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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앞에 선한 것 (미 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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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 선한 것 (미 6:6-8)         

기도해 주신 덕분으로 선교여행을 잘 마치고 왔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이 뿌듯했던 것은 방대한 강물 선교사님 부부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말 열심히 사역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사역자보다도 현지 언어를 잘 해서 예배하고 세례를 베풀고 성찬을 행하는 데 조금도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이번에 여덟 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십년을 있어도 단 한 명도 건지기 힘든 무슬림 지역에서 상상도 못하는 기적 같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세례를 받으려고 네 시간 걸리는 곳으로부터 밤 열 두 시가 넘어서 온 청년도 있었습니다. 남편에게 맞아 입술이 터진 채로 온 아기 엄마도 있었습니다. 

그 분들은 영화에서 본대로 침례를 받길 원했기에 어린이용 풀장을 설치하여 침례 방식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때 입었던 옷을 거룩한 기념으로 평생 보관하겠다고 하면서 가져갔습니다. 마침 정다운 집사님이 가 계셨고, 김정문 장로님이 동행하셔서 매우 뜻 깊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진 중 몇 장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분들을 위해 계속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처럼 자유로운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게 해 주신 은혜에 늘 감사해야겠습니다. 

그 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그 메마른 사막 주변에도 수천 년 전의 유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장구한 역사와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꼭 우리처럼 살아야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정을 이루고 집을 짓고 농사를 짓고 문명을 일으키면서 살다 갔을까 생각했습니다. 누가 그들을 기억해 줄까요? 또 기억해준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가 바쁘게, 아웅다웅하면서, 작은 일에 분노하고 기뻐하면서 살아가는 일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런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결론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복음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작지만 거룩한 몸부림을 치면서 살아가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수명의 길고 짧음, 경제적으로 부유한지의 여부, 건강유무, 유명함과 무명함 등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게 사는 것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은 매우 중요하고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합니다. 8절 앞부분을 보십시오. <사람이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라고 했습니다. <선한 것이 무엇인가?> 이 질문은 <선하게 사는 방법, 가치 있게 잘 사는 방법,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삶을 사는 비결, 더 근본적으로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질문>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살면 좋을까요? 

8절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아멘! 이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 가지가 언급됩니다. 그 세 가지가 무엇입니까? 

첫째, <정의>입니다. 

<오직 정의를 행하며>라고 하셨습니다. 정의가 무엇입니까? <정의>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율법>이나 <규례>, 혹은 <관습>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선지자들에게는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의미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게 정의입니다. 
미가 선지자가 활동하던 남 왕국의 요담 왕, 아하스 왕, 히스기야 왕 시대에도 죄악이 만연해 있었습니다. 미가서에 나타난 당시의 죄악상을 몇 가지 찾아보겠습니다. 

우선 2장 1-2절을 보면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3장 11절에서는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죄악이 가득한 상황에서 정의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강력하게 요구하고, 엄격하게 율법을 적용해야 합니다. 조금도 틈을 주면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앙심 좋은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요? 늘 엄숙한 얼굴로 잘 웃지도 않고, 조금의 잘못도 용납하지 않고, 함께 있으면 숨이 콱 막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오래되어 곰팡이 냄새가 나는 듯한 분위기일 것입니다. 가족 중에 이런 사람이 있으면 숨을 쉬기 힘듭니다. 

