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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생의 샘물 (요 4: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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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의 샘물 (요 4:3-26)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매우 파격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로 통행하신 것이 그렇고,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 대화하신 것이 그렇습니다. 그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대를 떠나서 갈릴리로 가시던 중이었습니다.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길은 통상 세 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서쪽 지중해를 따라서 가는 길이고, 또 하나는 요단강을 건너 베뢰아 지역으로 북상하는 길이고, 마지막 하나는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는 길이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빠른 것은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것으로 걸어서 약 3일 걸렸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 길은 요단강을 건너 베뢰아 지역을 통과하는 것으로 사마리아 길보다 시간이 곱절이나 들었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유대인들은 가급적이면 사마리아 지역을 통행하지 않고 시일이 더 걸리더라도 먼 길을 택했습니다. 그것은 선민이 이방인의 땅을 밟으면 부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이방인처럼 여겼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를 간략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고대에 사마리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도였는데, 주전 722년에 북왕국이 앗수르 제국에게 멸망당했을 때, 앗수르는 사마리아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자손을 잡아가고 그 대신 이방인들을 그곳에 이주시켜서 살게 하였습니다. 자연히 남아 있던 이스라엘 자손과 이주해 온 이방인들이 혼혈되어 사마리아인이라는 종족이 생겨났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자기들도 야곱의 후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배척한고로 그들은 그리심 산에 별도로 성전을 세우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이방인으로 여겨 경멸하고 상종하지 않았으나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이 시간 저는 성도님들과 함께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의 대화를 살펴봄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은 먼저 죄인들을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지역을 통행하기를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 지역을 의도적으로 통행하려고 하셨습니다. 무슨 까닭에 그러신 것일까요? 그것은 사마리아 여자와 수가 성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의 수가라 하는 동네 어귀에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야곱의 우물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날 오정 즈음에 예수님 일행은 수가 성 우물곁에 당도했습니다. 먼 길을 걸어온 후여서 피곤한지라, 우물곁에 앉아 쉬셨고,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습니다. 

조금 후에, 웬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 항아리를 이고 우물로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여자는 웬 낯선 유대인이 자기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니 너무나 뜻밖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않는 것이 상식인데 말입니다. 냉정한 어투로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대꾸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방금 물을 좀 달라고 하더니 이제는 도로 생수를 주겠다고 하니 의아했습니다.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라고 했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주도적으로 대화를 이끌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러 고을 중에서 하필이면 수가 성의 우물가를 찾아오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 사마리아 여자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성경은 구원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구원이 필요한 것은 범죄한 우리 인생들이지만, 죄인들을 구원하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타락한 죄인은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구원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을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에덴동산에 살게 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와가 뱀의 꾐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고 남편에게도 주자 아담은 주저 없이 그 실과를 먹었습니다. 그러고 나자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벌거벗은 줄을 알게 되어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이처럼, 죄를 지으면 하나님을 무서워해서 숨게 됩니다. “내가 범죄 했으니 하나님께 나아가 용서를 빌어야겠다.” 이런 생각을 죄인은 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로마서 2장 10절 이하에 이르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라고 했습니다. 비유하자면, 범죄한 인간은 마치 더듬이가 망가진 곤충처럼 하나님을 찾아가는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 결과,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해와 달, 강이나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와 같은 피조물들을 신으로 섬기는 통탄스러운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먼저 죄인들을 찾아주셔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이 땅에 보내셨으며,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흔 아홉 마리 양을 우리에 두고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 목자처럼, 죄 가운데 방황하는 인생들을 구원하시려고 찾아오셨습니다.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오셨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영혼의 갈급함을 일깨워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시자, 여자는 퉁명스러운 어조로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자의 말을 통해서 당시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의 사이가 얼마나 불편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자의 말에 개의치 않으시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생수란 영생과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이 여자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물이 여전히 마시는 물인 줄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동문서답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게는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한번은 밤중에 바리새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뵙자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이르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 곧 선지자로 인정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하기 힘든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세례 요한, 또는 엘리야, 또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 하나라”고 한 것을 감안할 때, 그의 평가 역시 다른 유대인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일컬어 훌륭한 성현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윤리 교과서에는 예수님을 인류의 사대 성인 중 하나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싫어하는 사람들이라도 예수님을 비난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하여 호감을 갖는 것이 그 사람을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욕구를 갖고 있는데 반해서 비 그리스도인에게는 영적인 갈급함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하면 서로 말이 잘 통하지만, 죄라든가 영생이라든가,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면 그만 흥미를 잃고 귀를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구원에 관한 진리가 저들에게는 이해가 안 되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은 관심사가 다릅니다. 그 이유는, 전자는 성령께 속한 사람이지만 후자는 육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5-7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5)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 여자의 관심을 우물물로부터 점점 영적인 데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의아해 하는 여자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점차 이 여자는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물이 자기가 말하는 물과 다른 차원의 것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리하여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낙심할 것은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눈을 뜨게 하시는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감화하셔서 영적인 진리를 깨닫게 해 주셔야 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방편으로 사용하십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자주 듣다보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구원의 진리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믿은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불신 이웃에게 부지런히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셔서 회개하게 하십니다.

