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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편지 형식 속에 나타난 주님 (계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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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형식 속에 나타난 주님 (계 2:1-7)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주님이 나타났을 때 요한은 그 주님을 보고 발 아래 엎드러졌다. 주님은 요한에게 오른손을 대어주시고 할 일을 맡겨주셨다. 그것은 기록하는 일이었다. 요한은 예수님이 하라고 하시는대로 팔을 들었다. 당시의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해 편지를 썼다. 

소아시아에는 1,000여개의 크고 작은 마을이 있었다. 그러나 일곱 교회가 편지를 보내는 수신자가 된데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일곱 교회의 이름들이 가지고 있는 뜻이 교회의 영적 특징을 나타내고 또 시대적 교회의 특징을 암시해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일곱 교회의 이름과 그 교회의 특징이 원시 기독교회로부터 현대 교회까지 2,000년 동안의 교회 역사를 일곱 시기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요한 기록하여 남긴 일곱 교회는 이런 의미에서 교회를 흔들어 깨우고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 지를 예견하게 해준다. 

요한은 편지를 써서 기록한 글을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의 사자에게 보냈다. 그러니까 교회를 돌보는 사자들은 메시지를 받아 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곱 교회의 성도를 향한 것이 된 것이다. 교회의 사자, 주의 종들은 중요하다. 계시로 받은 메시지가 전해졌어도 주의 사자들이 자신의 지역 교회 성도에게 그대로 전하지 않는다면 알 소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주의 종들이 경성하고 바로 서야 한다. 잘 읽고 잘 듣고 가감없이 잘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잘못 전하면 오해가 생기고 엄청난 사고가 생길 수도 있다. 

오랫동안 외지에 출장을 나간 남편이 집에 돌아왔다. 침대에 자고 있는 부인의 얼굴이 사랑스러울 때 책상 위에 예쁜 꽃 한송이와 편지가 적혀 있는 것이 놓여 있다. 아내를 깨우려는 순간 그 편지를 읽었는데 ‘사랑하는 그대에게 나의 생명보다 더 귀중한 그대에게 당신을 잊지 못하는 OO으로부터...’라고 씌여 있어서 너무도 화가 나고 자신이 없는 사이에 딴 남자의 사랑의 고백을 받고 태연히 자는 아내가 가증스러워서 목을 졸라 죽여 살인자가 되었다. 

그 후 사실 여부를 조사해 보니 그것은 이웃 아파트의 옆집 아가씨에게 보내진 꽃이었는데 마침 아가씨가 없어서 옆집에 사는 아주머니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을 받아서 책상 위에 놓아둔 꽃과 편지였던 것이다. 

사실을 정확히 모르면 이런 사건이 생기 듯 요한계시록을 더욱 주신 말씀대로, 기록된대로 잘 전해져 설명되지 않으면 더 큰 비극이 생길 수 있다. 

오늘의 이단들은 모두 다 사실 여부는 덮어둔 체 잘못된 해석을 하여 수많은 영혼들을 죽음에 떨어뜨리고 있다. 그래서 교회를 돌보는 목사들은 정신을 차리고 전해야 하고 성도들은 또한 아무렇게나 성서 해석을 들어서도 안된다.   

여기 요한이 써서 보낸 일곱 교회의 메시지는 편지 형식으로 공통된 폼이 있다.

형식1. 교회에 나타난 주님의 모습이 있다.

형식2. 교회를 알고 계신 주님의 평가가 있다. 즉 주님께 칭찬 듣는 내용과 책망 듣는 내용이다.

형식3. 교회에 요구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있다.

형식4. 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축복의 상이 있다.

형식5. 교회에 제안하는 주님의 명령이 있다.

오늘 계2:1~7까지에 기록된 에베소 교회, 계2:8 서머나 교회, 계2:12 버가모 교회, 계2:18 두아디라 교회, 계3:1 사데 교회, 계3:7~13 빌라델비아 교회, 계3:14 라오디게아 교회를 포함해서 다 이 공통된 형식으로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이 형식을 따라서 에베소 교회를 살펴보기로 하자.
  

<형식1>. 주님의 모습은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모습이시다. (계2:1)

계2:1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일곱 별, 즉 주의 사자를 붙잡고 계신 주님과 일곱 금 촛대, 즉 일곱 교회를 감독하고 지키시는 주님의 묘사이다. 왜 주님이 붙잡고 거니시는가? 바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주님에게 있어서 교회란 ① 피로 사신 교회다. 

행20:28을 보면 피로 세우신 교회이기에 주님이 특별하게 생각하신다.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피로 산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피로 사셨다는 것은 최고로 사랑하는 대상이란 뜻이다.

주님에게 있어서 교회란 ② 주님의 몸이다.

고전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주님은 교회와 유기적 관계 속에 있다. 교회가 아프면 주님도 아프다. 교회가 기쁘면 주님도 기쁘다. 주님은 자신의 지체로 교회를 사랑하기에 하나됨의 운명으로 사는 것이다. 엡1:23에서 주님이 교회의 머리라는 말은 이런 면에서 더욱 실감나는 것이다. 한 몸을 이루고 있기에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에게 있어서 교회란 ③ 하나님의 백성이다.

벧전2:8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다. 택하신 족속이라는 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라는 말이다. 마지막 때에 세상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조롱한다. 음부의 권세가 도전한다. 정치, 경제, 인문학, 과학, 사회적 제도를 다 동원해서 교회 뺨 때리기를 계속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속이 된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기게 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에 사환이 아니시기에 하나님의 교회가 침노당하는 것을 방치하지 않는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지점이기 때문에 더욱 사랑하신다.

