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탈출(2) 두려움으로부터 (신 7:17-26)

첨부 1


탈출(2) 두려움으로부터 (신 7:17-26)

요즈음 앞으로 1929년에 미국에서 일어난 경제공황처럼 다시 경제공황이 몰려오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국은 제 1차 세계 대전으로 왕성하게 전쟁 물자와 장비들을 생산하고, 생산하는 대로 소모가 되는 전쟁 특수 생산 시설들을 크게 만들어 놓아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1920년엔 전세계 자동차의 반을 생산해낼 정도로 부유하였었고, 또한 라디오가 등장하여 미국 전 가구의 40% 이상이 라디오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소비가 크게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물품은 많이 만들어 놓았는데 구매력이 감소하여 물건을 사갈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세계 시장이 축소된 것입니다. 주가는 심각하게 폭락했고, 공장이 문을 닫으니까 실업자가 증가했습니다. 1932년 공업생산고는 공황발생 이전보다 44 % 하락하여 1908∼1909년의 수준으로 후퇴였습니다. 농산물 가격은 폭락하였고, 31년 오스트리아의 은행 도산을 계기로 유럽에 금융공황이 발생하였습니다. 

경제 공황 4년 만에 1933년에는 드디어 미국과 유럽의 국민 소득이 경제 공황이 발생하기 전보다 50%나 감소하였습니다. 2차 대전으로 회복되기 전까지 세계 경제는 10년 동안 불행한 암흑의 시기였습니다. 이때 루스벨트가 미국의 32대 대통령이 되어 취임 선서를 하였습니다. 미국 전역에 두려움이 짙은 안개처럼 내려 앉아 있을 때입니다. 은행들이 줄도산하고 산업 생산량이 반 토막 났으며 농산물 가격이 무너졌으며, 4명 중 한 명이 실업자였고 200만 명이 노숙자가 생겼습니다. 

그 때 하반신이 마비된 사람이었고, 한 달 전에 간신히 암살을 면한 사람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백성들을 향하여 "친애하는 미국 국민 여러분. 지금이야말로 용기를 내어 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해야 할 때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을 직시한다고 해서 주눅이 들 필요는 없습니다. 위대한 미국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이 위기를 견뎌내고 다시 일어나 번영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무엇보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뿐이라고 확실히 믿습니다. 우리의 의지를 마비시키는, 이름도 이유도 근거도 없는 두려움만 극복하면 후퇴를 전진으로 뒤바꿀 수 있습니다."라고 연설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이런 연설이 필요한 때입니다. 집값 하락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경제 위기로 부채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직장과 사업의 불투명으로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자영업 720만명 중에서 414만명은 월 100만원 못 번다고 합니다. 창업한 뒤 3년을 버틴 자영업자는 46.4%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요즈음 두려움이 일종의 문화가 된 듯합니다. 경제 위기, 성폭력, 폭력, 테러, 인터넷 스토커, 전화사기, 유행병, 살 먹는 박테리아, 암, 기후 변화, 환경 호르몬, 유전자변형작물 등 예측하지 못할 위협으로 두려움이 어느 때보다 커진 '위험 사회(Risk Society)'에서 살고 있습니다. 

두려움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긍정적인 두려움과 부정적인 두려움입니다. 긍정적인 두려움은 위협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해 줍니다. 얇은 얼음 위를 걷기 두려워하는 것, 병과 사고를 두려워하여 의료보험을 드는 것은 믿음의 결핍이 아니라 미리 주의하게 하는 지혜를 줍니다. 위험한 동물을 만났을 때, 시험 볼 때, 연설하려 할 때 겪게 되는 정상적인 두려움은 사람을 좀 더 각성하거나 예민해지게 하여 직면한 문제를 효율적으로 잘 해결해 나가도록 합니다. 합리적이며 유익하고 자신을 보호하는 건전한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신 은총입니다. 

자동차 사고를 두려워 할 줄 알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운전하고, 비만과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음식을 적당히 먹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게 됩니다. 문제는 부정적인 두려움입니다. 자유와 평안, 희망을 빼앗아 가고 재능을 잠재우는 두려움입니다. 부정적인 우리의 잠재력을 마비시켜 버립니다. 

