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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먼저 잃어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눅 9: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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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잃어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눅 9:22-25)


우리 모두에게는 때때로 삶의 피난처가 필요합니다.  특별히 오늘날처럼 각종 폭력과 살인과 혼돈으로 세상을 공포로 몰아넣는 이때에는 우리의 이 조그마한 육신을 피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마다 사람들은 삶의 피난처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집이 우리 인생의 피난처입니다.  여기가 피난처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피곤한 자는 오늘 하나님의 집에서 쉼을 얻으십시오.  마음이 억눌린 자는 이곳 하나님의 집에서 자유함을 얻으십시오.  성령의 위로와 만지심으로 새 힘을 얻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살아가면서 뜻하지 않는 일로 육신이 병든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육신에 장애가 있는 것도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신체에 장애가 있는 것은 드러나기 때문에 남들의 눈에 띠여서 인정이라도 받는데, 마음에 상처와 장애가 있는 것은 눈에 띠지 않기 때문에 인정도 못 받아 한없이 고통을 받습니다.  육신의 질병과 장애에는 보조기구도 있고, 치료기구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에 관한 질병은 치료약도 없습니다.  마음의 상처에 관한 것은 아무런 처방이 없습니다.  그 영혼과 그 마음과 그 심령과 우리의 생명을 치료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병든 마음, 상처받은 마음, 아픈 마음들이 다 치유되고 녹아지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은 깨달음에서 시작되는 것이지만 깨달음을 붙들고만 있는 사람은 신비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믿는 기독교적 바른 신앙은 깨달음에 머물러 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지식에 머물러 있는 신앙도 아닙니다.  바른 신앙은 그 깨달음이 실제적인 삶의 현장에서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해방과 자유를 경험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깨달음이 귀한 것은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날 때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깨달음 속에 영원한 자유와 행복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 깨달음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날 때 진정한 자유와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듣고 깨달았다고 한다면 중요한 것은 먼저 첫발을 내디뎌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내 속에서 일어나는 깨달음이 구체적으로 행동화되어 나타나야만 합니다.  깨달음으로 정복하지 못한 마지막 문제는 행동에서 나옵니다.  첫발을 디뎌야 합니다. 시작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인간은 떡으로만 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은 떡으로만 살 수 있다고 고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인생에는 떡보다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떡보다 더 귀한 것을 찾아야 합니다.  만약에 인생이 떡으로만 산다고 한다면 불행입니다.  비극입니다.  종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기독교적 신앙이 가르치고 있는 역설의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역설의 원리를 붙잡고 이 땅에서 구체적으로 행동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기에 인생의 참된 자유와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구원에 있습니다.  구원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구원이 없이는 기독교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원받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구원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면 구원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땅의 어떤 다수의 사람들은 세상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불교에도 구원이 있고, 샤머니즘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꼭 반드시 예수만 믿을 필요는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 소리는 사람들에게 이해심이 많고 포용력이 넓은 것처럼 보여지는 광명한 천사로 가장된 사탄의 소리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시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구원이라는 것은 소극적이고, 아주 좁은 의미에서 말하자면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좀더 넓은 의미에서 구원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 가는 성화의 과정을 통해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고, 또 이 땅에 있는 동안에 주님으로부터 쓰임을 받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면 다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이라는 이름 그 자체가 "예수는 구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면 구원은 완성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잘 따라가면 되는데, 문제는 예수님을 따라감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장애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일까요, 아니면 우리의 가족 중에서 믿지 않는 식구가 나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라감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장애물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아니면 어둠의 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입니까?  이 모든 것이 부분적인 요인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는 일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장애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장애물은 다른 어느 누가 아니라, 다른 어떤 사건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고 느껴지는 경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24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우리는 계속해서 믿음의 역설에 대해서 함께 생각을 해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또 하나의 믿음의 역설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내 자신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내 자신이 잃어져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역설이라고 말합니다.  역설은 모순되어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진리입니다.  찾고자 하는 자는 잃어버려야 하고, 잃어버리면 찾으리라.  다시 말해서,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잃어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잘 따라가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잃어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잃어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의하면 우리는 그것을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예수님만 잘 따라가시면 됩니다.  부활하시고 살아 계셔서 지금도 저와 여러분을 인도하시는 바로 그분을 바라보면서 잘 따라가면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주님을 잘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나 자신이 바로 장애 요소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 따라가지 못하게 만드는 내 안에 어떤 요소들이 나로 하여금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는데 장애물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하나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나 자신이라는 장애물을 극복하고 넘어서서 예수님을 잘 따라갈 수가 있을까요?  오늘 본문 2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 친히 대답을 하시고 계십니다.  본문 2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여기에는 예수님을 잘 따라가기 위해서는 세 가지 지침을 말씀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의 지침을 가리켜서 자신을 구원하고,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고, 내 인생이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는 세 가지의 가장 중요한 비밀이라고 말씀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자신을 구원하고, 뿐만 아니라 나라는 인생이 이제부터는 다른 사람들이 구원하기 위해서 쓰임을 받는 인생으로 살아가는 세 가지의 비밀이 있습니다.

