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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거룩한 바보를 쓰신다 (출 9:2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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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거룩한 바보를 쓰신다 (출 9:27-35)

지난 월요일에는 태풍이 오는 가운데서도 우리 제천에서 ‘전국 감리교 목회자 장로 탁구대회’가 있었습니다. 장로님들은 우리 연회가 우승을 했는데, 목회자들이 문제였습니다. 대회 며칠 전, 목회자 선수가 없다고 참여해 달라고 해서 선수로 참가를 했습니다. 그래도 년에 탁구 좀 쳐 보았다고 자부해서 출전했는데 결과는 3전 전패...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첫 게임에서 저를 이긴 사람들은 모두 결승, 준결승까지 갔다는 점... 실력이 월등한 분들이라는 점... 대회를 마치고 오신 분들 중에 아는 분들을 접대까지 하고는 이번 주에 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때 탁구도 좀 쳐 보았고, 신학생 시절에 혼란기를 겪을 때는 당구도 쳐 보았고, 목회를 하면서는 테니스도 쳐 보았고, 전도사 시절과 부목사 시절에 교회학교 교사들, 청장년들과 클럽을 만들어서 볼링도 쳐 보았습니다. 한때는 축구도 했었습니다. 작년에는 모 권사님과 장로님의 권유로 골프채도 잡아보았습니다. 또 최근에는 또 모 권사님의 권유로 배드민턴도 몇 번 나가서 쳤는데 재미있어서 새벽에 가족들 다 데리고 나가서 칩니다. 몇 년 후에는 게이트볼도 하게 되지 않을까... 

뿐만 아니라 취미도 다양합니다. 등산도 즐깁니다. 낚시도 좋아해서 일 년에 한번 휴가 때는 해봅니다. 산에 나물 캐러 가는 것도 좋아합니다. 냇가에서 물고기 잡는 것도 좋아합니다. 물에서 다슬기 줍는 것도 좋아합니다. 요즘 같은 가을에는 산에 가서 밤을 줍는 것도 좋아합니다. 발로 밤 가시를 비벼서 토실한 밤을 꺼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모릅니다. 얼마 전에는 몇몇 분들이 밤 주우러 간다고 하는데, 저한테는 함께 가자고 하는 분이 한분도 없더라고요... 그리고 주운 밤만 가져왔습니다. 사실은 밤을 줍는 그 자체가 즐거운 것인데... 

여러분 중에 목회는 언제 하냐고 하는 표정도 있으십니다. 염려 마세요. 저의 문제는 그 중에 제대로 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뭐든지 좋아하는데, 푹 빠지는 것이 없습니다. 열중해서 그것만 하는 종목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탁구나 테니스도 전국 대회에 나가보았는데, 모두 예선 탈락입니다. 이번 주 중에 나에 대해서 묵상을 해 보았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거의 다 끼일 수 있는데, 특별히 그중에 잘하는 것이 없더라고요. 

제가 고등학생 때, 누가 질문을 했습니다. 자신의 장점과 단점이 무엇이냐고... 한참 생각 끝에 제가 대답을 했습니다. ‘저의 장점은 특별한 단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단점은? ‘제 단점은 특별한 장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특징을 갖게 하셨을까? 어떤 종목이든지 그 무리에 낄 수 있고, 참여하는 것을 좋아하고, 어떤 취미든지 다 좋아하고, 그렇지만 절대로 푹 빠지지 않고, 제대로 한 종목을 특별히 잘 하는 것도 없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관계를 폭넓게 가져서 그 속에서 평화를 만들고, 행복을 이루어 내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나라를 평화롭게 하고, 국민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면, 목사가 해야 할 일은 주 안에서 교회를 평안하게 하고, 성도들을 주 안에서 기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기질들을 활용해서 교회와 성도들을 평안하게 하고 기쁨과 행복이 넘치게 하는 것이 내 할 일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와 기질, 특징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입니까? 그러한 자원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 보았던 출9:13~26의 말씀은 애굽에 내린 일곱 번째 재앙인 우박재앙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바로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고 말씀하셨는데, 바로가 듣지 않아서 (14절)‘내가 이번에는 모든 재앙을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에게 내려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네가 알게 하리라’고 말씀하시고 경고하신대로 우렛소리와 우박을 내리시고 번갯불을 내리셨습니다. 

행복의 지상낙원 같은 애굽이 순식간에 생지옥이 되었습니다. 아비규환과 같은 현장이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 말씀을 믿고 행동한 사람들은 피해를 덜 받았지만, 바로처럼 ‘여호와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아니한 사람’, ‘아직도 교만한 마음을 버리지 못한 사람’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주인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계속되는 우박재앙으로 비참하고 끔찍한 일이 멈추지 않습니다. 이곳저곳에서 사람, 짐승, 그리고 모든 초목이 죽어갑니다.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다 잃게 됩니다. 

바로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두려움이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긴급히 사람을 보내 모세와 아론을 불렀습니다. 

(27절)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모세와 아론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 

왜 모세와 아론을 불렀습니까? 지금도 우박이 내리고, 난리가 났습니다. 다급합니다. 빨리 불러서 말합니다.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이 말의 진위를 논하기 전에, 바로도 이 상황에서는 회개를 합니다. 그런데 ‘이번은’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14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번에는’하나님이 모든 재앙을 바로와 그 나라에 내리시면서 ‘정말 이번에는’제대로 심판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가 ‘이번은’자신이 범죄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의 뜻에는 또한 ‘이번만 넘긴다면’, 너무 어려워서 일단 위기만 넘기겠다는 뜻도 있습니다. 계속해서 바로가 말합니다. 

