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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광의 길 (요 12: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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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길 (요 12:20-36)

연예인들은 인기를 먹고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 가장 행복한 연예인은 <싸이>로 알려진 가수 <박재상>씨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강남 스타일>이 대인기입니다. 전 세계에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인기로 따지면 예수님은 최고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곳이면 어디든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의 인기를 가늠하게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헬라 사람들까지도 예수님을 만나길 원했습니다. 20-21절을 보면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헬라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하여 개종한 사람들로서 유월절에 맞춰 예루살렘에 온 순례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유월절에 맞춰 예루살렘에 도착했는데, 마침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성에 들어가시고,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노래를 부르며 열광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놀란 그들은 물었을 것입니다. <저 분이 누구이기에 저토록 환호합니까? 보아하니 그는 왕도 아닌 것 같은데, 사람들은 왜 그를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부릅니까? 그리고 왕이라면 왜 초라하게 나귀 새끼를 탔습니까?> 아마도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저 분은 예수 선생님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내가 본 모든 이들 중에 최고입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알려졌는데, 우리 지도자들은 그 분을 미워한다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저 분이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살렸단 것이오. 나도 그 장례식에 갔었는데, 그가 지금 버젓이 살아 있소. 나사로가 사는 곳이 여기서 멀지 않으니, 한번 가서 보시오. 어쨌든 예수 선생님은 대단한 분이오.> 이런 이야기를 들은 헬라 사람들은 더욱 더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치솟을수록 기분이 좋은 사람들은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뭔가를 얻어 보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7절을 보면 그들의 속셈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뭘 주시겠느냐?>고 노골적으로 질문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차에 예수님의 인기가 치솟으니 제자들의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명해질수록 자신들에게 돌아올 몫도 더 커진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헬라인들이 만나러 왔다고 말씀드렸을 때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23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도 너무 좋아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야, 드디어 내가 뜨는구나,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환영했어. 너희도 봤지? 이젠 외국 사람까지 날 만나러 온다. 이젠 내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어>, 이런 정도의 말씀으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너무도 큰 오해였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려는 말씀은 그들의 생각과 전혀 달랐습니다. 2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방금 전에 영광을 말씀하시던 예수님께서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영광에서 죽음으로 전환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갑자기 죽음 이야기를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죽어서 열매를 맺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영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헛된 영광이 아닌, 진정한 영광을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진정한 영광은 공허한 열매가 아닌, 참 열매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공허한 열매>가 무엇일까요? 당장은 환호하지만, 나중에는 돌을 던질 사람들이 공허한 열매입니다. 그렇다면 <참 열매>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원히 예수님 곁에서 그 분을 사랑하고 찬양과 찬양을 올릴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모으길 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참 열매를 얻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지 않으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원리>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죽음을 통해서만 참 열매가 가능함을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방법은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32-33절에서도 십자가를 암시하고 계시지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십자가에서 죽으시어 생명의 길을 열어 놓으시면, 사람들은 십자가 보혈로 죄를 씻음 받고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이 구원 받은 사람들이 참 열매입니다. 이들은 밀물처럼 몰려와 환호하다가 썰물처럼 흩어지지 않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면서 영원히 찬송과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참 열매를 원하셨고,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에서의 죽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각자도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알처럼 죽으심으로 맺은 열매들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도 예수님께서 죽음을 통해 우리를 죄와 사망과 사단의 손에서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참 열매인 우리들은 오늘도 주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 보좌 앞에 모였네. 함께 주를 찬양하며, 
하나님의 사랑 그 아들 주셨네 그의 피로 우린 구원 받았네 
십자가에서 쏟으신 그 사랑 강같이 온 땅에 흘러 
각 나라와 족속 백성 방언에서 구원받고 주 경배 드리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우리는 오늘만 찬양하는 게 아니라, 영원히 찬양합니다. 우리는 그 분께 영원한 영광이 됩니다. 

죽음으로써 열매를 맺으시고, 영광을 얻으시는 것, 예수님이 걸으신 이 영광의 길은 여느 세상 임금들이 걷는 길과는 달랐습니다. 세상 임금들은 높아지고, 군림함으로써 영광을 얻으려 합니다. 세상 임금들은 수많은 병사의 시체를 넘어 성을 점령하고 영광을 얻습니다. 세상의 임금들은 남을 죽게 하고 영광을 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 낮아지시고 죽으심으로써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그 길이 다릅니다. 

세상 임금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들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31절을 보세요.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모임에서 힘과 지위로 사람들 위에서 우쭐대는 지도자들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여러분, 여기 임금은 궁극적으로는 사단을 의미합니다. 사단은 낮아져 한 알의 밀처럼 죽는 게 아니라, 높아지고자 했습니다. 사단은 높아져 하나님이 되려고 도전했다가 쫓겨난 천사입니다. 그 사단은 우리에게도 자신처럼 하라고 유혹합니다. 사단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면 하나님이 된다.>고 하와를 유혹했고, 어리석은 하와와 아담은 그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에덴동산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남을 밟고 높아져서 영광을 얻는 것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세상 임금이 쫓겨나게 되듯이 군림하던 사단의 종말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영원히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다시 제자들 이야기로 돌아옵시다. 예수님께서 헬라 사람들을 만날 생각도 안 하시고, 죽음을 이야기하실 때 제자들은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가? 
게다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당신이 걷는 길을 걸으라고 하셨습니다. 

