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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희망을 만드는 사람들 (미 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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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만드는 사람들 (미 7:1-7)


[아, 절망이다! 나는,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과일나무와 같다. 이 나무에 열매도 하나 남지 않고, 이 포도나무에 포도 한 송이도 달려 있지 않으니, 아무도 나에게 와서, 허기진 배를 채우지 못하는구나. 포도알이 하나도 없고, 내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무화과 열매가, 하나도 남지 않고 다 없어졌구나. 이 땅에 신실한 사람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정직한 사람이라고는 볼래야 볼 수도 없다.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다만, 사람을 죽이려고 숨어서 기다리는 자들과, 이웃을 올가미에 걸어서 잡으려고 하는 자들뿐이다. 악한 일을 하는 데는 이력이 난 사람들이다. 모두가 탐욕스러운 관리, 돈에 매수된 재판관, 사리사욕을 채우는 권력자뿐이다. 

모두들 서로 공모한다. 그들 가운데서 제일 좋다고 하는 자도 쓸모 없는 잡초와 같고, 가장 정직하다고 하는 자도 가시나무 울타리보다 더 고약하다. 너희의 파수꾼의 날이 다가왔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날이 다가왔다. 이제 그들이 혼란에 빠질 때가 되었다.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아라. 친구도 신뢰하지 말아라. 품에 안겨서 잠드는 아내에게도 말을 다 털어놓지 말아라. 이 시대에는, 아들이 아버지를 경멸하고, 딸이 어머니에게 대들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다툰다.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 집안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희망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본다. 나를 구원하실 하나님을 기다린다. 내 하나님께서 내 간구를 들으신다.]

• 인간이 문제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오순절 열 네 번째 주일이면서 창조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창조절이 제정된 것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세계 교회가 환경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불과 30여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생태계의 위기에 대해 신앙적으로 응답해야 한다는 깊은 공감이 일어난 것은 겨우 1980년대 중반부터입니다.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과 그 구원사역을 기억함과 더불어, 하나님의 세계를 본래의 모습대로 보존하고 또 그것을 다음 세대에 넘겨주자는 것이 이 창조절기 제정의 취지입니다. 자연의 신음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오고, 기후변화에 대한 급박한 경고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고 또 놀라운 것은 그런 경고와 위험 신고를 듣고도 태평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무감각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은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아주 소중한 사명입니다. 

환경 문제는 자연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입니다. 생태계를 이처럼 망가뜨린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습니다. 욕망 충족과 행복을 동일시하는 마음이야말로 황량한 세상의 뿌리입니다. 그런데 욕망은 늘 과도하게 마련입니다. 과연 인류에게 희망이 있을까요? 희망이 있다면 그 희망은 누구를 통해, 어떻게 열릴까요?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절망과 정직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절망의 깊이를 맛보지 않고는 희망이 절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전 8세기의 예언자 미가가 본 세상은 너무나 근대적입니다. 이사야와 동시대인인 그는 마치 우리 시대를 눈여겨보면서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첫 번째 예언자입니다. 무엇이든 첫 번째는 어려운 법인데, 그는 누구도 감히 하지 못했던 그 무서운 말을 발설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가슴에 불이 붙었기 때문일 겁니다. 엉너리치는 좋은 말로 자기 시대 사람들을 깨울 수 없었기에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존재의 터전을 흔드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는 우상 숭배자들과 하나님을 경멸하여 조롱하는 자, 점을 치는 자들이 수두룩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깊이 성찰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사적인 행복과 안위에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도덕적 부패가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부자들은 폭력을 휘두르고 주민들은 거짓말을 일삼았습니다. 미가는 소위 백성의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이들의 행태를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정의를 미워하고, 올바른 것을 모두 그릇되게 하는 자들”(3:9). 지도자들은 뇌물을 받고 다스리고, 제사장들은 삯을 받고서야 율법을 가르치고, 예언자들은 돈을 받고서야 계시를 밝혔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뇌물, 삯, 돈에 대한 관심이 다른 모든 소중한 가치를 삼켜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여야 할 것 없이 국회의원 공천에 부정이 개입했다는 보도에 접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내가 그럴 줄 알았어’ 혹은 ‘언젠 안 그랬나’입니다. 거짓과 부패를 일상적인 일로 여기는 마음이 역사를 퇴행시킵니다.

• 예언자의 슬픔

이런 현실을 뭐에 비유하면 좋을까요? 제게는 군대 귀신에 들려 내리막길로 질주하는 돼지 떼가 떠오릅니다. 행복을 향한 질주가 사실은 파멸을 향한 질주임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예언자는 눈을 뜬 사람입니다. 그는 하늘의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미구에 닥쳐올 파멸을 홀로 보는 사람은 외롭습니다. 아무리 외쳐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을 때 그들은 자기 시대의 아픔 때문에 신음합니다. 그들은 시대의 기미에 예민합니다. 마치 대재앙을 먼저 알아차리는 동물들 같습니다. 배가 파선하려면 쥐가 먼저 하선한다지요? 예언자가 어떤 때 광인처럼 보이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슬퍼하며 통곡하고, 맨발로 벌거벗고 다니며, 여우처럼 구슬피 울며, 타조처럼 목놓아 울 것이니, 이것은, 사마리아의 상처가 고칠 수 없는 병이 되고, 그 불치병이 유다에까지 전염되고, 기어이 예루살렘에까지, 내 백성의 성문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1:8-9)

