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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통과 은혜의 이중주 (엡 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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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은혜의 이중주 (엡 3:7-13)

7.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8.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9.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10.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12.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13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성경 안에 흐르는 거대한 두 주제로, 우리 삶에 아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이 있습니다. 바로, 고통과 은혜입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 삶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이것에서 벗어나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두 주제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과 은혜는 해독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과응보적 법칙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행함에 대한 보상과 처벌의 원리를 예외 없이 적용하고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원리, 잘하면 상을 받고 실수하면 실수한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어떤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원리에 아주 익숙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법칙에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욥기를 보면 욥은 너무나도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순간에 재산과 자녀들, 건강까지 다 잃는 초특급 재난을 당합니다. 이때 욥의 친구들은 그 고난을 해석하려고 합니다. 욥을 도와주려고 하지만, 욥에게는 아주 아픈 이야기입니다. “욥, 회개해야 돼. 네가 분명히 잘못한 것이 있는 것 같아. 죄 없이 망한 자가 어디 있느냐?” 이것이 인과응보적인 해석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통에 대해서 너무 쉽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에게 위로한다고 하는 말이 속을 뒤집어 놓는 경우입니다. 그럴 때는 조언을 하기보다 손을 잡고 함께 울어주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인과응보적인 법칙에 익숙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고난이 있을 때 노골적으로 말을 하지는 않지만, 은근히 저 사람에게 무슨 숨은 죄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무엇인가 고통의 원인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고통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복잡하고 난해해서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은 다면체입니다. 한 가지로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수많은 고통에 연관됩니다. 태어날 때부터 고통으로 시작됩니다.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찾아올까? 암에 걸리고 싶어서 걸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암이 찾아옵니다. 이것을 해석할 수 있을까요? 유전자의 문제? 형제라고 다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담배를 피우는데도 폐암에 걸리지 않고 잘 삽니다. 교통사고도 그렇습니다. 자동차들이 중앙에 선을 하나 그어놓고 수없이 오고 갑니다. 알고 보면 아찔한 일입니다. 술 먹고 중앙선을 넘어오면 언제든지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운전을 잘하는 것과는 상관없습니다. 10여 년 전에 <지선아, 사랑해>로 알려진 이지선 자매도 교차로에 가만히 서 있는데 음주운전을 하던 사람이 일방적으로 박아 전신 55%에 3도 화상을 입고 꽃다운 나이에 온몸이 녹았습니다. 

인생이 고통의 한가운데로 들어간 것입니다. 내 잘못이 아니라 나와 전혀 상관없이 닥치는 고통의 문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어떤 때는 고통을 해석하려는 것 자체가 잔인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날 때부터 난치병을 앓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100만 명 중의 한 명 정도가 걸리는 병에 걸린 아이를 기르는 부모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예상이나 했을까요? 이 고통은 예고도 없이 갑자기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고통에 대해 이해할 만한 설명이 붙지 않습니다. 

욥기서에서 욥이 당하는 진짜 고통은 고통의 이유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매를 맞아도 이유라도 알고 맞아야 하는데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은 더 깊은 고통으로 몰고 갑니다. 그런 순간에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 살아 계세요?”, “내가 고통을 당할 때 어디에 계셨습니까?”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고통에 대해서 침묵하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고통의 깊은 곳에 있을 때, 하나님이 고통에 대해서 설명을 하신들 우리가 납득이 될까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자식을 위해 새벽마다 기도하는 부모의 아이가 말썽을 피우고 속을 썩이는가 하면, 불신자 가정의 엄마는 날마다 놀러만 다니고 자식이 고 3인지 고 2인지도 모르고 신경을 안 썼는데도 일류대학에 들어가서 장학금을 받아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설명이 잘 안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날 동안 고통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인류가 죄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후 인간에게 고통은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있습니다. 이 세상은 거대한 고통의 도가니와 같습니다. 죄악된 세상에서 고통은 불가피합니다. 고통은 우리를 절망하게 하면서 문제가 지나면 또 하나의 문제가 파도처럼 다가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다루지 못하면 인생이 한순간에 침몰할 수 있습니다. 고통이 폭군처럼 거칠게 몰아치면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무릎을 꿇습니다. 욥은 그에게 닥친 고통으로 태어난 것을 저주했습니다. 

