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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 (행 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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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 (행 4:1-13)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예수님이 원하시는 참교회의 모델은 사도행전에서 발견됩니다.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바로 그 교회! 그 교회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훈련받은 사도들이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이룩한 교회입니다. 비록 실수와 허점이 없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교회였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모습이 뚜렷한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지난 세 번에 걸쳐 살펴본 바와 같이, 사도행전 처음 3장까지에서 보여 준 교회의 특징은 1)성령 충만한 공동체(2장), 2)예수님의 삶을 사는 공동체(2장), 3)표적과 기사가 계속되는 공동체(3장)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우고자 하시는 참교회는 구성원 모두가 성령의 부으심을 받고, 성령님이 이끄시는대로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전인적 소그룹 공동체를 이루어, 예배 전도 봉사 양육 친교의 사역을 역동적으로 수행하는 교회입니다. 주님은 이런 교회의 지도자들을 통하여 표적과 기사가 끊임없이 일어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성장시켜 나가십니다.

이 시간에는 사도행전 4장 이후를 계속 읽어 내려가며 위협과 고난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초대교회가 무서운 핍박 속에서도 복음 전파를 쉬지 않은 모습을 찾아보고,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복음 전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교회를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로 만들 수 있을까를 함께 고민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초대교회의 ‘고난속 전도’의 모습

사도행전적 교회의 네 번째 특징은 고난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였다는 사실입니다. 당시의 당국자들은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1-4절=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본문에 앞서 3장에서는 선천성 지체장애인을 일으킨 이적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이적에 놀라 몰려든 백성들에게 행한 베드로의 설교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설교의 현장 하에서 이어지는 4장은 사도들의 왕성한 활동에 제동을 거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핍박을 소개함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본장은 전반부에서는 급속한 복음의 확산과 이에 당황한 사탄과 사탄의 하수인이었던 종교지도자들의 반발을 다루고 있으나, 후반부에서는 말씀이 더욱 급속하게 전파되는 과정과 초대교회 성도들의 아름다운 신앙생활의 내용을 다룹니다.  

4장에는 우리가 닮아가고 싶은 교회의 모습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위협적인 심문 앞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베드로의 지혜롭고 담대한 모습, 더욱 뜨거워진 성도들의 기도의 열기, 그리고 성도들의 성령충만과 유무상통하는 은혜로운 모습은 사탄의 세력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의 역사 속에서 더욱 굳건히 성장하는 초대교회의 역동적인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여기 “싫어하여”(디아포메노이)는 문장의 맨 앞에 나와 강조되고 있는데, ‘심히 화가나서 어떻게 할 줄을 몰라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사용하여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기도 하고, 위협하여 그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욱박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이성적이지 못하고 감정적이면서 집단 이기주의적인 차원에서 사도들을 다루었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한 대가로 칭찬과 보상을 받기는커녕, 감옥에 갇히는 수모를 당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고, 또한 그들이 믿는 신앙과 하나님에 대해 회의(懷疑)를 품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담대하였습니다(19, 20절). 이는 성령에 충만함을 받은 결과였고, 복음전파가 목숨의 보전보다 더 중요하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박해 속에서도 꿋꿋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당국자들은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사도들에게 위압적인 자세로 힐문했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4:7). 그러나 성령충만한 사도들은 담대히 외쳤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4:10).  

12절=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확신에 찬 사도 베드로의 선언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강조하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비단 산헤드린 공회에 서서 재판을 받는 베드로 개인의 신앙 고백일 뿐 아니라 초대교회 전체의 신앙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고 강조하는 핵심입니다(행 4:30, 5:41, 8:12, 9:17, 16:18).

초대교회의 주의 종들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는 일에 추호의 망설임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 사도들의 모습을 통해 초대교회의 역동적인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또한 예수님을 전하다가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기 일수였습니다. 세상의 권세자들은 성도들을 칼로 찌르거나 성전의 높은 꼭대기에서 떨어뜨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복음 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고난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더 큰 고통이 뒤따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교회의 성도들은 복음을 전한 대가로 칭찬과 명예와 물질적 보상을 받기는커녕, 감옥에 갇히며 매맞으며 목숨을 내놓는 수모를 당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고 오히려 담대하였습니다. 이는 성령에 충만한 결과였고, 복음 전파가 목숨의 보전보다 더 중요하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2.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은 명확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나님은 죄인들을 구원해내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을 입혀 이땅에 보내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죄인이 구원받게 될 때 하늘에 기쁨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 15:10).

15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 가지 비유, 즉 잃은 양의 비유(4-7절),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8-10절), 그리고 잃은 아들의 비유(11-32절)는 하나의 주제로 통일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잃었다가 다시 찾았을 때의 기쁨”입니다. 

