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더 아름다운 것, 더 좋은 것 (히 8:6)

첨부 1


더 아름다운 것, 더 좋은 것 (히 8:6)

범신론자들이나 자연신론자들은 사회적 전제가 없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라고 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종교적 지식은 지식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신령한 지식을 얻기 위해 사회적 전제 일색인 자신의 세상 지식을 배설물과 같이 여겼습니다. 

빌립보서 3장 8절에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고전 1:21).

이 세상의 학문은 초등학문이라고 했습니다(갈 4:3, 9; 골 2:8, 20). 항상 배우나 진리지식에 이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딤후 3:7). 

"선생, 나는 인생을 많이 살아온 사람이요. 그런데 내가 살면 살수록 아주 분명히 깨닫는 사실은 하나님이 인생을 주장하신다는 진리이라오."라고 벤자민 프랭클린은 말했습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금년보다 내년이, 자기 자신보다 나의 후손들이 더 좋게 되기를 바라는 것에 아니라고 할 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나름대로의 덕담들로 우리가 사는 공간을 풍성하게 채웁니다.

사람들은 지금보다는 미래에 더 좋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여망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강력한 지배력을 가지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믿지 않는 자와 믿는 성도들이 각각 상이한 가치관을 가지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사실입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일반은총에 대한 가치만을 절대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일반은총에 순응하며 하나님의 특별은총에 궁극적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누가복음 12장 4-5절에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고 했습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궁극적으로 더 좋은 것은 분명히 구속사적인 특별은총의 가치입니다. 하나님의 일반은총이 좋은 것이라면 하나님의 특별은총은 더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좋은 것입니다. 

창세기 1장 31절에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 』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속은 더 좋은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첫 아담보다 두 번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더 좋은 아담입니다. 

Ⅰ. 예수 그리스도는 더 아름다운 직분의 보증 입니다. 

본문 8장 6절에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라고 했습니다. 

1)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의 제사장직보다 더 아름다운 제사장 직분을 받으셨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직분을 행하시는 곳은 지상의 성소가 아니라 하늘나라입니다. 
여기 『더 아름다운 』이란 말은 다음에 나오는 『더 좋은 』 것과 비교가 됩니다. 더 아름답다는 말은 외적으로 나타나는 탁월함이고, 더 좋다는 말은 내적인 탁월함을 가리킵니다. 

예수께서 얻으신 직분이 아름다운 이유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본질적 사명인 속죄 사역이 레위 계통의 대제사장들보다 우월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얻었다 』는 말은 현재도 계속해서 그 직분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2) 그가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8장 6절에 『…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中保시라 』고 했습니다. 
이 말의 여자적 의미는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들과 맺은 언약보다 더 좋은 언약이 더 좋은 약속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언약은 신인神人 양편이 서로 맺은 계약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8장 10절에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고 했습니다. 
중보는 계약의 실행을 집행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중보자이십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온전한 순종을 통해 새로운 언약의 시대를 여셨습니다. 이 새로운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하셨습니다.

예레미야 31장 31-33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계약이라는 명분을 사용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인격을 가진 피조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은 인간 편에서 계약의 조건에 신종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이 하신 구원의 약속을 반드시 성취시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한 중보가 되셔서 인간의 구원에 필요한 일체의 모든 조건을 담당하십니다. 


Ⅱ. 예수 그리스도는 더 좋은 삶의 보증입니다. 

1)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본문 8장 6절에 『이는 더 좋은 약속의 중보시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구속하기 위한 한 언약을 체결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삼위 하나님의 대표로서, 그리고 성자 예수님은 모든 택자들의 대표로서 계약을 설정하신 것입니다(엡 1:4-14; 고전 15:22; 롬 5:12-21). 