두려움이란 괴물은 하나님이 주신 무한한 잠재력을 쓸 기회를 잃게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를 파괴해 버립니다.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무시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비난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피해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갖지 못합니다. 우리의 행복을 방해합니다. 두려움은 대인 공포증, 광장공포증, 고소공포증, 질환공포증, 죽음공포증 등과 같은 심각한 만성 공포증 환자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의 성공을 방해합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어떤 일을 시작도 하지 못하게 합니다. “나는 안될 것이다.”라고 자아 충족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이유 없는 부정적인 두려움은 성 프린시스 드살이 말한 대로 “두려움을 두려워하는”식으로 두려움은 또 다른 두려움을 낳아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여유조차 없이 혼란을 일으키게 합니다. 두려움은 거짓말을 하게하고, 하나님을 불신하고 패배의식에 빠지게 하며(민13:30~33), 불안하게 하고(신28:67), 절망하게 합니다.(수5:1) 

또한 사람의 올무에 걸리게 하며(잠29:25), 떨리게 하며(단5:5), 주를 부인하게 하고(마26:67~74), 몸을 마비시키고(마28:4) 진실을 증거하지 못하게 합니다(요9:21~22). 도피를 부추기며(창3:8~10; 왕상19:2~4;마26:47,55,56), 능력을 상실하게 하고(삼상17:32), 용기와 희망과 자신감을 잃어버리게 합니다.(민13~14장) 두려움의 95%는 상상적 두려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개발하여 인생에서 성공하고, 평안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려면 이 부정적인 두려움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부정적인 두려움에서 탈출할 수 있겠습니까? 심리학적 설명이나 철학적 교훈보다는 인간을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려 보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이 승리케 해 주신다는 의식이 우리를 지배하게 하여 두려움으로부터 탈출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지금보다 훨씬 더 두려워 할 만한 삶의 정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앞으로 2개월이 있으면 전쟁을 해야 할 백성들입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설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 가데스바네아에서 12명의 정탐꾼을 보내었는데 그들은 그 땅을 정탐하고 그들을 두려워하여 우리는 메뚜기에 불구하다고 말하며 모세를 원망하다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지 않고 가나안 땅 사람들만 보고 두려워하다 결국 그들의 말처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가나안 땅을 앞에 놓고 조상들처럼 두려워하며 절망할 수 있었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가나안 정복 전쟁은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무모한 전쟁입니다. 훌륭한 군사도 조직도, 무기도 없습니다. 강력한 숫적 우위도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고대 전쟁은 공격하는 군대가 적어도 3배는 되어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전력은 그렇지 못했습니다(민13:31) 특히 고대 전쟁에서는 유능한 장수가 필요한데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어야 했습니다(3:25-27) 그 땅의 지형을 숙지한 것도 아니고 고도의 전략무기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40년 유랑생활을 하면서 지칠 대로 지쳐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당연히 예측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예측이 됩니까? 

1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 민족들이 나보다 많으니 내가 어찌 그를 쫓아낼 수 있으리요”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런 상황에 놓여 있지 않습니까? “앞으로 경기가 2-3년 길게는 6-7년 어려워진다고 하는데 우리 집 부채 문제 어떻게 해결할 수 있으리요?” “사업을 열어 놓았는데 앞으로 내 사업 어떻게 버티리요?” “직장 은퇴를 해야 하는데 앞으로 어떻게 자녀들 가르치리요?”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몇차례 고배를 마셨는데 앞으로 어떻게 하리요?” 