첫째 비밀은,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자기 부인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이 말씀하는 자기 부인이 아닌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자기 부인이 아닌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자기 부인은 자기 자신을 불필요하게 깎아 내리는 자기 비하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혹은 자기 학대를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자기 포기를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오늘의 문맥을 통해서도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25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성경은 나의 생명의 소중함, 또는 나라는 존재의 중요성에 대해서 매우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본문을 통해 나라는 존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본문 23절에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에서 주신 말씀입니까?  저는 이것을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한 자기 긍정을 위한 자기 부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성 신학자들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이것은 참된 자기를 찾기 위해서 거짓된 자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서는 먼저 거짓된 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짓된 나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거짓된 나라는 것은 창조된 그대로의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창조하셨던 나는 거짓된 내가 아닙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셨던 나,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나는 하나님을 좋아하며, 그분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기뻐함으로써 따라갈 수 있는 나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거짓된 나입니다.  이 거짓된 나는 타락으로 인하여 생긴 것입니다.  사탄의 영향을 받고, 세속적인 가치관의 영향을 받아서 변질된 타락한 나입니다.  그 내가 바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일에 방해가 되고 있는 나 자신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제 안에는 예수님을 순종하지 못하게 하고, 예수님을 기뻐하지 못하게 만드는, 혹은 예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범죄함으로 타락한 나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 속에는 이 타락한 죄성이 다 있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죄성은 제 안에도 있습니다.  이것은 욕심 많은 나요, 충동적인 나요, 그리고 이기적인 나인 것입니다.  이러한 나 자신이 경계되고 부인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주님을 성공적으로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목사인 저에게도 동일한 진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 안에도 이런 타락한 내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치루어내야 할 가장 치열한 싸움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나를 단호하게 부인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주님을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사람으로 예수님을 따라가기를 원하는 우리는 나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존재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건강과 재물을 나 자신의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쓰여지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진지하게 따라가려는 제자된 자들의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게 살 때에만 우리는 자신의 구원을 아름답게 이루어갈 뿐만 아니라, 주께 합당히 여김을 받는 인생으로 쓰임 받게 될 줄을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내 안에서 유혹하고 있는 타락한 거짓된 나를 부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을 구원하고 주 앞에서 쓰임 받는 인생을 사는 둘째 비밀은 무엇입니까?
둘째 비밀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인생을 살다가 우리를 힘들게 하는 어떤 사람이나 사건을 경험하게 되면 그런 사람, 혹은 그런 사건을 가리켜서 자기 십자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기 남편이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혹은 시어머니가 십자가라고 말하는 며느리들도 있습니다.  속썩이는 자식들이 십자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 놈의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 자기 몸의 질병이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팔리지 않는 부동산이 자기 십자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설교를 하니까 어떤 순진한 교우들은 목에 십자가를 달고 다니라는 말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교회의 목사님이 어떤 청년이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니길래 "십자가는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지고 다니는 것입니다"라고 하니까 "지고 다니지요"하면서 십자가를 뒤로 홱 돌리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십자가의 참된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정답을 먼저 말씀드리면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신 이유, 십자가에 매달리신 이유,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고통받으신 이유,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그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생을 하고 지독한 고통을 당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이 없다면 그 고통은 그냥 고통이요, 그 고생은 그냥 고생일 뿐 그것은 십자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연결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하나의 과정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십자가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직장에서 자기 실수로 사고를 치고 그것 때문에 직장에서 굉장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십시다.  그것이 십자가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고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직장에서 정직하게 살려고 애쓰다가 부정직한 동료들에게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정직하게 사업을 하고 탈세를 하지 않고 정직하게 세금을 내려고 애를 쓰다가 사업이 어려워졌습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내기 위해서 그가 경험하는 고통이라면 그것은 자기 십자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날마다"  "날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의 가정에서, 일상적인 삶이 펼쳐져 가는 우리의 삶의 모든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순종의 삶의 살고자 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그것이 내가 누릴 수 있는 기쁨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일이지만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스스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은 누구나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일이지만, 별로 유쾌하지 않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이 뜻이라면 그 불편함을 참고 인내하면서 우리는 마땅히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고통도 기꺼이 견뎌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내 인생의 남은 여정 속에서 저와 여러분이 지고 가야 할 십자가는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그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계십니까?

