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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전 10:1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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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전 10:14-11:1)


옛 이방종교들 속에는 신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음식물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신과의 교제를 가지며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사고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유대교에서도 그랬습니다. 하나님께 죄를 지은 사람은 하나님께 속죄의 제물을 바치고 그 제물의 일부를 먹음으로써 깨어진 하나님과의 일치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에도 그런 신학이 있습니다. 성찬론입니다. 성찬에서 우리는 떡을 나누어 먹고 포도주를 나누어 마십니다. 

떡과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단번에 영원한 속죄제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제사를 드릴 때마다 짐승이 제물로 바쳐진다면 그 고기를 나누어 먹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로 제물을 삼으셨으며 그것은 단 한 번으로 그치기 때문에 그 아들을 우리가 먹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그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대신 먹고 마시며 그와 그의 대속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고 축사하신 후 떼어주시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셨다고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고전11:23-24). 그러므로 그 떡은 상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 떡을 받아먹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나누며 그와 연합하는 신비스러운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6:53) 하시며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한다.” 하셨습니다(요6:56-57). 

이러한 믿음 때문에 그리스도인이건 이방인이건 제사가 이루어지는 장소에서 제물로 바쳐졌던 음식물을 먹으면서 그 종교적 신앙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처음에는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고, 따라서 그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의 고기를 먹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원론적인 말을 했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의 고기를 나누어 먹는 자리에 참석하면서 그 종교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고, 그래서 그 우상을 섬기는 신전이라고 해도 그 어떤 신도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마음속에 신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심어주고 우상숭배에로 기울게 만드는 마귀의 역사는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을 나누어 먹는 그런 자리를 통해서 강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이 모를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는 그런 자리를 피할 것이며 할 수 있으면 그런 음식물도 먹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는 단호한 입장을 표명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 입장 표명이 오늘 본문의 첫 부분인 14-22절의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결론을 제시합니다: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본문 14절) 이 말은 직접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것이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우상숭배에로 기울어질 위험성이 있는 자리에는 아예 가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왜 그러는지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다 잘 알아들을 줄 알고 말하는 것이라고 쓴 글이 본문 15절입니다: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지혜로운 사람들이니까 자기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판단하리라 믿는다 하면서도 사도 바울은 왜 자기가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하는지 그 논거를 제시합니다. 본문 16-17절입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성만찬을 행하며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것은 그것들이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성찬식에 참여하여 한 떡을 같이 나누어 먹는 사람들은 다 한 몸을 이루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성찬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은 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사람들이 또 다른 어떤 몸에 속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는 사람들은 다른 어떤 제물을 나누어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제물을 먹으면 그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되고 그것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이 뒤따르는 본문 18절의 말입니다: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 제물을 먹으면 그 제단에 참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제단에 참여한다는 말은 곧 그 제물이 바쳐진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되고 만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앞서 자기가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고 그래서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이라 하더라도 먹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 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쓴 글이 본문 19절입니다: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즉 사도 바울은 자기가 말한 대로 우상도 아무 것도 아니고 그런 신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그래서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 그 자체는 전혀 겁낼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우상에게 제사하고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을 먹을 때 그런 사람들을 마귀가 자기의 사람 만들려고 운동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물을 먹음으로써 우상이나 거짓 신과 교제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마귀와 교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간 사람이 동시에 마귀와 교제를 갖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의 식탁에서 식사하는 사람이 마귀의 식탁에서도 식사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하는 것이 본문 20-21절입니다: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그렇게 하는 것은 주님을 노엽게 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22절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이렇게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음식물을 먹는 일을 할 수 있다는 말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둘 다 하고난 사도 바울은 이제 그 문제를 정리하려고 합니다. 본문 23-24절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음식물을 먹는 것이 가하다 해도 다른 사람에게 유익하지 않고 교회에 덕을 세우지도 않는다면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자유를 누리는 일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다른 이의 유익을 구하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우리의 자유가 다른 이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권리는 우리에게 언제나 있음을 확인시켜줍니다. 먹는 문제 가지고 위축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본문 25-26절의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한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고 다른 신이란 없으므로 우상에게 바쳐졌던 것이라고 다른 신의 것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 음식물이 부정해지는 것도 아니니 안심하고 먹으라는 것입니다. 

비록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대접하는 음식이라 해도 아무 걱정 말고 그냥 먹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27절입니다: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그게 우리가 얻은 자유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 때문에 혹시라도 양심에 걸림이 있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양심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하여 먹는 자유를 스스로 행사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본문 28절입니다: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아직도 신앙적으로 연약한 양심을 가진 이들을 배려해서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음식물을 먹을 자유를 스스로 유보하지만 그 자유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난 받을 일은 아님을 다시 분명히 합니다. 그것이 본문 29-30절의 말입니다: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어떤 식사 자리에서 무슨 음식물이 나왔건 하나님께 감사하고 먹으면 되는 것이고 그것은 비방 받을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할 말은 다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먹어도 되고, 그러나 안 먹는 것이 좋은 일에 있어서 우리의 결단과 행동을 좌우할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 앞에서 다시 한 번 결론을 내립니다. 본문 31절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무엇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고 무엇을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일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를 가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겠습니까? 본문 32-33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기독교인이든 그 누구에도 걸려넘어지게 하는 자가 되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위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든 한 사람이라도 더 주의 복음에로 얻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로는 그런 삶을 살아온 것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다른 고린도 교회 신자들도 그렇게 살기를 바란다는 말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마칩니다. 11장 1절을 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이것은 사도 바울이 일반적인 관점에서 스스로를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가장 이상적이고 모범적인 인간형이라고 자부해서 한 말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의 이 말은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교회의 덕을 세우고 보다 많은 사람을 복음에로 얻기 위해서는 자기의 자유마저도 스스로 포기하는 일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도 자기 같기를 바란다는 뜻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라는 말을 함께 함으로써 자기를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뜻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시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자기를 버리셨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의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셨고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로지 그를 본받는 삶을 산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도 자기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예수 그리스도는 더 이상 몸으로 계시지 않으시고 복음서도 아직 기록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를 본받고자 해도 그렇게 할 길이 없기에 주님을 만났고 그로부터 직접 깨달아 알게 된 자기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는 좋은 안내자가 될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자유함을 누릴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유보하거나 영원히 포기할 수 있는 자유가 있을 때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우리의 자유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최고의 가치의 자리에 두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교회의 덕을 위해서라면, 복음에로 많은 사람을 이끌어올 수 있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내려놓을 수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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