미래를 예측하면서 두려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백성들을 향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두려워할 상황에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문제가 해결되겠습니까? 두려움이란 의식의 활동입니다. 내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이 우리의 의식의 지배하게 하느냐에 따라 두려움이 생길 수도 있고 기대와 희망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조작된 기억을 줌으로 우리의 두려움의 공포에 사로잡혀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위험인식을 왜곡하여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대형 사고 뉴스를 들으면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미국에서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 비행기 타기를 두려워하여 자동차를 선택했답니다. 그런데 그 바람에 1500명 이상이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었답니다. 사스로 죽은 사람이 언론에 보도되자 사람들은 사스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해 전 세계에서 사스로 죽은 사람이 140명이었고 계단에서 굴러 죽는 사람은 150명이었다고 합니다. 어떤 것을 부각하고 기억하느냐가 두려움의 중요한 요인입니다. 기억은 계속해서 쇠퇴, 소멸, 변화합니다. 가장 강력한 기억도 변화합니다. 자꾸 부정적인 요인만 기억하고 두려워 전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제를 회피하고 대인 공포를 갖게 됩니다.

두려운 문제를 앞에 놓고 있을 때 하나님은 무엇을 기억하며 의식을 지배하게 하라고 말씀합니까? 18절을 크게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와 온 애굽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두려움은 기억에서 나옵니다. 무슨 기억이 의식을 지배하느냐에 따라 두려움이 생길 수도 있고 용기가 생길 수 있습니다. 애굽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당시 세계 최고의 패권국가입니다. 가장 강대한 나라입니다. 가나안은 그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강대한 나라 애굽도 하나님께서 무릎꿇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내실 때 네가 본 큰 시험과 이적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을 무릎꿇게 한 것처럼 가나안 사람들도 무릎 끓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내가 어찌 그들을 쫓아낼 수 있으리요 이런 식으로 생각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승리케 해 주신다는 의식이 우리를 지배하게 하여 두려움으로부터 탈출해야 합니다.


2. 미래에도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신다는 확신으로 두려움으로부터 탈출해야 합니다.

사람이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예견된 부정적 미래상 때문입니다. 위험인식을 왜곡하게 합니다. 1970년대 말 폴 슬로빅과 사라 리히텐슈타인은 미국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많은 경우 인식과 현실 사이에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조사에 응답한 사람들 대부분이 사고로 죽을 확률과 질병으로 죽을 확률이 거의 같다고 답했는데, 실제로는 질병으로 죽을 확률이 약 17배 더 높다고 합니다. 

응답자들은 자동차 사고로 죽을 확률이 당뇨병으로 죽을 확률보다 350배 높을 것이라고 추측했는데, 실제로는 350배가 아니라 겨우 1.5배라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을까요? 자동차 잔해가 활활 타오르는 광경은 날마다 뉴스를 통해 많은 사람에게 전달되지만, 당뇨병으로 사망한 사람의 이야기는 가족과 친구들에게만 전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슴은 어떤 일의 발생 사례가 쉽게 떠오를수록 그 일의 발생 확률이 높다고 판단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기억은 편향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힘으로 확률과 통계를 착각하게 만듭니다. 

최근에 일어난 사건, 감정과 깊이 관련된 사건, 생생한 사건, 새로운 사건을 다른 사건들보다 더 잘 기억하는 것입니다. 미래는 아직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부정적으로 예측하고 두려워 포기하는 것입니다. 잘못될 것, 실패할 것만 부각하는 것입니다. 나의 능력을 볼 때 도저히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는데 내가 접근하면 거절할 것으로 부정적으로 예측하고 두려워 말도 꺼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업에 성공하고 싶은데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업도 시작해보지 못하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삶 속에서 배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는데 자신을 사랑하고 비전을 주고 이끄시는 하나님은 배제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불확실한 미래적 상황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이게 하여 인간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그 상황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하나님을 보아야 하는데 상황만 보이게 하여 두려움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까? 21절을 큰 소리로 같이 읽겠습니다.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곧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 너희 중에 계심이니라” 출애굽할 때도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가나안 정복을 할 때도 함께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공동묘지를 걸어가도 부모님과 함께 하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국의 한 장군이 가족과 함께 항해를 하다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승객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장군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가족들을 안심시켰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폭풍은 가라앉았습니다. 안정을 되찾은 부인이 남편에게 말했답니다. “가족이 다 죽을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그렇게 태연할 수 있죠?” 