주님에게 있어서 교회란 ④ 주님을 맞이하는 신부다.

계19:7~8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마25:6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교회는 주님의 거룩한 신부다. 여기서 요3:29을 보면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신 주님이다. 주님은 그 신부를 가장 기뻐하고 사랑하신다. 주님이 어찌 교회를 모른 척하고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이런 면에서 주님은 교회를 붙잡고 거니시는 이로 나타나셨다. 지극히 교회를 사랑하는 모습이다.
  

<형식2>. 주님의 평가는 에베소 교회를 너무도 잘 아셔서 칭찬과 책망으로 드러내신다. (계2:2~3)

계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계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주님의 평가는 행위와 수고에 대한 칭찬이다. 즉, 에베소 교회는 믿음만 말하지 않고 믿는 자다운 행위와 수고가 동반된 땀 흘리는 실천 신앙가라는 칭찬을 듣는다. 에베소 교회의 처음 신앙 행위는 우리들이 배워야 할 내용이다. “주여 주여”하고 믿음만 있으면 다라고 생각하는 반쪽 신앙인이 많이 때문이다. 믿음과 행위가 같이 나오지 않으면 반신불수 신앙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그 구원을 선한 행위를 위해서 구원 받은 거라는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요구된다. 에베소 교회의 칭찬은 기초가 잡힌 영적 분별력에 있었다. 더러운 이단들과 사기꾼 사도들의 거짓됨을 분별해 내는데 탁월한 안목이 있었다. 

그런데 이 교회를 잘 아는 주님에게 듣는 또 다른 책망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의 행동은 사랑에서 나왔다. 사랑의 뜨거운 가슴에서 손발이 움직였다. 그런데 그 첫사랑이 식어갔다. 거짓 분별, 악한 자 분별하느라 옳고 그름만 따지게 되었다. 정말 교인들에게 있어야 할 살아있는 믿음, 행동하는 신앙의 에너지인 사랑이 식으면 안된다. 에베소의 뜻은 ‘Desire, 욕구’란 말이다. 영분별을 잘하고 견디는 인내와 게으르지 않은 성실이 있어도 사랑에 대한 욕구와 갈망이 계산적인 교인, 화석화된 교인, 체면과 상식에 머무는 교인이 되기 쉽다. 주님은 칭찬과 책망, 두 가지를 병행하시면서 에베소 교회를 사랑으로 뜨거운 교회로 세우려고 하신다. 
  

<형식3> 교회에 대한 요구로 회개하라 하신다. (계2:5)

계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 주님을 따르려고 했을 때 가지고 있었던 순수한 사랑, 처음의 헌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살 길이다. 어디서 떨어졌는가? 믿음 지수가, 사랑 지수가, 행동 지수가 어디서부터 식고 무기력해지고 말았는가? 헌신 지수가 사랑 대문인가? 돈 때문인가? 장로님 때문인가? 정의란 가치 때문인가? 어디서 떨어졌는가? 누구 때문이라는 것을 버리고 돌이키자. 

회개란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떨어지는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 회개이다. 잘못된 것을 계속 붙잡고 있지 말라. 처음 행위를 붙잡으라. 못된 것을 청산하고 돌아서라. 그렇게 잘 믿고 봉사했는데 지금 왜 그렇게 의심만 하고 있는지, 「신앙 실천 4대 운동」이 선포되었는데 왜 미이라처럼 맥박도 뛰지 않고 도전하고 싶은 용기마저 없는지, 처음으로 돌아가라. 뜨거운 사랑으로 돌이켜라. 해보지 않고 냉소하는 이 죽은 송장 같은 싸늘한 신앙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그것이 살 길이다. 

  
<형식4>. 교회에 주시는 상은 계2:7下의 말씀이다.

계2:7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생명나무의 열매란 무엇인가? 창3:22~23을 보면 생명나무 열매는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다. 창3:24을 보면 범죄한 인간에게 영생을 허락할 수 없어 생명나무의 길에 그룹들을 두어 지키게 하신다. 죄인은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없다.

그런데 오늘 이기는 자에게 약속의 상이 주어졌다. 생명나무 열매를 먹게 한다. 영생을 주신다는 상이다. 우리는 이 상을 놓쳐서는 안된다.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의 미혹, 마귀의 의심과 거짓말과 싸워 이겨라. 일장춘몽 같은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에 붙잡이지 말라. 어떤 영적인 도전 앞에서도 이기는 자가 되라.

땅에서도 이기기 위해 메달리스트들이 구슬 같은 땀을 흘리는데 우리는 이기기 위해 신앙의 근육들을 얼마나 단련하고 있는가? 후반부 4대 신앙 실천 운동은 신앙을 떨어뜨리려는 모든 원수들과 싸워 이기게 하려는 훈련이다. 용사가 되어 이기려 하자. 저녁 기도, 감사 드림, 비전 나눔, 예배 훈련을 잘 받아들여 이기는 자에겐 틀림없이 상이 있다. 이 영적 가치들을 증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자. 에베소 교회에게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 앞에 바로 서라. 

  
<형식5>. 교회에 제안하는 주님의 명령은 계2:7上의 말씀이다.

계2:7下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오늘의 이 메시지가 성령이 하시는 말씀이시다. 귀가 있는가? 우리는 다 귀가 있다. 그런데 못 들으면 귀가 없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귀가 있는가? 있다면 들으라. 교회에 제안하시는 음성을 들을지어다. 들음으로써 이기는 자가 되고 회복되는 성도가 된다. 들음으로써 사랑을 회복하고 상받는 성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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