물론 엄격한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욥기 31장 1절을 보면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고 되어 있습니다. 욥은 행여 마음에 부정한 생각이라도 생길까 염려하여 처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정결하게 지켜 나가는 것이 뭐가 나쁘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방향입니다. 즉 자신에 대해 엄격한 것은 좋은 일입니다만, 자신에게는 율법을 어겨도 관대하면서 남들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는 게 문제입니다. 
예수님 당시 간음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 끌려온 일이 있었지요. 율법대로라면 여인은 돌에 맞아 죽어야 했습니다. 이미 사람들의 손에는 돌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따라 엄격하게 처리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 현장에 있었던 모든 사람이 돌을 들었을까요?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녀와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맞대던 이웃 아낙네들, 그녀의 어릴 적 친구들, 그녀가 얼마나 외롭게 살아왔는지를 잘 알기에 불쌍히 여기는 여인네들은 돌을 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손에 돌을 든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을 것입니다. <왜 돌을 들지 않느냐? 인정보다 하나님의 율법이 우선이다. 돌을 들지 않은 사람들은 신앙심이 없다.>고 했을 것입니다. 정말 그들의 말대로 돌을 들지 않은 사람들은 신앙이 없고, 분노로 돌을 든 사람들만 신앙이 투철한 사람일까요? 물론 당시 기준대로라면 돌을 든 사람들이 훨씬 신앙심이 좋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게 있었습니다. 정의는 남에게 엄격할 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정의는 자신에게 엄격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정곡을 찌르셨습니다.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비수가 되어 그들의 영혼을 찔렀습니다. 그들의 양심의 눈이 열렸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보게 되었습니다. 자신도 그 여인보다 나을 게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한 사람씩 돌을 내려놓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 때 거기서 정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먼저 보게 되는 순간 정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진정한 정의는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들에게는 관대할 때 이루어집니다. 자신의 작은 죄에 대해서는 가슴 아파 회개하고, 타인의 잘못은 통 크게 용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정의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인자>를 말씀하셨습니다. 

8절은 <인자를 사랑하며>라고 하셨습니다. 인자는 헤세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사랑을 말합니다. 인자는 남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인자는 정의와 그 방향이 다릅니다. 정의가 자신에게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면, 인자는 남들에게 풍성하게 베풀어져야 합니다. 다른 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다른 사람들의 약함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마음,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애통해하는 마음, 이게 인자입니다. 

미국 뉴욕의 한 법정에서 한 노인이 빵을 훔친 죄로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배가 고파서> 빵을 훔쳤다고 했습니다. 판사는 노인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했습니다. 노인은 벌금을 낼 수 없고, 따라서 감옥에 가야 했습니다. 

재판이 끝난 후 판사는 법복을 벗고 내려와 노인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법정 안의 방청객들에게 말했습니다. <법복을 벗는 순간 저도 평범한 뉴욕 시민입니다. 이 노인으로 하여금 빵을 훔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든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죄인입니다. 이 노인의 벌금은 제가 내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노인 방치한 책임으로 50센트씩 모아 주십시오. ..> 

그 날 노인은 47달러 50센트를 받아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마음이 어질고 인자한 판사는 후에 뉴욕의 시장 직을 세 번이 역임한 <피오렐로 라과디아, Fiodello LaGuardia>입니다. 그의 이름을 따라 1939년에 문을 연 공항을 라과디아 공항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 노인을 정죄하기보다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이게 인자입니다. 

자신에게 엄격한 것이 정의요, 남에게는 한없는 사랑을 베푸는 것이 인자라고 할 때 그 최고 모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향해서는 엄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엄격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은 죄가 없지만,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우리 대신 죄인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죄들을 적당히 넘기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적당히 해결하려고 하지 않으시고 죄 값을 치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이게 정의였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달려 죽었어야 할 자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인자, 하나님의 사랑을 주시기 위해 당신에게는 무서운 정의를 적용하셔서 죽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습니까? 우리는 예수님과 정반대로 살아왔습니다. 남들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어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성령의 사람이 되면 이게 변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인자를 알게 해 주십니다. 여기서 용서가 이루어지고 사랑이 열매를 맺습니다. 

지금까지 같은 죄를 반복하면서도 변화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자신에게 엄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괜찮아, 넌 죄를 좀 지어도 돼!>라고 속삭이기 때문입니다. 이러다보니 정의가 없습니다. 
또 남들을 아직까지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남들에게 인자를 베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녀석을 절대 용서하지 마라. 그 녀석은 좀 당해 봐야 돼!>, 이럴 때 인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서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살길 원하십니다. 그렇게 할 때 가정은 따뜻해지고 세상은 살만한 곳이 됩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할 수 있길 기원합니다. 