그러자 장군은 칼을 빼어 부인의 목을 겨누고 말했습니다. “이 칼로 당신을 찌를 수도 있소. 두렵지 않소?” 부인이 대답했습니다. “칼이 사랑하는 남편의 손에 있는데 어찌 두려워하겠어요?” 장군은 말했습니다. “나도 그렇소. 우리는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데 풍랑이 어찌 두렵겠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고난의 풍랑, 시련의 풍랑, 패배의 풍랑, 질병의 풍랑, 부채의 풍랑이 몰아와도 그 풍랑까지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함께 해 주시는 하나님이 무엇을 합니까? 20절을 읽어 보십시오. 그들의 남은 자와 너를 피하여 숨을 자를 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입니다. 자존하시는 하나님이시다는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십니다. 가나안 사람들을 두렵게 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항하여 싸울 힘이 없게 하겠다는 것입니다.(출23:28 수24:12)

20절을 보십시오. 왕벌처럼 그들을 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세는 가지 않지만 왕벌을 보내어서 남은 자와 숨은 자를 다 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 왕벌은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하나님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적들만 보고 두려움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그들이 무엇입니까? 미래에 다가올 경제적 어려움입니까? 진학의 문입니까? 질병의 위기입니까? 부채입니까?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까? 통과해야 할 시험입니까? 

지금 힘이 없다고 지금 자금이 없다고, 지금 실력이 없다고, 지금 능력이 없다고, 중과부적이라고 두려워하며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지를 앞에 놓고 두려워하는 자는 결코 고지를 점령할 수 없습니다. 미래의 보장과 승리, 행복은 나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조카 롯이 모든 재물을 빼앗기고 사해 동맹군에게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아브라함은 가신 318명 연합군과 싸우는 것입니다.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두려움의 포로가 되었다면 아브라함은 그 전쟁에 참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담대하게 나아가 그를 무찌르고 조카 롯을 구했습니다. 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기드온은 300명의 순사로 미디안을 무찔렀습니다. 능력이나 전략 무기가 문제가 아닙니다. 여호수아는 그저 여리고를 도는 것으로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을 무너뜨렸습니다. 삼손은 나귀 턱뼈로 블레셋 1천명을 무찔렀습니다. 엘리야는 단신으로 바알선지자 450명을 무찔렀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사울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백성이 거인 골리앗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이 때 다윗은 어떻게 합니까? 두려워 떨고 있지 않았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17:45)”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골리앗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삼하 5:10)”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다가올 미래에 주신 복을 두려움으로 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대를 가지고 정복하여 축복의 땅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불확실한 미래이지만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 앞에 가나안은 펼쳐질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에도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신다는 확신으로 두려움으로부터 탈출해야 합니다.


3. 고난은 과정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두려움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사람이 왜 두려워합니까? 자신의 삶, 건강, 이익에 위협이 다가올 때 두려워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삽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에게도 폭풍은 다가오고 질병의 위기가 다가옵니다. 믿는 사람에게도 폭우는 쏟아지고, 강한 풍랑은 밀려옵니다. 믿는 사람에게도 사고는 다가오고 실패와 죽음은 다가옵니다. 믿는 사람에게도 외면과 거절이 다가옵니다. 아이들이 아프고, 사업에 실패하고, 시험에 낙방합니다. 믿는 사람에게도 고난의 과정이 다가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는 신이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성에서 실패합니다. 아간과 그의 가족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고난의 과정이 다가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늘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조금씩 네 앞에서 쫓아내신다는 것입니다. 한 번에 다 쫓아내지 않고 조금씩 쫓아낸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급히 멸하면 사람이 살지 않고 들짐승만 번성하여 결국 그 들짐승이 너희를 해하니까 오히려 너희를 위해 조금씩 멸하겠다는 것입니다. 조급증에 걸려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는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 

23절을 보십시오. 그들을 네게 넘겨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진멸하시고 진멸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승리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복 과정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부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상 숭배하지 말고 하나님만 섬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과정을 두려워하며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를 낳은 어머니는 고난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 과정을 두려워하면 아이 낳지 못합니다. 고난의 과정을 두려워하여 포기하면 성공도 성장도 없습니다. 