우리나라는 어느 곳을 파도 쉽게 물을 얻을 수 있지만, 팔레스타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곳 사람들에게는 우물이 매우 귀중한 자산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여자는 상당히 먼 데서 물을 길러 왔을 것입니다. 매일같이 항아리를 이고 물을 긷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여자에게 뱃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겠다고 하시니까 귀가 솔깃했습니다. 그런 샘을 소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께 간청하기를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거꾸로 여자가 예수님께 “제발, 이런 물을 저에게 주옵소서.”라고 부탁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기를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셨습니다. 여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는 주님의 말씀이 이 여자의 양심을 일깨웠습니다. 그 말씀이 여자에게 “너의 숨겨진 죄와 불의를 고백하라”는 요구처럼 들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됩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알게 됩니다. 또 하나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을 보기 전에는 자기 얼굴에 무엇이 묻었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검댕을 묻히고도 거리를 활보합니다. 그러나 거울을 보고 자기 모습을 확인하게 되면 방금 전까지 자신만만하던 것이 사라지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우리는 자신의 죄인 된 실상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하신 주님의 말씀에 사마리아 여자는 불현듯 자신의 실상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여자에게는 수치스러운 과거가 있었는데 그것은 남편을 자주 바꾼 것입니다. 지금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동거하고 있습니다. 여자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여자의 고백을 회개로 인정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를 계속하신 목적은 실로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회개가 중요한 것은, 회개란 구원으로 들어가는 관문과 같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지금까지 살아온 자기의 삶을 불의한 것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사죄를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 하나님, 저의 지난날을 돌아보니 죄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지옥 형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입니다. 그뿐 아니라, 저는 전적으로 무능하여 죄를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저를 구원해 주옵소서.”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 자신의 타락하고 무능한 실상을 깨닫게 해 주셔서 진정한 회개에 이르도록 도와주십니다.

네 번째로, 죄인은 회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그의 실상을 소상히 알고 계시는 예수님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예수님을 올바로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 여자의 관심사가 달라졌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관하여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여자는 어디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만 하나님께서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 당연히 예배는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드려야 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하나님께서 축복을 선포하라고 명하신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께서 열납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배에 대한 양편의 생각은 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제사를 드리게끔 되어 있었지만, 이제 메시야가 오신 신약시대에는 장소란 조금도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실인즉,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어느 일정한 장소에 모셔둘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 이 우주 공간 어디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으신 곳은 없습니다. 지금 이 곳에도 하나님께서 임하여 계십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 메시야께서 오셨으므로 양이나 소와 같은 제물을 드리는 제사는 합당치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우리의 신령과 진정을 원하십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랑과 충성과 순종과 헌신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이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짙은 안개가 걷힌 듯했습니다. 불현 듯 장차 메시야가 오시면 더 완전한 진리를 말씀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 말하기를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이 여자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여자는 지금 선지자가 아닌 메시야를 만나서 대화를 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이에 이 여자는 자기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고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사마리아 여자는 죄 가운데 방황하는 인생들을 상징합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우물물을 길으러 온 것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이 땅의 것만 위해서 살아갑니다. 이 여자가 남편을 다섯이나 바꾼 것은 이성과의 사귐을 통해서 마음의 갈급함을 채우기 위함이었습니다. 비단 이 사마리아 여자 뿐 아니라,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성과의 사랑을 통해서 심령의 갈급함을 채우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심령의 갈증을 해소하지 못합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과 같이, 머지않아 실망하고 또 다른 대상을 찾아 헤맵니다. 

그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물질을 통해서 삶의 만족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얼마를 갖게 되면 만족할 수 있을까요? 지혜자 솔로몬은 말하기를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5:10)고 했습니다. 이 외에도 사람들은 여러 가지 대상을 통해서 심령의 만족을 추구하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맙니다. 

심령의 만족을 얻으려면 사마리아 여자가 우물에 물을 길러 왔다가 예수님을 만나 영생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 것처럼, 관심사가 세상일에서 영적인 일로 바뀌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 관심사가 달라집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을 만나 육신의 갈증을 해소하는 물이 아니라 영생의 샘을 갈구하여 얻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곧 영생을 주는 음료이십니다. 우리 역시 사마리아 여자처럼 예수님을 만나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이 메시야이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물 항아리를 버려두고 마을에 달려가서 사람들에게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예수님을 알리고 그들을 데리고 주님께로 나왔습니다. 복음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진실로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고 믿게 된 사람은 이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합니다. 아직도 죄 가운데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설교를 경청하신 성도님 마다 영생의 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영혼의 만족을 누릴 뿐 아니라,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는 불쌍한 가족과 이웃에게 영생의 주님을 전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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