구속 언약이 성부와 성자 간에 맺어진 언약이라면 성부와 선택 받은 죄인들과 맺은 언약이 은혜언약입니다. 이 두 언약은 서로 다른 언약이 아닙니다. 
양자를 굳이 구분한다면 구속언약은 영원전이고 은혜언약은 그 성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全 역사는 신구약 전체에 미치는 은혜로 충만합니다. 구약과 신약의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혜언약에 의해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구약의 택자들은 오실 메시야를 믿고 구원 받았고, 신약의 택자들은 오신 메시야를 믿고 구원받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더 좋은 약속과 더 좋은 언약 곧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십니다(히 7:22).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더 좋은 언약의 은혜성과 영원성과 특수성과 유일성과 무조건성과 불변적인 성격에 대하여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믿음으로 예배하는 삶입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아벨은 그의 소산인 양의 피와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도 그의 소산인 곡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아니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벨의 제사는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제사의 요소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인간의 신앙 인격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습니다.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창 4:4-5). 

아벨의 믿음이 그 제물을 열납되게 했던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제사 행위가 아니라 육신의 정욕을 버리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성도의 거룩한 예배생활입니다. 

3) 천국을 소망하는 삶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6절에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찾았던 고향은 지상에 있는 나온 바 고향이 아니었습니다. 그 고향을 갈 기회는 얼마든지 주어졌습니다. 그 보다 더 좋은 곳, 더 나은 본향은 하늘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영원한 처소가 바로 하늘나라에 예비한 한 성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십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영원한 처소를 예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에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2-23절에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고 했습니다.


Ⅲ. 장차 받을 영광은 더 아름다운 것, 더 좋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5절에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여자들은 엘리야가 그의 아들을 살려준 사르밧 과부(왕상 17:17-24)와 엘리사가 그의 아들을 살려준 수넴여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왕하 4:27-36). 

또 예수님께서 죽은 아들을 살려준 나인성 과부(눅 7:11-14), 나사로의 누이들인 마르다와 마리아(요 11:1), 도르가(행 9:36)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부활은 죽음에서 살아난 것이기 때문에 다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더 좋은 부활은 이러한 일시적으로 죽음에서 살아난 것이 아닌 종말론적인 영원한 부활을 가리킵니다. 

또한 첫째 부활(중생)보다 더 좋은 부활은 둘째 부활(영생부활)입니다. 더 좋은 부활은 상급이 있는 영광의 부활입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라고 했습니다. 

더 좋은 부활을 얻기 위하여 박해를 피하지 아니했습니다.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칼에 죽는 것까지도 불사했습니다. 
예레미야도 미가야도 그러했습니다. 진리의 종 스가랴는 성전 뜰에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대하 24:20-21). 나봇은 조상 전래의 유업을 지키다가 동족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왕상 21:13). 

이사야는 므낫세 왕의 우상숭배 강요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 벌로써 나무 톱으로 그 육체를 켜서 산산 조각이 나버리도록 했습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는 설교를 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우리야는 칼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저들은 양과 염소의 가죽옷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란을 당했습니다. 

종교개혁자 죤 후스는 타오르는 장작더미 위에서 찬송을 부르면서 불꽃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프라하의 제롬은 화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즐거운 표정을 지었고 불꽃 속에서도 그는 기도했습니다. 
프랑스의 위그노 성도들은 타오르는 화염 속에서 굽힐 줄 몰랐습니다. 우리의 앞서간 신앙의 조상들은 한결같이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장차 받을 영광을 소망하면서 현재의 고난을 오히려 즐거워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어제처럼 생생한 기억입니다. 우리교회가 여기서 조금 떨어진 목욕탕 건물 2층에 세 들어 있을 때입니다. 그때는 장로도 안수집사도 권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몇몇 사람들이 있어서 권징을 하려고 할 때입니다. 당회실에서 몇몇 성도들을 모아 놓고 중론을 모을 때 모두 함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박현숙 집사와 박일숙 집사는 교회가 유익하다고 하면 기꺼이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피로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더 아름다운 직분의 보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더 좋은 삶의 보증입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은총에 감사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그에게 나아가 예배해야 합니다. 
장차 나타날 천국을 바라보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장차 받을 영광을 생각하며 목숨을 다하여 교회를 사랑합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