자, 그러면 정의를 행하고, 인자만 베풀면 그것으로 다 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정적인 것 한 가지를 더 말씀하셨습니다. 8절을 계속 보면<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하셨습니다.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이게 세 번째 요소입니다. 

왜 이것이 필요할까요? 자신에게 엄격한 정의를 행하고, 남들에게 인자를 베풀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한 미국 교민 장로님이 사업을 했습니다. 매일 아침 종업원들을 모아 직원 예배를 드렸고, 교회에도 충실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종업원들에게 늘 욕을 얻어먹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매일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도 월급은 너무 적게 주었습니다. 인격적으로 심하게 대했습니다. 자기중심으로 행동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다 그 장로님을 나쁘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그 분보다 낫게 살고 있을까요? 이 세상에 아무리 정의와 인자를 바르게 행해도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앞의 장로님도 나름대로는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하는 정의와 인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그것만으로 안 되기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긍휼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면 그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정의와 인자를 최선을 다해 행한 후에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의와 인자를 행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부정하고 부족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저를 받아 주옵소서....> 이런 태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이게 겸손히 하나님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교만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보다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길 원합니다. 자신이 정의와 인자를 행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혹은 하나님을 홀딱 반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이들은 제사마저도 무슨 대단한 자기 과시처럼 여깁니다. 이들의 제사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겸손한 제사가 아닙니다. 거창한 제사로 하나님을 매수하려고 합니다. 

6-7절을 보세요.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그들은 일 년 된 송아지, 천 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 심지어 자식을 드려도 하나님의 마음을 살 수 없음을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차피 하나님 앞에서 부족한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부족한 우리를 격려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오늘 주신 세 가지를 모아서 말하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이 녀석아, 좀 잘 해 봐. 왜 맨날 그 모양이냐? 너 자신을 잘 똑 바로 세워 봐. 그리고 네 친구 아무개에게 좀 잘 해 줘. 그 녀석도 내가 사랑한다는 것을 잘 알지 않느냐? 잘 대해 줘. 그리고 나중에 나한테 와. 내가 널 잘 돌봐 줄께. 너무 남에게 차갑게 굴지 말고, 좀 웃어. 따뜻하게 살아. 나머지는 내가 책임진다....> 
이게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마치 학비를 벌려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들에게 말하는 아버지와 같습니다. <그래 돈 벌기 힘들지. 한 푼이라도 아껴.> 이게 정의입니다. <그렇지만 어려운 친구를 만나면 밥이라도 한 그릇 사 주고, 돈도 좀 쥐어 주거라. 너무 짜게 굴지 말고.> 이게 인자입니다.  <그러다가 학비 모자라면 어떻게 하느냐구? 그건 내가 책임진다......>, 이게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 가지, 정의, 인자, 그리고 겸손히 하나님을 찾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이 세 가지를 요구하셨습니다. 호세아 10장 12절에서도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는 공의, 인애, 여호와를 찾음, 이 세 가지가 나오지요? 또 호세아 12장 6절은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인애, 정의, 하나님을 바라는 것, 이 세 가지가 나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도 <두 종류의 의>라는 글에서 동일한 말을 했습니다. 중간부터 보면 이렇습니다. <.........이것은 선한 일을 하면서 유익하게 보내는 삶의 방식인데, 첫째로 자기에 대하여 육을 죽이고,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게 오늘 우리가 말한 정의지요. 또 계속 보면 < ......둘째로, 이 의는 이웃을 사랑하는 데 있으며,...> 이게 인자지요? 또 계속됩니다. <.... 셋째로 하나님에 대하여 온순하고 두려워하는 데 있습니다.......> 이게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지요.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잘 살아가는 것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 엄격하게 하나님의 뜻을 적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관대하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늘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집중하면서 살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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