성도 여러분!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이 왜 이렇게 큰 기쁨이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람의 영혼이 이처럼 중요하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막 8:36-37=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겔 18:2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풍조는 다릅니다. 세상은 영혼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오직 물질이나 명예를 잡으려고 광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온 세상을 다 가진다 해도 영혼의 상실을 보상할 길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썩어질 육체를 위해 투자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육체 가꾸기, 옷 입히기, 영양식으로 먹이기, 심지어 얼굴 뜯어 고치기... 그러면서도 영혼을 위한 관심은 얼마나 됩니까! 우리 모두 영혼을 건지는 것의 중요성에 눈을 떠야 합니다. 한 영혼을 건지면 하늘의 식구가 한명 늘어납니다. 하늘의 기쁨이 그만큼 배가됩니다.

바까스 박사라는 분이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습니다. 의사가 침통하게 말합니다. “박사님, 당신의 생명은 이제 30분 정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불편한 몸을 의자에서 일으키더니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님, 이 남은 30분을 아직도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데 바치겠습니다.” 우리는 바까스 박사를 칭찬하기 전에 그가 받은 은혜를 주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죽이나 은혜가 벅차면 그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하늘의 기쁨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천상회의 자리에서 기쁨의 부라보가 울려퍼지는 광경을!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보물입니다. 영혼의 귀중성! 우리 모두 가슴에 새겨야 할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혼 구원, 그리고 그 결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 -- 이것은 우리 예수님의 가장 큰 소원이요,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주님은 언제나, 어느 상황에서나 영혼 구원에 최선을 다하십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38).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을 비교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은 육신의 양식 외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영혼의 추수를 강조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성령의 부으심을 경험한 후에 열정적인 영혼의 추수꾼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흑암의 세력에 맞서 싸우며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모든 성도는 추수에 대하여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우리의 죄값을 모두 치루어 주심으로 추수를 위한 모든 일을 완성하셨습니다.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이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없이 제시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추수꾼으로서의 사명을 훌륭하게 감당한 사람입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고전 4:11-13=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를 위하여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하여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면 고난이 옵니다. 사탄의 세력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가장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특징은 많은 핍박과 고난을 받았다는 데 있습니다. 교회는 영원히 편안한 곳이 아닙니다. 진정한 주님의 교회는 고난 속에, 불 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위기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처럼 고난당하는 교회가 사도행전적 교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고난받는 성도에게 위기를 이길 수 있는 영적 능력을 주십니다. 교회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굴복하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영적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진정한 모습은 복음 전파 때문에 고난받는 모습입니다. 고난받는 교회로 인해 세상이 변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를 통해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단순히 좋은 위치나 성공하고 멋지게 사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천국 백성을 부르시는 일에 있어서 어떤 큰 이적만을 통하시지 않고, 천사를 시키지도 않으시고, 땅에 있는 교회의 일꾼들인 목사·장로 집사·교사·신자 등을 통해서 이 일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입이요 손발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 52: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행전 교회는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리와 타이틀에 연연하지 않고 계속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 서현교회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전도를 쉬지 않는 공동체여야 하겠습니다. 대구시의 여러 아파트단지, 주변에 둘러싸인 주택단지, 그리고 수많은 학교, 거리에 넘친 사람들, 주님을 모르는 그들이 우리가 붙들고 울어야 할 우리의 교구입니다! 


3. 고난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교회 되려면?

마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께서 네 사람이 메고 온 중풍병자를 고치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앞으로 병자를 데려오기 위해 군중들을 피해 지붕을 뚫고 병자의 침상을 내렸고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 기적의 현장에 보이는 세 가지를 통해 우리 시대 복음을 전하는 교회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침상을 멘 네 사람입니다. 이들은 병든 영혼을 지극히 사랑하는 헌신된 일꾼들입니다. 현대 교회는 구경꾼은 많은데 영혼 추수에 헌신하는 추수꾼이 너무 적은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말꾼이 아니라 일꾼이고, 훈수꾼이 아니라 사역자이며, 지도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입니다. 

먼저 믿은 우리가 길 잃은 영혼들에게로 가지 않으면 그들은 결국 죄 가운데서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많은 교회들은 이 일을 소수의 사람들에게 맡겨놓고 대부분의 교인들은 손을 놓고 있습니다. 
 
가슴 아픈 것은 오늘날 교회에 위대한 추수의 날을 기대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입니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안일한 자세로 예수님 재림의 날까지 현상유지에 만족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 영혼 추수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두 번째는 커다랗게 구멍난 지붕입니다. 병자를 예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지붕을 뜯어 침상을 그 구멍으로 달아내리는 모습을 통해 그들의 영혼 사랑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네 사람은 침상의 네 모퉁이를 굳게 붙잡은 것처럼 병든 영혼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마음을 굳게 붙잡았습니다. 뜯어진 지붕은 그들의 굳은 결심을 나타내는 결과물이었고, 이것은 우리 모두 복음 전도의 걸림돌을 극복해야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동안 복음 전도에 임하는 여러분의 자세는 어떠했습니까? 여러분은 전도할 때 어떤 어려움을 경험해보았습니까?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어떻게 경험해보셨습니까? 여러분은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지붕을 뜯어낼’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세 번째는 중풍병에서 고침 받은 사람이 들고 가는 빈 침상(Empty Stretcher)입니다. 병자는 주님의 말씀에 의해 즉시 고침을 받았고, 즉시 침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나갔습니다. 무리가 크게 놀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므로 병 고침 받은 사람이 들고 가던 빈 침상은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전도하는 교회에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능력입니다. 주님은 이 능력을 성령을 통하여 교회에 주셨습니다. 