문제는 고통 자체보다 고통에 대한 바른 이해와 믿음의 태도입니다. 고통을 바로 다루지 못하면 인생이 침몰하게 됩니다. 고통 때문에 원망과 자학과 저주로 가득 찬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이 고통이 저주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며 내 인생에 다가오는 축복인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이 더 이상 저주나 불행으로 끝나지 않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고통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을 때가 많지만, 설명 대신 우리에게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세상은 알 수 없는 고통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놀라운 것은 그 고통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를 집어삼키고 있는 고통의 문제를 내가 해석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은혜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필립 얀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에서 ‘은혜는 기독교에서만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 신학의 기초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바울 서신을 읽다보면 끊임없이 듣게 되는 단어가 바로 ‘은혜’입니다. 바울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8~9절에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와는 상관없이 살았던 자신이 어찌하여 사도가 되었고, 이 복음을 깨닫게 하셨는지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모든 삶의 이유는 그분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는 세상, 무엇을 해야만 얻을 수 있는 세상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이 은혜의 원리는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고 하지만, 그 은혜를 깜빡깜빡 잊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를 오래 믿다 보면 “그래도 내가 구원받을만하니까 하나님이 택해주셨지”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구원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저런 인간이 우리 교회에 오면 어떻게 하나. 나 정도는 돼야 예수를 믿지.” 합니다. 구원 얻을 만한 근거를 나에게서 찾습니다. 건강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은 하지만 가만히 보면 자기가 매일 운동을 하기 때문에, 또는 어떤 건강식품이 좋다고 합니다. 은혜가 무색해집니다. 

은혜라는 단어를 알긴 하지만 은혜를 깊이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그저 인사치레로, 형식적으로 말끝에 붙여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골수에 사무치는 단어가 은혜입니다. 그래서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은 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정말 구원받았다는 것은 미스테리입니다. 은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기치 않는 고통으로 인생의 밑바닥을 기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한다면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줄 믿습니다. 설명이 안 되는 고통으로 절망하는 우리에게 설명이 안 되는 은혜가 덮어지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억하십시오. 인생은 고통의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은혜의 크기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은혜 없이 고통만 당하면 진짜 죽습니다. 그러나 고통 자체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고통을 압도하면 고통은 저주가 아닙니다. 은혜 없이 당하는 고통이 저주입니다. 은혜 안에서 고통이 다루어지면 그때부터 고통은 더 이상 우리를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더 풍성한 세계로 이끄는 비밀이 됩니다. 이 비밀을 아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선아, 사랑해>의 이지선 자매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고난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고난이 사람을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비밀이 무엇일까요? 은혜입니다.

인생은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 가만히 생각해보면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한국 역사 속에 수많은 절과 무당, 유교문화로 가득 찼는데 내가 예수를 믿고 이 자리에 앉아 예배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예수를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불교 가정에서 예수를 믿게 되어서 그런지 너무너무 신기합니다. 살아오는 동안 지은 죄가 좀 많습니까? 죄를 다 열거한다면 그 분량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행동이 아니라도 말이나, 생각으로 지은 죄는 얼마나 많을까요? 그 중에 100분의 1이라도 드러난다면 내 가족이라도 용서를 해줄 수 있을까요? 

따져보면 벼락 안 맞고 산 것이 다행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따진다면 살아남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는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것이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나를, 왜 이런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밀고 들어왔을까요?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남성다운 에서는 놔두고 교활하고 질이 안 좋은 야곱을 선택하셨을까요?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실까요? 해석이 잘 안 됩니다. 

다윗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그렇지, 밧세바 사건을 둘러싼 일들을 보면 그는 재기불능입니다. 그런데 신약의 평가는 ‘내 마음에 합한 자’였고, 그 계보를 통해 메시아가 나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신기하고 이해가 안 됩니다. 

베드로를 보면, 예수님의 수제자이지만 사고치고, 배반하고, 도망쳤는데 사도행전에서 기가 막히게 사용됩니다. 

요셉은 어릴 적부터 노예로 팔려가서 그 정도의 어려움을 당했다면 심각한 문제아로 자라나 사고를 쳤어도 수없이 쳤을 것입니다. 출세를 했어도 수많은 사람들의 목이 날아가게 하는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시련과 배신을 당한 사람 같지 않게 부드럽고 반듯합니다. 무엇이 그의 인생에 들어왔기에 고통 속에서도 그런 모습으로 일어설 수 있었을까요? 

