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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잔치하는 교회 (눅 14: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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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하는 교회 (눅 14:15-24)


I. 잔치 종교

소크라테스가 부부싸움을 하고 홧김에 차를 몰아 달리다 교통사고로 의식을 잃고 기절해 버렸습니다. 병원에서 3일만에 깨어나 보니 예쁜 두 명의 간호사가 서로 간호해 주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기뻐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여기가 천국입니까? 당신들이 천국에서 내 부인들입니까?” 옆에 있던 아내가 소리를 버럭 지르면서 “이 양반 아직도 정신 못차렸구만. 빨리 정신차리고 일어나요.” “크산티페? 당신이 있는 것 보니 여기 천국은 아니구만!”

모든 사람의 의식속에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천국그림자가 있습니다. 
모든 종교의 주장은 죽은 다음에 좋은데 가는 사람이 있고 나쁜데 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슬렘 코란경에 의하면 천국에도 등급이 있다지요. 이 땅에서 충성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이 1등급을 받아서 1등급 천국에 올라가면 천명의 미인들에 둘러싸여 산답니다. 남성과는 달리 여기 여인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생각만 하더라도 끔찍합니다. 

불교에서 좋은 세상을 극락이라고 하지요. 불교는 이 땅에서 왜 인간들이 고통을 욕심때문이라는 거지요. 불교계 극락은 욕심이 없는 세상입니다. 열반 즉 니르바나란 아무것도 없다란 뜻으로 무상무념의 곳입니다. 생각해 보면 허무한 곳입니다. 

도교의 천국은 한가함입니다. 신선도에 의하면 정자나무 아래 바둑을 두는 노인, 낮잠 자는 사람, 그 옆에서 차를 끓이는 소년... 그들의 천국은 얼마나 따분하고 지루한 곳입니까?
그러나 기독교의 천국은 잔치하는 곳입니다. 

마태복음 22장 2절-4절에 보면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처녀가 신랑을 맞이하는 혼인잔치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시편 23편에서는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신다고 했는데, 
여기 상은 개근상, 우등상이 아니라 잔치상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천국은 어린양의 혼인잔치라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기독교는 「잔치하는 종교」입니다. 
초상집 같은 종교도 있고 제삿집같은 종교도 있지만 기독교는 잔치하는 종교입니다.

우리교회 예배의 찬양은 정말 잔치집 찬양과 같습니다. 
어떤 분이 오래전에 질문을 했습니다. 울고 웃고 박수치고 손들고 때로는 춤을 추는 찬양을 보면서 제게 그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저렇게 감정적으로 찬양을 해야 됩니까?”
“그러면 어떻게 찬양을 해야 합니까?” 물었더니 
“거룩하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거룩이 무엇입니까?” 얼굴표정도 함부로 하면 안되고 손들고 흔들면 안되고 석고상처럼 서서 찬양해야 된다고 합니다. 
“성도님 그것은 거룩이 아니라 거북한 것입니다.”

모든 사랑에는 감정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찬양해야 옳은 것인가? 성경이 무엇이라 기록하는 있는지 중요합니다. 영으로 찬양해라. 온마음을 다해서 찬양해라. 손들고 온몸으로 찬양해라. 기뻐뛰며 찬양해라. 손뼉치며 찬양해라. 악기로 춤추며 찬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혜가 받았습니다 라는 말을 합니다. 
은혜는 카리스 기쁘다는 뜻에서 왔습니다.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제가 여러 권의 책을 썼는데 그 첫 번째 책이 「축제가 있는 교회」라는 책입니다. 목회를, 교회를 축제로 해석했습니다. 신앙생활한다는 것은 잔치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와서 예수 믿고도 한숨짓고 찡그리고 신앙생활하는 것 잘못 신앙생활하는 것입니다. 칭찬하고 격려하고 기뻐하고 행복해야 하는데 공동체에 들어가서 찬물 끼얹고 걸핏하면 비판하고 지옥에서 출장나온 얼굴하고 있는 것은 신앙생활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와서 큰 일하지 않아도 웃고만 다녀도 큰일 하는 것입니다.

오메가 로렉스 시계도 4시 40분을 가르키는 시계는 없다고 합니다.
한결같이 10시 10분을 가르킨다고 합니다. 
웃는 시계가 보기도 좋다는 것입니다. 