막 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 역사를 통해 위대한 일군들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그들은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한결같이 추수군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빙점?의 저자 미우라 아야코는 병상에서 수년을 고생하면서 산 사람입니다.그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비록 몸은 병들어 있지만 병든 몸을 가지고 복음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 하다가 나중에는 종이를 짤라 가지고 병상 옆에 놓고 매일 기도하면서 성경 구절 중 은혜 받은 것이 있으면 적어가지고 창문 밖으로 던지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지나가던 사람이 혹시 그 종이 조각을 주워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구령의 열정을 지닌 자들은 이렇게 모두가 다 정신나간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생명을 건지는 일 만큼, 영혼을 구원하는 일 만큼, 모든 족속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만드는 일만큼 귀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매튜 헨리 목사님은 “나는 은, 금을 산더미만큼 내게 준다 할지라도 한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행복과 바꿀 수 없다” 고 했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나는 가장 위대한 웅변가가 되기보다 차라리 한 영혼을 죽음으로부터 건져내는 도구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관심, 주님의 명령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결코 지체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국은 더 이상 타락할 수 없습니다. 이미 바닥까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미국도, 유럽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천만이 도덕적으로 병이 든 채 고칠 마음도 먹지 않습니다. 

죄악의 물결이 전례없는 파고(波高)로 넘실대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조롱하며 영혼을 멸망시키며 인간사의 대해를 휩쓸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오늘날처럼 마귀에게 자기 영혼을 염가(廉價)에 도매금으로 팔아넘긴 적이 예전에는 없었습니다.  

과연 우리 중에 오늘날의 엘리야, 오늘날의 엘리사는 없습니까? 계명성 사탄이 수억, 수십억의 영혼을 사슬로 결박하여 지옥의 병거에 매달아 끌고 다니며, 하나님의 교회를 향하여 온갖 조롱의 손짓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신통한 장면을 보듯 구경만 하고 있을 작정입니까?

이 세상은 해골 골짜기와 같습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수많은 뼈들처럼 이 땅에는 생명 없는 시체들이 우굴거립니다. 그들은 비록 걸어다니고 말하는 뼈들이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뼈들입니다(엡 2:1). 이 뼈들은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생명을 달라고 호소합니다.  

며칠간 물을 공급받지 못한 화분의 식물이 물을 기다리듯이, 그리고 산소가 부족한 수족관의 금붕어가 입을 크게 벌려 호흡하듯이, 죽은 뼈들은 생기를 들이마시기 위해 헐떡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영혼의 호소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살리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가 산 뼈가 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가 속죄의 피인 것을 믿음으로 시인하고 간구하십시오. 예수님을 주님으로 철저히 인정하고 그분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으십시오. 여러분 속의 더러운 것들, 하나님 없이 살려했던 것들을 내동댕이쳐야 합니다.

진실로 우리는 무릎으로 갈보리 언덕을 기어 오르며 겸비한 마음으로 십자가의 깊은 의미를 탐색해 보아야겠습니다.  

교회가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이 부서질 것입니다.  

목사와 중직자들이 먼저 눈이 붓도록 울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예배 자리에는 눈물 흘리며 자복하는 통회자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우리의 양심을 깨끗케 하여 주님을 섬길 수 있게 하실 때까지,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귀한 생명력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엘리사처럼 살리는 뼈가 되도록 간구합시다. 
도르가를 죽음에서 일으킨 베드로가 되기를 기원합시다. 
유두고를 다시 살아나게 한 바울이 되기를 기원합시다. 
사마리아 성의 빌립집사처럼 온 성에 큰 기쁨을 안겨주는 사람이 되기를 간구합시다.  

그리고 19세기 퇴폐기의 미국에 혜성같이 나타나서 나라 전체의 영적 기상도를 바꾸어 놓은 요나단 에드워드와 챨스 피니와 같은 불을 뿜는 선지자들이 한국교회에서 일어나도록 기도합시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지 못합니다. 죽은 뼈가 죽은 뼈를 살리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 살리는 뼈, 생명 있는 뼈들이 됩시다. 

여러분의 구역이 죽은 자를 살리는 구역이 되기를 소망하십시오. 
여러분의 전도회가 이런 구역들을 키워내는 산실이 되게 하십시오. 

우리 교회가 대구 경북의 수많은 죽은 뼈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교회가 되도록 ‘살리는 뼈’ 의 꿈을 가집시다. (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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