모세는 모든 히브리 남자아이들을 죽이는 그 서슬 퍼런 시대에 갈대 상자에 담겨 나일강으로 정처 없이 떠내려가다가 어떻게 바로의 궁에 들어갔고, 왕실의 보호 속에서 그것도 엄마의 젖을 먹으며 자라게 되었을까요? 설명이 안 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처럼 고통이 가득한 세상에 고통에 짓눌려 자학하고 원망하고 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아십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고통을 그대로 두십니다. 그리고 “내가 너의 고통을 알고 있다”고 하십니다. 야속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가 알고 있다”고 하신 것은 그 고통이 하나님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고통에는 하나님의 비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아들을 외면하셨습니다. 아들은 외면당하고 홀로 십자가에 매달려 처참하게 죽으셨습니다. 그 순간에는 버림받은 것이고 그 고통은 해석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침묵은 고통 안에 감추어진 또 다른 놀라운 축복과 은혜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잠시, 더 큰 축복을 위한 일시적인 외면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도 우리가 온전히 다 알 길이 없는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그 아들을 매달고 외면하셔야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고통은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요?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 아버지의 고통을 깨달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 구원의 빛이 새어 나와 우리를 덮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도 여러분, 고통도 신비이고 은혜도 신비입니다. 알 수 없는 고통으로 힘들게 살아가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겪는 고통을 다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예수를 믿는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일방적으로 주셨습니다. 왜 나를 택해주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한 것은 죄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험하고, 한 치 앞도 알 수 없고, 고통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보다 훨씬 더 큰 하나님의 은혜가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이 좋은 선수들이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고 카메라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라고 선포하는 것을 보면 참 감동적입니다. 그 선수가 흘렸던 땀과 눈물, 숱한 세월 동안 고통스러운 훈련을 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라니 기가 막힙니다. 

내가 아무리 피눈물 나는 훈련을 했다 해도 그 메달을 걸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불가능했다는 진심 어린 고백은 은혜가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이 아니면 할 수가 없습니다. 은혜를 알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설명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거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내 인생을 붙들고 있기에 내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수많은 고통이 다가오겠지만, 그 고통보다 더 큰 은혜가 내 인생을 세우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깨닫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식은 부모의 은혜를 깨닫기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립니다. 진짜 부모님의 은혜를 깨닫고 나면 부모님은 안 계십니다. 내가 깨달았다고 해도 모르는 것입니다. 어찌 알겠습니까? 한 생애 동안 자식을 위해 가슴을 조아리며 눈물과 땀으로 희생한 부모의 은혜를 자식이 어찌 깨달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까요? 너무 크면 모르는 것입니다. 제 아들이 어릴 때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으면, 한 입만 달라고 하면 안 주려고 합니다. 누가 사줬는데, 또 사주고 사줄 것인데 안줍니다. 아이는 자기 손에 있다고 자기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자기의 손에 있는 것이 전부인줄 압니다. 

은혜를 깨닫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배은망덕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그 속까지 파고드는 존재 이유를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온 삶으로 깨닫고 있습니다. 맛을 본 사람은 압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에게는 그것보다 더 크고 놀라운 것이 없습니다. 그것보다 더 황홀한 것,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놀랍습니다. 

이지선 자매는 사고 후, 10면 만에 <다시 새롭게 지선아 사랑해>를 냈습니다. 그녀는 얼굴과 몸은 일그러졌지만, 자신이 지금 누리는 행복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는 “재처럼 타버린 나에게 하나님께서 화관을 씌워주셨다”고 간증합니다. 바로 은혜의 힘입니다. 고통보다 더 큰 은혜가 그의 인생을 덮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난이 나에게 찾아오지 않는 것, 나에게 주어진 고통이 빨리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 있으면 세상은 아름답게 변합니다.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습니다. 분명히 인생에서 고통의 문제는 힘들고, 아프고, 때로는 죽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고통을 아름답게 바꾸는 위력이 있습니다. 이제 더이상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라고 하지 말고, 고통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다면 축복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나의 노력, 능력, 잘남이 아니라, 예기치 않는 순간에 다가와 나의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만 있다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5:28)」 

오늘 내가 내 힘으로 인생을 버티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 힘과 재주와 노력, 그런 것들은 한방에 바람과 함께 날아가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고통이 난무한 세상 가운데 삽니다. 피해 갈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우리를 절망하고 좌절하게 할 수 있지만, 또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그 고통을 에워싸는 고통과 은혜의 이중주 속에서 우리는 고통에 매몰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더욱 비상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수 있는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가 우리를 사로잡는다면 우리는 넉넉히 이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통 속에 혼자 몸부림치지 마시고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로 나오셔서 그 은혜를 누린다면, 고통이 영광이 되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 고통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습니다. (이규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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