교회엔 예배잔치가 있고, 기쁨 기도가 있고 말씀과 찬양의 잔치가 있고 치유 회복과 축복의 잔치가 있는 곳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어릴 때 동네 잔치가 있으면 나눠 먹을 것이 있습니다. 
더더구나 친척집에 잔치가 있으면 할머니가 대장이었습니다. 속된말로 땡잡은 날입니다. 국수, 부침개 따윈 먹지도 않았습니다. 돼지머리고기, 잡채, 홍시, 식혜, 꽂감 과일... 모두 내 것입니다. 동네 아이들 다 먹여 살렸습니다. 
이것이 잔치요 은혜입니다. 

식구 중에 한 사람이 교회에 와서 은혜를 받고 나면 모든 가족에게 영향을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엄마가 은혜 받고 집에 가면 아이들이 기다려야 되지요?
그런데 엄마가 집에 들어가면 온 집안이 긴장하고 있으면 안되지요. 
내가 구원받았으면 우리 가족이 구원받아야 되잖아요. 내가 은혜를 받았으면 내가 받은 은혜, 구원 - 내친척 이웃들에게 나누어 지는 것이 잔치하는 신앙생활입니다. 

본문 시작하는 15절은 그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잔치란 그 주인 호스트(Host)가 누구인가에 따라서 그 격조가 결정되어집니다. 주인이 대감이면 대감 잔치라 부르는 겁니다. 임금이 호스트인 잔치를 임금잔치가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잔치는 하나님 잔치입니다.

대감잔치쯤 되면 동네거지들이 다 배부르게 먹습니다. 왕의 잔치에 초대받은 자체가 기쁨입니다. 큰 축복입니다. 거기서 인정이라도 받게 되면 큰 벼슬이라도 받게 됩니다. 자손대대 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 잔치는 어떤 잔치입니까? 내가 짊어지고 있던 인생의 짐, 저주, 지옥의 온갖 권세가 사라지고 구원과 영생,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누리는 잔치가 천국잔치입니다. 성경에 보면 죽어도 주 안에 죽은 자는 복되도다. 왜요? 눈을 뜨면 거기는 천국이니까. 예수 안에서 죽은 자는 복되도다고 그랬습니다. 

II. 하나님 잔치의 특징

이어지는 16절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천국잔치에는 정원이 없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가정 안에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 

네 주변, 이웃 친지들 가운데 나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반드시 네가 아니면 복음을 전할사람이 없는 사람, 반드시 있습니다. 네가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지 않으면 그들은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 반드시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전도는 한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 그것이 영원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 전도는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동안에만 할 수 있는 사역입니다. 
천국에 가면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찬양합니다. 예배합니다. 그러나 전도는 이 땅에 있을 때만 할 수 있는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 말씀하십니다. 내 집을 채우라! 
오늘 잔칫집 주인의 관심은 천국의 택한 백성 다 왔느냐 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가득하느냐 입니다. 
이를 이름하여 충만, 부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은혜가 충만한 곳, 기도가 충만한 곳, 하나님의 백성으로 공간이 가득찬 곳, 찬양과 치유와 감격과 성령이 충만히 역사하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집입니다. 

런던 올림픽이 끝났는데 많은 경기와 많은 종목이 있었지만 저는 양궁이 제일 재미있습니다. 
첫 번째 우리가 잘해서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스릴이 있습니다. 

해설자의 설명을 들었더니 활줄이 보통사람은 당겨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활줄이 팽팽하게 잘되어 있어야 정확히 날아간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영적인 힘 영성을 이야기합니다. 
활대가 활줄을 당기는데 뚝 부러지면 어떻게 될까요? 교회의 구조를 말합니다. 모임, 목장의 조직, 교회의 조직, 성도들과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화살은 훈련된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강하게 무장되어 있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이 모든 것의 분명한 목표는 과녁입니다.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면 아무리 멀리 날아가도 소용이 없습니다. 
과녁, 목표물에 정확히 맞아야 되는 것입니다. 
10점! 10점! 속이 시원해 집니다. 
이번에 온 교인들이 몇점 과녁에 맞기로 약속했어요? 적어도 9점에 맞춰보자는 것입니다. 10점 맞으면 좋고 엉뚱한 곳으로 날리지 않으면 됩니다. 