자신을 구원하고, 나아가서 이웃들을 구원하고 쓰임 받는 인생을 사는 세 번째 비밀은 무엇입니까?
셋째는, 주님을 신실하게 따라가는 것입니다.

마지막 비밀은 주님을 좇아가는 것, 혹은 따라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두 가지의 지침을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지침이 다소 소극적인 것이었다면, 세 번째는 적극적인 지침, 혹은 적극적인 명령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날마다 우리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순종되어야 할 명령입니다.  따라서 무엇보다 우리의 신실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그리고 모든 곳에서 우리 주님을 신실하게 따라가고 있다면 처음 두 가지의 지침은 훨씬 수월하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져갈 수가 있습니다.  사실, 내가 어떻게 나를 부인할까?  그리고 어떻게 십자가를 질까?  우리는 이것을 너무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지막이 중요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면서 계속해서 주님만을 신실하게 따라가면 됩니다.  너무 지나치게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자기 부인을 위해 애쓰기 보다 주님께 내 인생의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지나치도록 과도하게 자기를 강조하는 시대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서점에 한 번 가보십시오.  오늘날 서가를 채우는 절대 다수의 책들은 심리학적인 것들입니다.  특별히 자신의 자긍심을 높여주는 책들이 가장 많이 쏟아져서 출판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현대인들에게는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현대인들은 이 많은 심리학자들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깊은 열등감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심리학자는 현대인들의 3분의 1정도는 병적 열등감의 포로가 되어 살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상한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존감은 늘 강조되지만, 그럴수록 더 깊은 열등감의 수렁 속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물론 열등감에서 완전히 자유한 사람은 없습니다.  심리학자인 프로이드는 모든 사람에게는 다 열등감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병적인 열등감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폴 비츠라는 기독교인 심리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 현대에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무서운 이단 종교가 있다.  그것은 자기 숭배라는 이단이다."

그런데 본래 자기를 숭배하고 싶은 자기 숭배의 유혹은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처음 에덴 동산에 찾아왔던 사탄은 어떻게 속삭였습니까?  "이 열매를 먹으면 네가 하나님이 되리라."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동일한 유혹의 속삭임을 들었던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에게 어떻게 대답을 하셨습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주 너의 하나님만 경배하라."  예수님께서는 경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소위 인간복제의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이런 인간숭배는 절정에 도달하고 있는 느낌이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만들 수 있다면 인간이 곧 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복제가 과연 인간 창조와 같은 수준일까요?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어떤 복제교의 교주 과학자가 신에게 도전을 했다고 합니다.  나도 이제는 인간을 만들 수 있다고.  그랬더니 하나님이 웃으시면서 그러면 내가 아담을 만들 때와 똑같이 비슷한 방법으로 인간을 만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만들지요."하고 그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만면에 웃을 띠고 흙을 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주무르기 시작합니다.  그때 갑자기 하나님께서 스톱을 시키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야, 그건 내 흙이야.  네 흙으로 해."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다고 해도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여전히 어떤 존재의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서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나"라는 예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나를 따르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제자의 도를 가르치신 다음에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을 데리고 가신 곳이 어디인 줄을 아십니까?

본문이 끝나는 28절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산상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변화된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신의 영광입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그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 안에 있었던 신의 거룩한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신의 영광을 보았던 제자들의 반응을 기억하십니까?  3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6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그 거룩한 신의 영광이 나타났을 때 제자들의 눈에는 오직 한 분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한 분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나타난 거룩한 신의 영광 앞에 섰을 때 그들은 할 말을 잃어버리고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가 있다면, 그리고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분에게 초점을 맞추고 그분을 따라갈 수가 있다면 그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 숭배의 유혹에서 자유할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자학의 열등감에서도 해방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을 따르며, 그분을 높여드리며, 그분에게 쓰임을 받는 기쁨으로 충만한 인생이 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수님을 태웠던 나귀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어린 나귀는 예수님을 태우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는 찬송 소리를 들으면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어린 나귀와 같은 존재가 되기를 기도하셔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어린 나귀가 존귀함을 받은 것은 먼저 자신을 잃어버리고 예수님을 자신의 등에 태웠기 때문입니다.  먼저 자신을 잃어버렸을 때, 그리고 예수님을 등에 태우고 그분의 길을 걸어갈 때 그 어린 나귀는 오고 오는 영원한 세대 속에서 그 존재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믿음의 공동체가 이웃을 치유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잃어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우리 스스로를 잃어버리기로 결심한다면 이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쓰시는 놀라우신 주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우리와 우리의 이웃들이 구원받기 위해 먼저 우리 자신이 잃어버려지는 것을 배우셔야 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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