩니다. 
즉 쓰면 뱉고, 달면 삼키게 된다는 의미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곡해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내 뜻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힘든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내 뜻을 깨뜨리게 하옵소서. 내 뜻을 산산 조각나게 하옵소서. 내 욕심을 가루가 되게 하옵소서.” 

② 산만하기 때문에 말씀을 잘 듣지 못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교우의 임종을 지키고 있는데 그가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이런 충격적인 고백을 하더랍니다. 
“목사님, 저는 수십 년 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한 번도 설교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설교가 시작되면 주보 여백에다 다음 일주간 동안 직장에서 해야 할 일, 가정에서 해야 할 일을 빼곡히 적다보면 어느새 ‘축원합니다.’라는 소리가 들리고 설교는 마칩디다.” 

우리 교회에는 이런 분이 안 계실 줄 믿습니다. 
어떤 권사님이 설교시간 내내 노트에다 뭔가를 받아 적기에 하도 가상해서 목사님이 예배를 마치고 인사를 하면서 “권사님, 오늘 은혜 많이 받으신가 봐요? 많이 받아 적으시던데요?”라고 칭찬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권사님의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웬걸요. 계 타는 순서 정했는 걸요…….” 하더랍니다. 
우리 교회에는 이런 분이 안 계십니다.

③ 자기 말하는 것이 남의 말 듣기보다 훨씬 쉽기 때문에 말씀을 잘 듣지 못합니다.

인류문화학자들은 야만인의 특징을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하곤 합니다. 
첫째는, 목소리가 큽니다. 
문화가 발달하면 할수록 목소리가 낮아집니다. 
둘째는, 감정 주도적입니다. 
사소한 일에도 흥분하여 죽기 살기로 덤빕니다. 
셋째는, 자기 말만 합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내용이 열왕기상 3장에 나옵니다. 
왕상 3: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여기서 지혜로운 마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브 쉐미즈’는 원래 ‘듣는 마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듣는 마음과 지혜는 동의어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잘 듣는 자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 말을 많이 하는 자입니다. 
참된 예배는 말씀을 듣는 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3. ‘.......갚기를 더디게 말라 (순종의 원리)

4절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구약에서 서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결단했으면 즉시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즉시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회개와 순종입니다. 
사 6장에 보면 웃사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① 그때 나타났던 첫 번째 반응은 회개였습니다.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참 이상해요. 
예배드리기 전에는 다른 사람이-남편이, 아내가, 상사가, 동료가, 부모가, 자식이-잘못한 것으로 생각되어 그 사람에 대한 원망 섭섭함 분함 미움이 있었어요. 

그런데 예배를 드리고 나면 이상하게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게 됩니다. 
‘남편이 무슨 잘못이 있나? 내가 문제지…….’ 
‘자식이 무슨 잘못이 있나? 내 욕심이 문제지…….’ 
예배는 회개를 일으킵니다.

② 두 번째 나타난 현상은 순종이었습니다. 

사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순종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참 예배가 드려지면 그 교회에 봉사자가 나타나고, 사명자가 나타나고, 헌신자가 나타나고, 충성하는 자가 나타납니다. 
참된 예배에는 순종이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교회가 부흥되려면 예배가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위하여 기도해주십시오. 
여러분이 진정으로 참 예배를 드리시기 원하시면 이 예배를 위하여 중보기도 해주십시오. 

어느 교회는 오후 7시에 드리는 경배와 찬양 예배를 위하여 3시부터 중보기도 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성령께서 임재하시길 갈망하십시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터치하시도록, 성령께서  분위기를 주장하시도록, 성령께서 예배를 방해하는 악한 영의 세력을 묶도록 성령님을 갈망하십시오. 
그래서 매 주일 참된 예배를 드리는 특권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