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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최고의 법을 지키는 사람들 (약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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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법을 지키는 사람들 (약 2:1-9)
   
오늘 읽은 말씀 중에 8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8) 새번역성경으로 읽어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따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으뜸가는 법을 지키면, 잘하는 일입니다.”(8) 같은 말씀인데, 최고의 법이라고 하였고, 으뜸가는 법이라고 하였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이 계명은 최고의 법입니다. 그리고 으뜸가는 법입니다. ‘최고’라는 말은 헬라어로 ‘바실리코스’라고 하여 “왕의”, “왕에게 속한”, “최고”, “으뜸”이라는 말입니다. 최상이라는 말이요, 왕이 수여하고, 왕적인 위엄을 지니는 법이라는 말입니다. 이 법은 만왕의 왕이신 우리 주님이 주신, 최고의 법이요, 으뜸가는 법이요, 반드시 행해야 하는 법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이 있습니다. 계명이라고 하면 구약의 십계명을 생각하게 됩니다. 율법을 요약하고 또 요약하면서 가장 핵심적인 명령으로 정리한 것이 십계명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계명이 있다면 십계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 물었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이 때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새 계명은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요13:34-35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강론하시면서 다시 한 번 사랑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요15:12에서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주신 계명이요, 새 계명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셨는데, 당신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는데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요13:1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이라는 말, 영어로는 ‘LOVE’입니다. 이 말은 라틴어 Lubere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이 ‘Lubere’라는 말은 기뻐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그를 얼마나 기뻐할 수 있는가,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면 큰 사랑입니다. 기쁨, 이것이 사랑의 척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말의 ‘사랑’이라는 말이 더 좋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애틋이 여기며 위하여 생각해주는 마음”이라고 정의합니다. 양주동박사는 사랑이라는 말은 본래 사량이라는 말이었는데, 발음하기 좋고 쉽게 ‘사랑’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思) 생각할 사, 량(量-헤아릴 량) 생각해주고,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생각해주고 헤아려주는 마음을 사랑이라고 하면, 정말 좋은 정의입니다.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시고 남편을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십니까? 그의 입장에 서서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래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의 동생 야고보 선생님이 교회와 성도들을 돌아보실 때에도 사람을 차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 때에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사는 사회는 어디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교회당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금반지, 다이아 반지를 끼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도 들어옵니다. 오늘에는 다 좋은 옷을 입고, 들어오시고, 다 부자요, 다 환영받고, 존경받으실 분들입니다. 

안내하는 사람이 예배당 앞에 서 있다가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 특별한 호의를 보이면서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하였습니다. 조금 있다 보니 남루한 옷차림의 가난한 사람이 들어옵니다. “당신은 서 있든지, 내 발치에 앉든지 하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요, 성도들이 행할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이렇게 사람을 차별하고 판단하고 옷차림이 남루하다고 무시하면 그곳이 어디 교회입니까? 이것이 예수님이 사랑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예전에는 우리 한국교회에도 지게를 지는 지게꾼이 그 지게를 교회 앞마당에 받쳐놓고 예배드리려고 들어옵니다. 옷이 남루합니다. 옷은 땀에 젖어 냄새납니다. 그런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은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이 없습니다. 