건강한 교회는 균형도 중요하지만 과녁이 분명한 교회입니다. 초점입니다. 
양을 치는 목자는 100마리 양을 치다가 한마리 양을 잃어버리게 되면 균형감각을 잃어버립니다. 99마리를 들에 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목자의 마음,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교회가 병들면 과녁을 상실하게 됩니다. 교회가 이 땅에 왜 존재하는지 목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성도들이 병들면 주님께서 내게 주셨던 시간과 물질과 은사의 목표가 무엇인지 과녁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해변가에서 여름이 되면 사람들이 몰려와 수영을 하는데 파도에 휩쓸려 죽는 사람이 생깁니다. 마을 청년들이 번갈아 가며 그곳을 지켜서 물에 빠지는 사람들을 살려내곤 했습니다. 점차 사람들이 많이 몰려 오니까 동네청년들이 모여 우리가 구조선을 하나 만들자. 구조선을 바다위에 띄어 놓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큰 구조선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팀장은 누가하지? 갑판장은 누가하지? 모이면 팀웍을 위해서 친교부장은 누가할까? 청소할 당번을 정해서 청소를 나눠서 하자? 가끔 모여 식사를 해야 하니까 식당 주방장은 누가 할래? 

구조선 위에서 누가 팀장할래? 친교부장 누가할래? 식사는 뭐할까? 이것만 자꾸 얘기하다가 오늘도 바다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빠져죽는데 건지러 가는 사람이 없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하기 위해서 그 배를 만들었는지 목적을 잃어버렸다는 겁니다. 
교회 조직을 합니다. 건축을 합니다. 교회와서 직분을 갖습니다. 훈련을 받습니다. 신앙생활에 년조가 깊어집니다. 뭘하기 위해서? 과녁을 잃어버리는 것을 타락이라고 합니다. 목표를 잃어버리는 것을 타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구조선은 내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감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를 유지하는데 모든 목적이 있다면 교회는 타락한 것입니다. 

III. 핑계꾼들

한국교회의 위기가 많이 있지만 그 많은 위기 가운데 저는 진정한 위기가 있다. 복음의 위기, 복음전도의 위기라 생각합니다. 한국교회가 내일 희망이 있을 것인가? 저는 희망을 주창합니다. 그 근거가 무엇이라고 물으신다면 저 나름대로의 분명한 대답이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유럽교회나 서구교회와 분명히 다르다.

첫 번째 한국교회 모든 성도들은 구원의 확신, 복음의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도 글없는 책을 통해서 구원의 확신을 갖습니다. 전도폭발을 통해서, 사영리를 통해서 한국교회 성도님들은 교회강단에서 구원론이 분명한 설교를 듣습니다. 그래서 오늘 죽어도 천국에 들어갈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묻습니다. 오늘이 여러분의 인생에 마지막 날이라고 할지라도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있으십니까? 우리모두는 이런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여러분의 구세주이심을 믿으십니까? 예수를 여러분의 구세주로 영접하셨습니까? 한국교회입니다. 엄청난 자신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지상명령, 복음명령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을 한국교회는 가지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복음의 바톤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소아시아를 돌더니 유럽으로 건너갑니다. 미국으로 건너가서 마지막 때에 복음의 바톤이 한국교회로 전해졌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이 사명은 한국교회가 감당해야 될 사명이다. 큰교회든 작은교회든 선교에 대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교회가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한국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한번 예수를 믿으면 성령이 역사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성경책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 성경 66권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으십니까? 한국교회의 자산입니다. 

한국교회 성도님들은 교회를 사랑합니다. 내집처럼 사랑합니다. 어머니처럼 사랑합니다. 서구교회가 가질 수 없는 엄청난 자산이 한국교회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성령을 환영하고 인정하면 성령을 제한하지 않으면 우리교회에 부흥이, 잃어버린 영혼들, 불신자를 전도해서 부흥되는 모델을 만들어 내기만 하면 한국교회는 다시 일어납니다. 부흥은 다시 찾아옵니다. 한국교회는 절대로 넘어진 채로 있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교회는 미래에 희망이 있다고 확신을 갖습니다. 

그러나 전도를 해보면 VIP들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시장에서 사 올 수 있는 꽁치 한 마리가 아닙니다. 눈물로 설득하고 기도하고 성령이 도와주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핑계의 고수들입니다. 

밭을 샀다. 그래서 양해해 다오. 
사업이 너무 잘되는 겁니다. 관리해야 될 일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바빠 죽겠다는 겁니다.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양해해 다오. 
사업이 너무 잘되고 번창해서 장사가 잘되어서 교회갈 시간이 없다는 겁니다. 