오늘 본문에서 미가는 자기를 잎이 다 지고, 열매는 하나도 남지 않은 텅 빈 가지와 같다고 말합니다. 열매가 없기에 자기에게 다가와 허기진 배를 채우는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졸가리만 남은 나무처럼 쓸쓸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신실한 사람, 정직한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저 다른 이를 해칠 생각이나 하고, 이웃을 올가미에 걸어서 잡으려고 할 뿐입니다. 악한 일을 하는 데 이력이 난 사람들 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선한 사람이 남아 있지 않을까요? 미가는 그중 낫다 하는 이들조차 쓸모없는 잡초와 같고, 가장 정직하다고 하는 이들조차 가시나무 울타리보다 더 고약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능동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지는 몰라도 누군가 자기에게 다가설라치면 그 딱딱하고 뾰족한 가시로 위협합니다. 지독한 비관주의입니다. 지나칠 정도로 예민합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과 역사 속에 있는 어둠의 심연을 본 것입니다. 

우리도 경험하는 바입니다만 세상에 다시 없을 것 같이 착한 사람도 어떤 때는 터무니없이 화를 내거나 욕심을 부리기도 합니다. 이런 일을 여러 번 겪다 보면 인간에 대해 비관적인 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 미가는 이웃을 믿지 말고, 친구도 신뢰하지 말고, 심지어는 품에 안겨 잠드는 아내에게도 말을 다 털어놓지 말라고 말합니다. 당혹스럽습니다. 세상이 이렇다면 정말 살맛이 없습니다.

• 희망은 있다

그러나 미가는 문득 절망으로부터 고개를 듭니다. 마음의 지평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찾으시는 하나님, 인간이 망가뜨린 것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동녘 하늘에 떠오르는 해처럼 그의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비로소 그는 희망의 뿌리가 우리가 아니라 역사의 주인이시요 섭리자이신 하나님이심을 자각합니다. 미가의 후배 예언자인 예레미야도 역사의 질곡 가운데 헤매는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렘29:11)

인간의 한계를 절감한 시인들의 고백도 같은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주님,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내 희망은 오직 주님뿐입니다.”(시39:7)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시42:5)

바울 사도는 환난을 통해 경험하는 성도들의 희망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롬5:5)

하나님의 희망이 우리 속에 유입될 때 우리 또한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됩니다. 태풍 볼라벤으로 말미암아 많은 과수 농가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수확을 앞둔 사과와 배가 떨어지면서 농부들의 가슴도 함께 내려앉았습니다. 저는 그저 마음만 아파했는데, 희망 만들기에 나선 이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SNS를 통해 “태풍 낙과 피해 농민들을 도와주세요”라는 메시지를 읽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출하를 일주일 앞둔 사과와 배들이 전부다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 사과를 팔아서 아들 딸 등록금 대고 농협 빚 좀 갚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농민분들은 지금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할 기력도 없이 한숨만 내쉴 뿐입니다…우리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서 창문에 신문지 붙이는 마음으로 건강한 우리 먹거리 책임지시는 우리나라 우리 농민분들의 마음을 지켜주세요.”

저도 뒤늦게나마 동참하고 싶어 문의했더니 이미 물량이 동났다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웃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는 데 그치지 않고, 희망을 나눌 수 있는 길도 일러주십니다. 세상이 어둡다고 탄식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열면 주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가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을 일러주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고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됩니다. 희망은 이렇게 조금씩 자라고 있습니다.

• 사려니 숲길

며칠 전 대전에 계신 어느 분이 제게 엽서를 보내왔습니다. 엽서에는 도종환님의 <사려니 숲길>이라는 시가 적혀 있었습니다. 다 읽어드릴 수는 없지만 그 가운데 한 대목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어제도 사막 모래 언덕을 넘었구나 싶은 날
내 말을 가만히 웃으며 들어주는 이와
오래 걷고 싶은 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보다 다섯 배 열 배나 큰 나무들이
몇 시간씩 우리를 가려주는 길
종처럼 생긴 때죽나무 꽃들이 
오리 십리 줄지어 서서
조그맣고 짙은 향기의 종소리를 울리는 길
이제 그만 초록으로 돌아오라고 우리를 부르는
산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사막 모래 언덕을 넘는 것 같은 삶이라 해도 초록으로 돌아오라고 우리는 부르는 산길 하나 있다면 인생은 살만하지 않던가요? 사려니 숲은 제주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비경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사려니라는 뜻은 제주도 방언으로 ‘신성한 곳’, ‘신령스러운 곳’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현존 앞에 이르게 되는 것은 결국 아름다운 사람들, 이웃의 아픔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랑의 사람들을 통해서일 때가 많습니다. 그런 이들이야말로 세상에 희망을 만드는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거룩한 세계와 접속하게 되면 부질없는 욕망의 애옥살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변해야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신음도 그치게 됩니다. 창조절 첫 번째 주일에 우리는 신령한 곳을 가리키는 숲길 같은 사람이 되라는 초대를 받고 있습니다. 좋으신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 삶이 점점 초록으로 변해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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