교회에 오실 때에, 여러 분이 가지신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눈이 부시게 오라는 것은 아니고, 그래도 깨끗한 옷을 입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우리 옆 앉으시는 분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담배를 피우시는 분이 계시면 주일 날 아침에 반드시 샤워하시고 손을 따뜻한 물에 오랫동안 담그시고 비누로 여러 번 씻으시고, 담배 냄새를 제거하고 오려고 노력하셔야 합니다. 담배 연기가 옷에 절어 있고, 몸에도 깊이 배어 있으면 옆에 앉아 한 시간 예배드려야 하는 사람에게 미안한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성도로서의 예절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성도들과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려고 하면 먼저 우리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생각하면서 바로 그런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성도들을 사랑할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들이 이웃을 사랑하려고 하는데, 사랑스럽게 보이는 사람이 있고,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눈이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겠습니다. 우리의 눈이 바로 되지 못하여, 사람을 차별하고 어떤 사람은 사랑스럽게 보고, 어떤 사람은 사랑스럽지 못하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우리에게 이기적인 사랑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베풀어주신 그런 사랑이 아니라, 나의 이기적인 사랑으로 사랑하려고 하기에 이런 문제가 생기고 있습니다.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한다고 한 가마니를 쏟아 부어도 한 되도 건지지 못할 거야”,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 사람을 사랑하면 다음에 내게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야, 나는 한 되만큼 주었어도 얼마 후에 한 가마니가 되어 돌아올 것 같으니, 사랑하는 척 하는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얄팍한 사랑입니까? 이것이 우리가 가진 사랑의 현주소입니다. 받을 사랑만 계수하고 있다면 예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셨습니다. 그렇게 내어주어야 합니다.

사랑의 사도이신 요한은 사랑하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요한 사도의 별명이 “주의 사랑하는 사도”였습니다. 제롬이라는 교부가 전해주는 요한의 일화가 있습니다. 요한은 100세를 살았는데 그가 매우 늙었을 때에 에베소교회에서는 청년들이 노 사도를 의자에 앉힌 채 강단에 올려드리면 “소자들아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그 말씀을 언제나 반복하시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제자들과 교부들이 “사도여, 왜 언제나 같은 말씀만 반복하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교훈이시다. 그리고 너희가 이것만 행하면 족한 것이다”라고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있다면 사랑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의 가장 첫 열매이며, 가장 좋은 은사가 사랑입니다. 갈5:22-23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열매는 첫 열매가 열려야 두 번째 세 번째 열매가 뒤따라 열리는 법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는 사실 사랑의 열매들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방언의 은사로부터 시작하여 여러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자기가 받은 은사가 가장 좋은 은사라고 자랑하고 시기 질투하면서 소란하였습니다. 방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은사를 받았다는 말도 꺼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더욱 큰 은사, 가장 좋은 은사를 사모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고전12:31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고전13장에서 사랑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랑장입니다. 

우리 한국고아의 아버지는 한국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미국 사람입니다. 홀트 양자회의 ‘해리 홀트’라는 분입니다. 해리 홀트씨(1905-1964. 4. 28)는 1905년 미국 사우스다코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오레곤 주에서 농장을 경영하다가 1950년 심장마비로 죽음 직전까지 이르렀으나, 회복된 후 하나님 은혜에 보답하는 인생을 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1955년 6·25전쟁으로 고통 받는 한국의 어린이에 대한 영화를 보고 한국의 전쟁고아 8명을 입양하여 기독교정신으로 양육하여, 사회사업가, 의사, 교수 등으로 성장시켰습니다. 1956년 한국 고아들의 해외입양을 위해 대한구세군 본영 안에 사무실을 개설하고 주로 미국으로 입양을 보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경기도 고양에 일산원이라는 고아원과 완다학교를 세우고 고아들을 위해 죽기까지 헌신하였습니다. 

우리 정부에서는 40년 동안 6만 6000여 명을 해외로 입양시킨 공로를 인정하여, 1995년 그의 부인 ‘버다 홀트’ 여사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하였습니다. 해리 홀트의 묘지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의 공원묘지에 있습니다. 얼마나 귀한 사람이었고, 존경하였으면 외국인에게 훈장을 수여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파송된 서구의 여러 선교사들이 묻혀 있는 마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는 유일하게 일본사람이 묻혀 있습니다. 그는 소다 가이지와 그의 부인 우에노 다끼입니다. 

일본인으로 사회사업가이신 소다 가이지(會田 嘉伊知)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는 1867년 10월 20일 일본 야마구지겐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서울의 우리 동리인 후암동에 가마구라(謙倉) 고아원을 1913년에 창설하였는데, 그 당시 한국에서 처음으로 생긴 고아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한국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렀는데, 1945년 8. 15 해방될 때까지 운영하면서 고아를 돌아보고 길러내었습니다. 