세 번째 사람은 한술 더 뜹니다. 
나는 장가들었으매~ 양해해 달라는 말이 빠집니다.
나는 장가들었으매 가지 못하겠노라. 선언해버립니다. 

노아시대에 멸망하는 장면을 성경은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시집가고 장가가고 집을 짓고 집을 사고 팔고 하다가 망해갔다는 겁니다. 장가 가는게 잘못되었습니까? 시집가서 가정을 갖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 아닙니까? 집을 짓고 사고 팔고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며 당연히 해야 될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뭐가 잘못된다는 얘기입니까?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그것이 전부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사실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일상성에 도취되어져서 소중한 영적인 삶을 잃어버린 것 이것은 멸망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전도 못하는데도 핑계가 있고 교회 안오는데도 핑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핑계주의자들입니다. 모든 관심이 밭과 소, 집 이것이 타락이고 병든사회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인터넷상에 떠 있는 말이라서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지만 중산층 별곡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한국인들 직장인을 대상으로 중산층에 대한 기준을 물어보았습니다. 
부채없는 아파트 30평이상 소유, 가족의 총 월수입 500만원 이상, 자동차 2000CC급이상 중형차 소유, 예금액 잔고 1억원이상 보유, 해외여행 1년에 한차례이상 다닐 정도가 되는 것. 우리교회는 몇 명 안될 것 같습니다. 

프랑스의 퐁피두 대통령이 ‘삶의 질’에서 프랑스인의 중산층 기준을 그렇게 말했습니다. 
외국어 하나 정도는 할 수 있는 사람, 직접 즐기는 스포츠 한 가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 악기 하나 정도는 다룰 수 있는 사람, 남들과는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요리 하나를 만들 수 있는 사람, 약자를 도우며 사회나 종교 봉사에 의연히 참혀하는 사람. 우리와 기준이 참 다르지요.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제시한 중산층 기준입니다. 
페이플레이를 하는 사람, 자신의 주장에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 독선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의 잘못에 대응할 줄 아는 사람, 불의, 불평, 불법에 의연히 대처할 줄 아는 사람. 이것 또한 우리와 기준이 참 많이 다르지요.

미국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는 중산층의 기준입니다. 
자신의 주장에 항상 떳떳할 수 있는 사람, 사회적인 약자를 도울만한 사람, 부정과 불법에 저항할 줄 아는 사람, 그의 책상 위에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건전한 월간지 한 권 정도가 놓여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왜 모든 기준이 물질이 전부일까요? 물질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요? 바로 이 물질 핑계로 하나님의 초대를 거절하는 자를 하나님이 본문이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상생활 멋진 것이다. 충분히 누려라. 그러나 그것이 가지고 있는 과녁,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노아시대와 오늘 우리 시대가 무엇이 다르겠느냐는 것입니다.

적어도 나는 영적인 중산층이다. 하나님 중심으로 산다. 아니 영적인 상류사회다. 나는 예배, 신앙, 말씀 중심, 하나님 중심에 나는 부끄러움이 없다. 영적인 상류사회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이런 핑계꾼들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21절입니다. 
“주인이 노하여” 물질이 내 인생의 모든 관심에 전부인 사람을 향하여 

“주인이 노하여~” 수단가리지 말고, 방법 가리지 말고, 시간 따지지 말고, 장소 가리지 말고, 대상 가리지 말고 내 집을 채우라. 내가 수천 수만년 동안 유대인을 선택하여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지만 그들이 예수를 거절하고 복음을 거절할때에 유대인 모두를 버리고 이방인들을 택하여 하나님 나라를 채룰 것이다. 그 얘기입니다. 선진국들이 잘먹고 잘 살기 때문에 교회가 문을 닫고 침체의 늪에 허덕인다면 나는 모든 선진국을 버리고 아프리카로 가서 내 집을 채울 것이다. 건강하기 때문에 주의 사명을 버려야 된다고 한다면 나는 병든자를 통하여 주의 전을 채울 것이라는 것입니다. 많이 배웠기 때문에 자기 혼자 잘나고 멋있게 살다가 성령을 버려야 된다고 한다면 나는 무식한 자를 통하여 교회를 채울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부자를 버리고 가난한 자들을 데리고 오너라. 몸 불편한 자들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오라 오라 오라는 말이 1900번 이상 나옵니다. 
시내로 가라, 골목으로 가라, 들판으로 가라, 산으로 가라. 산에 들판에 무슨 사람이 있다고... 마지막 한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라는 것입니다. 
택한 백성 마지막 한 명이 돌아올때까지 가라 하십니다.