곤충학자 찰스 코우만은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 고치구멍을 뚫고 나오는 광경을 오랫동안 관찰했답니다. 나비는 작은 고치구멍을 뚫고 나오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답니다. 그는 긴 시간 애를 쓰고 있는 나비가 안쓰러워 가위를 가져와 고치구멍을 조금 뚫어 주었답니다. 그런데 이제 나비가 화려한 날개를 펼치면서 창공을 날아다니겠지 하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나비는 날개를 질질 끌며 바닥을 왔다갔다 하다가 죽어버렸답니다. 나비는 땅을 박차고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말한 힘을 갖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나비는 작은 고치구멍을 빠져나오려 애쓰는 가운데 날개의 힘을 키우게 되어 있는데, 자신의 값싼 동정이 그 기회를 없애버렸다는 것입니다. 나비가 비상하려면 고치에서 고통스럽게 빠져나오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역경도 경험하지 않고 승승장구하는 사람을 만들기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대부분 하나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설령 섬긴다해도 형식적이고 하나님을 통해 또다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섬기는 척 할 뿐입니다. 역경을 극복해낸 경험을 갖지 못하고 성공은 위태롭습니다. 조그만한 어려움에도 추락합니다. 

고난의 과정을 겪지 않은 신앙의 영웅이 어디 있겠습니까? 골이 깊으면 산도 높은 것입니다. 골이 깊으면 메아리도 커지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이민의 고난을 겪었습니다. 기근의 고난을 겪었습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야 할 만큼 인간관계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불임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25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자식들의 다툼을 보고 살았습니다. 자식을 떠내 보내야 할 위기를 겪었습니다. 사랑하는 이삭을 자신이 죽여야 하는 위기도 겪었습니다. 다 두려워할 만한 일입니다. 두려움으로 좌절하고 포기해야만 하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으로 두려움으로 과정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합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

모세를 보십시오. 태어나자 마자 죽음의 위기를 겪습니다. 궁중 교육을 받을 때는 좋았는데 살인자가 되어 죽음의 위기에 직면합니다. 민족을 이끌 때도 얼마나 많은 두려움의 과정들이 있었습니까? 한 순간도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힘든 과정을 겪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와 그의 백성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넘겼나니 너는 헤스본에 거주하던 아모리인의 왕 시혼에게 행한 것 같이 그에게도 행할지니라(민21:34)”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움의 포로가 되어 좌절하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며 지금 마지막 유언적 설교를 하면서 두려워하지 말고 가나안 정복을 하라고 백성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를 대신하여 민족을 이끌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수 1:9)”

인생은 순간 순간의 과정입니다. 지금 겪는 어려움이 무엇입니까? 지금 내게 다가온 고난이 무엇입니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의 어려움은 바로 나의 '날개'를 강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때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용광로에서 훈련을 받고 두려움 없는 담대한 사람이 되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베드로와 제자들처럼 두려움으로 무너지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과 사울왕처럼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 앞에서 두려움으로 뒤걸음 치지 말아야 합니다. 아담처럼 죄를 짓고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갈멜산에서 450인의 바알선지자와 400인의 아세라 선지자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도 이세벨이 보낸 메시지를 듣고 두려워하여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망각하고 두려움으로 도피하지 말아야 합니다.(왕상19:2~4) 가데스 바냐에서 두려움으로 원망하고 밤새 울부짓다가 가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백성처럼 두려움으로 주신 축복을 잃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위협의 특정 대상이 있는 두려움, 위협의 대상이 불확실하고 삶의 전반에 퍼져있는 불안, 분명한 위협이 대상이 있어 확실한 도주 행동을 취하에 하는 공포가 혼용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인간의 잠재력과 성취를 마비시키며 사명을 회피하고 도피하게 하는 파괴적인 두려움으로부터 우리가 어떻게 탈출 하여 평안과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을 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승리케 해 주신다는 의식이 우리를 지배하게 하여 두려움으로부터 탈출해야 합니다.
우리는 미래에도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신다는 확신으로 두려움으로부터 탈출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은 과정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두려움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김필곤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