그는 한국의 고아들을 위하여 자신의 전 재산을 다 바쳤습니다. 그가 해방과 더불어 고국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고아원을 누구에게 맡길까 고심하다가 영락교회의 한경직 목사님이시라면 고아들을 잘 돌아보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영락교회의 한경직목사님에게 맡기고 일본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한 목사님은 1948년에 서울보린원으로 인가를 받아 운영하였습니다. 6.25가 일어나므로 모든 고아들이 흩어졌다가 “영락보린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전쟁고아들을 많이 수용하면서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습니다. 

일본인 소다씨가 한국의 고아들을 위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는 그가 청일전쟁 후에 대만에 와서 독일인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때에 과로와 술에 취해 길에 쓰러져 있었는데, 그를 조선인 청년이 근처 여관이 데려다 눕히고 여관비까지 부담해준 것이었습니다. 

그런 일로 조선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서울,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의 일본어 교사로 취직하였고, 월남 이상재선생의 감화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숙명여고와 이화여고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우에노 다끼와 결혼하면서 철저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에게는 배신자라는 욕을 먹으면서 한일합방을 반대하고 항의하였습니다. 그가 감리교회의 전도사가 되어 남산감리교회를 설립하였고, 고아원을 운영하였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스파이라는 욕을 먹고, 일본 사람들에게 배신자라는 말을 들으면서 32년 간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1300명의 고아들을 먹이고 공부시켰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일본 사람이 순수한 기독교정신, 사랑을 가지고 고아를 돌아본 것입니다. 소다씨는 한국을 위하여 살다가 죽겠다고 하나님 앞에 서약하였는데, 그가 죽기 전에 1961년에 영락보린원으로 와서 고아들을 위하여 헌신하다가 1962년 3월 28일에 96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 정부에서는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사회장으로 장례를 거행하였고, 그의 유해는 마포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하였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도 아닌데, 우리 사회장으로 국회의사당 마당에서 장례를 지내고, 우리 정부에서 가장 기쁜 마음으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하였습니다. 그의 묘비는 크지 않습니다. 묘비 전면에는 “會田嘉以知先生之墓”라고 쓰여 있고, 옆면에 “언 손 풀어주고 쓰린 가슴을 만져 주어 일생을 길다말고 거룩한 길 걸었어라. 고향이 따로 있는가 마음 둔 곳 기어늘”라고 새겨 있었습니다. 한국을 고향을 생각하며 살아갔습니다.


말씀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1절을 보시 봅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광의 주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차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차별하지 말라는 말은 설명하지 않다고 잘 아십니다. 차별이라는 말은 ‘차이가 있게 구별하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있는데, 공평하지 못한 대우를 말할 때 차별대우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들이 되었습니다. 5절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여 주셨고, 믿음을 주셨고 부요하게 하셨으며,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여 주셨습니다. 하늘나라에 가보니 다 같은 상속자로 들어와 있습니다. 이 땅에서 잘 사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더 좋은 집에 들어가는 그런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이든지, 부유한 사람이든지 가리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면서 야고보 선생님은 다시 한 예를 들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2:14)고 묻고 있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2:15-16)라고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2:17에서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랑 얼마나” 이지은씨가 노래하고  설경옥씨가 작사, 작곡하신 “그 사랑 얼마나”라는 가사는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그 사랑 얼마나 "

“다 표현 못해도 나 표현하리라/ 다 고백 못해도 나 고백하리라/ 

다 알 수 없어도 나 알아가리라/ 다 닮지 못해도 나 닮아가리라/

그 사랑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사랑 얼마나 날 부요케 하는지/

그 사랑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그 사랑 얼마나 나를 감격하게 하는지/

우리는 주님의 사랑으로 감격하고 있을 수 만은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 구원받았기에 이제는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나가서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면서 주님이 주신 최고의 법을 이루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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