이 명령을 듣고 본문의 종도 참 근사합니다. 
한번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아니오가 없습니다. 불순종이 없습니다. 
산으로 가라. yes. 강으로 가라. yes. 다시 가라. 네. 병든자를 업고 오너라. 네. 명령에 날아가지 않는 미사일은 아군기지에 자폭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의 명령에 날아가지 않는 영적인 미사일들은 교회안에서 자폭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죤 스토트의 책 가운데 「죄스러운 침묵」이란 책이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지 않는 사람, 주님의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은 영적인 자폐증 환자들이라고 했습니다. 

IV. 강권하여

본문에 대단히 인상깊은 단어 하나가 나옵니다. 
23절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슬랭영어에 강권하여 이 말을 “팔을 비틀어서라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살하기 위해서 한강 난간에 서 있는 사람을 향하여 거기서 설득하고 무릎꿇어 기도할 시간없다. 팔을 비틀어서라도 다리를 꺾어서라도 끌고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철길을 향하여 자살하려고 달려가는 젊은이를 향하여 설득할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팔을 비틀어서라도 끌고 나오라는 것입니다. 
지옥으로 달려가는 내가족, 내이웃 팔을 비틀어서라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지난번 섬기던 교회에서 전도잔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침 먹고는 여전도회 성도님들이 모입니다. 기도하고 둘씩 둘씩 짝이 되어 이동리 저동리로 흩어집니다. 저녁이 되면 퇴근하는 남선교 회원들과 기도하고 흩어지곤 했습니다. 어느날 우리 젊은 권사님들과 함께 기도하고 전도하러 막 교회앞을 나서는데 우리 앞에 쏜살같이 젊은 부인 하나가 애기를 업고 휘잉~ 달려갑니다. 머리는 갈대처럼 쏫구쳐 있었고 얼굴에 화장기는 전혀 없었고 애기를 등에 업었는데 애기가 궁뎅이 밑까지 흘러내립니다. 

손에 뭔가 들었는데 애기 우유병입니다. 그런데 왜 그 부인이 지나가는데 머리끝이 쭈삣하고 설까요? 직감이 좋지 않았습니다. 우리 전도사님 한분과 권사님 두분에게 저 여인을 무조건 따라가서 이상한 행동을 하면 무조건 끌고 교회로 오라고 그랬습니다. 저희들은 전도지 들고 전도하러 나갔다가 저는 도무지 궁금해서 교회로 돌아왔더니 교회안에서 우는 소리가 들리고 함께 붙들고 기도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사연을 듣자하니 옛날에 주일학교 교사까지 하던 분인데 불신자 만나서 시집왔습니다. 남편이 사업을 하고 돈꽤나 벌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업이 더 잘될 것 같아서 친정아버지가 보증을 섰더랍니다. 그런데 사업이 어려워져 부도를 만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친정 오라버니 둘이 모두 보증을 섰습니다. 부도가 났습니다. 남편이 설상가상으로 밤늦게까지 술 먹고 술집 여자랑 놀아납니다. 밤새도록 남편과 싸우고 아침에 애기를 업고 약을 타서 애기한테 먹이고 애기안고 자신도 한강에 뛰어들어 죽겠다고 뛰어가다 우리한테 붙들린 것입니다. 제가 복음을 제시했습니다. 

보통 전도폭발 복음제시는 30분 정도면 꼭 좋습니다. 두시간정도 걸쳐서 복음제시를 했습니다. 예수를 그대로 영접했고 자살을 접었고 제가 그 교회를 떠날 무렵에는 교회 집사가 되는 걸 보고서 그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때 그 전도대회,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물론 백명쯤 모이는 교인들이 천명의 결신자를 내는 엄청난 효과가 있었지만 이 여인 한명을 전도하기 위해서 40일동안 우리가 기도하고 몸부림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가치있는 전도를 했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나는 목사가 되어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이 여인 한명과 가족을 전도한 사건 하나만 내게 있었다 할지라도 나는 이 땅에 태어난 보람이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이번기회에 여러분들에게 이런 기적이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 앞에 섰을 때에 구원열차 9.9.9 전도축제 그 한 영혼을 구원하는 그 보람으로 나는 내 인생에 가치가 있었다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여러분의 순종에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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