26절을 보세요.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너희가 정말 나를 섬기고자 왔느냐? 너희가 나를 따라 영광을 얻으려면 내가 있는 것에 너희도 함께 있어야 한다. 내가 겟세마네 동산에 있으면 너희도 겟세마네에 있어야 하고, 내가 골고다 언덕에 있으면 너희도 골고다 언덕에 있어야 한다. 내가 낮아지면 너희도 낮아지고, 내가 피 흘리면 너희도 피 흘려야 한다.....> 제자들이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여러분, 이런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당황한 것은 제자들만이 아닙니다. 사실은 우리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통해 좋은 것을 많이 얻고, 영광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혼란을 느끼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이런 말씀은 안 읽을 수는 없어서 읽기는 하면서도 마음을 깊이 주지 않고 스쳐 지나갑니다. 정말 좋아하는 말씀은 따로 있습니다. 주로 <채워 주리라, 배부르게 하리라, 이기게 하리라, 보호하리라, 존귀하게 하리라...>는 말씀에는 크게 <아멘!> 합니다. 반면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는 아멘 소리가 작습니다. 마음으로는 <노멘!>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이 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기본 정체성을 좌우하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기독교가 올바른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고난의 십자가를 바라보는가, 영광의 십자가를 바라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4세기에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의 군대는 십자가 깃발을 앞세워 로마를 재통일했습니다. 그 때부터 이상한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고난의 상징이 아니라, 영광과 승리의 상징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를 한껏 장식하게 되었습니다. 아름답게 장식된 십자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소유하고 싶은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서 사람들은 주님의 십자가가 본래 투박한 나무로 만들어진, 거칠고 딱딱한 것이며, 예수님의 땀과 피가 깊숙이 밴 십자가임을 잊었습니다. 더 이상 십자가는 수난의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를 가지려는 사람은 많아졌지만,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은 적어졌습니다.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 한 알의 밀처럼 땅에 떨어져 죽고자 하는 사람이 사라지면서 신앙은 기복적으로 변했으며, 복음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번영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었습니다. 복음과 주님을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보다 십자가를 수단으로 성공하려는 사람, 그 십자가 그늘에 죄를 숨긴 채로 값싼 위안을 얻으려는 사람만 많아져 갔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인들이 썩는 밀알이 되지 못한 채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그러다 보니 열매가 없고, 열매가 없으니 참된 영광도 없게 되었고, 참된 영광이 없으니 헛된 영광을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세>가 존경을 받는 것은 그가 애굽에서 왕자로 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모세의 영광은 오히려 왕자의 영광을 버리고, 백성들과 함께 광야의 모래 바람을 맞으면서 고난을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24절 이하를 보면 이렇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그렇습니다. 그는 세상 영광을 버림으로써 만세에 존경을 받고, 참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영광을 얻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한 알의 밀이 썩어 죽는 원리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군림하는 리더는 쫓겨납니다. 그러나 섬기는 리더는 더욱 존경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섬김의 리더십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섬김의 사람들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한 공동체가 유지되는 것은 죽은 밀알 같은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서울 신정여중 김형석 선생님이 월간 <샘터>에 <어머니는 맛있는 과자를 드시지 않았다> 는 제목의 글을 썼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어른들은 술이나 담배를 좋아할 뿐 과자는 먹지 않는 줄 알았다. 우리 어머니는 언제나 맛있는 과자가 있으면 당신 몫을 남겨두지 않고 우리 5남매에게 공평하게 나눠주었다. 그리곤 당신은 늘 우리 형제가 맛있게 먹는 것을 바라만 보실 뿐 한 번도 과자를 드시질 않았다. 그러니 난 어머니가 과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줄 착각하고 있을 수밖에….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상하기 직전의 떡과 눅눅해진 과자를 우리 형제가 더 이상 먹지 않고 남긴 적이 있다. 그때 난 어머니가 우리가 먹다 남긴 과자를 정말로 맛있게 드시는 광경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그리고 난 알게 되었다. 어머니도 맛있는 과자를 먹고 싶었지만, 자식들을 위해 침을 삼키며 꾹 참고 계셨다는 것을…. 

형제가 많은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나는 그 후 가족에 대한 무한한 책임감을 느끼며 살게 되었다. 가족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의 표현이 나의 인생에 커다란 획을 그어 놓았던 것이다. 당신을 희생하며 자식들을 위했던 어머니의 그 삶은 참으로 큰 사랑이었다. 오늘따라 그런 어머님이 참으로 그립다.> 이 분은 어느 새 자신도 국을 뜰 때 고기 건더기를 아이들을 위해 남겨놓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희생을 통해 성장한 사람이 이제 아이들을 위해 희생하는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가정의 행복은 이렇게 유지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광보다 고난을 택하는 용기가 우리에게 있길 원합니다. 편한 자리와 불편한 자리 중 불편한 자리에 먼저 앉고, 쉬운 일과 어려운 일 중 어려운 일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봉사자가 되지 말고, 헌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봉사자는 일한 후에 자랑하지만, 헌신자는 더 잘 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큰 소리로 꾸짖음으로써 가위 역할을 하지 말고, 조용히 스며들어 딱풀 같은 존재가 되십시오. 자신을 보존하는 데 힘쓰지 말고, 자신을 닳게 하는 데 힘쓰십시오. 모으는 것과 베푸는 것 중에서 베푸는 데 열심을 내십시오. 다툼이 있을 때 이기는 것보다 양보하고 지는 것을 택하십시오.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이 진정한 영광의 길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뒤를 따라 참된 영광의 길을 걷게 되길 기원합니다. 

잠시 후에 찬송가 615장을 부를 텐데, 우리를 위해 죽어 주신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마음으로 찬송하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죽는 밀알이 되어 가정과 직장과 교회를 살려 나가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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