(28절) “여호와께 구하여 이 우렛소리와 우박을 그만 그치게 하라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다시는 머물지 아니하리라”, 

바로가 다급히 말하는 것은 그만큼 최악의 재앙이었고, 때문에 굉장히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가 말합니다. ‘내 손을 여호와를 향해 펴면 우박 재앙이 멈출 것이지만, 왕과 왕의 신하들이 하나님을 아직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줄을 내가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박 재앙이 멈추니까 바로가 완악해져서 이스라엘을 내보내지 않습니다. 신하들도 똑같습니다. 

(34절) “바로가 비와 우박과 우렛소리가 그친 것을 보고 다시 범죄하여 마음을 완악하게 하니 그와 그의 신하가 꼭 같더라”, 

(35절)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 

1. 왜 바로가 다시 완악해졌을까요? 

물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처음에 모세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전부 말씀하셨습니다.  

(7:3~4절)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바로가 완악하게 된 것은 물론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바로의 입장에서 쉽게 허락할 수 없는 이유는 그동안 누려왔던 안락과 평안을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와 변화가 생각까지는 갔으나 마음에는 안 갔습니다. 생각은 그렇게 해야겠다고 해도 마음으로는 내키지 않으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결국 복선이 깔려 있는 두 마음이었던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떤 길이 옳은 길이고, 의로운 길인지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쉽게 그 길을 가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눅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임을 압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해요. 

찬송 445장,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주께서 항상 지키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

태산을 넘어 험곡에라도 가는 거에요. 주님의 빛 가운데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태산을 넘고 험곡에 가는 것이 쉽지 않아요. 안 되는 것입니다. 찬송 461장,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가 물어보실 때 죽기까지 따르오리 성도 대답하였다”,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질 수 있겠니? 하고 물어보실 때 ‘예, 죽는 데까지라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은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게 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을 ‘거룩한 바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거룩한 바보를 쓰십니다”, 


2. 거룩한 바보가 무엇입니까? 1) 거룩한 바보는 주님께 맡기고 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의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8복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마5:5)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을 받은 자, 모두가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 생활은 흥정이 아니라 절대의존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면 절대 의존이란 무엇입니까? 절대 의존은 종이배와 같습니다. 종이배는 자체 동력이 없습니다. 그냥 물결이 흐르는 곳으로 갑니다. 하나님의 이끌림이 있는 곳을 따라 그냥 갑니다. - 또 절대 의존은 수영과 같습니다. 

제가 수영을 배우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사실, 어려서부터 물가에 갈 기회가 있으면, 아이들과 물장난하면서 수영을 조금 배웠습니다. 교회 중고등부 시절, 여름 수련회를 가면 물에 가서 놀았는데, 그때마다 잠수를 한다든지, 첨벙대며 하니까 ‘개수영’정도는 하게 되더라고요. 여기서 개수영이란 개헤엄을 말합니다. 

그런데 십 수 년 전, 의사 선생님들과 간호사분들과 함께 스리랑카 단기선교를 갔을 때입니다. 10여일을 다녀왔는데, 마지막 날에는 근사한 호텔에서 하루를 쉬었습니다. 그 호텔에 수영장이 있는데, 함께 간 분들이 다 수영을 잘 하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수영장에서‘안 목사님, 빨리 들어오세요’하는데 들어가기가 싫더라고요. 하도 권하길래 들어갔습니다. ‘수영 해보세요’, 아차, 그런데 그것이 실수였어요. 그때 수영을 하면 안 되는데, 그만 ‘개수영’을 ... 함께 갔던 분들은 제가 뭐든지 잘 하는 줄로 아셨습니다. 그래서 멋진 폼으로 수영을 할 줄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볼품없이 ‘개헤엄’을... 그때의 그분들의 표정을 잊지 못합니다. 그래서 돌아와서 그 바쁜 가운데서도 새벽기도 끝나고, 수영 강습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겨울에 수영장 찬 물에 정말 들어가기 싫은데... 그 이후, 저희 가족 모두를 차례로 수영을 가르쳤습니다. 지금 저희 가족은 물개 가족이고... 저도 정폼으로 시범 한 번 보여도 흉하지 않을 정도는 됩니다. - 그런데 수영을 처음 배울 때, 지독한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처음인데 깊은 물로 그냥 걸어들어가래요... 억지로... 얼마나 무섭든지... 마구 허우적댔습니다. 

그런데 호흡법을 가르쳐주고 들어가래요.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호흡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 그 이후에는 내가 물에 뜨려고 안 해도 됩니다. 그냥 물에 몸을 맡기면 됩니다. 그리고 숨만 쉬면 됩니다. 수영은 물에 몸을 맡기는 것입니다. - 여러분, 거룩한 바보의 삶은 수영과 같습니다. 그냥 맡기면 됩니다. 결국 거룩한 바보의 삶은 주님께 나를 맡기는 순전한 삶입니다. 2) 거룩한 바보는 내려놓는 삶입니다. 

이제 가을이 깊어지면 나무에 단풍이 들고, 결국에는 그 잎들이 낙엽이 되어 떨어집니다. 이 낙엽을 생각해 봅니다. 나무가 잎이 무성해야 건강한 것입니다. 그 잎들이 햇볕을 받고 광합성 작용을 잘 해야 양분을 저장해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을이 깊어지면 그 잎들을 놓아야 합니다. 그 잎을 갖고 있으면 안 됩니다. 잎을 놓아야 다시 봄이 왔을 때, 깨어나서 새로운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욕심을 내려놓아야 하고, 세상에서 약삭빠르게 실리를 좆는 것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장기려 박사’를 아십니까? 외과 의사셨고, 신실한 신앙인이셨고 장로님이셨던 분입니다. 춘원 이광수 선생이 ‘사랑’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그 소설 속의 주인공이 장기려 박사를 모델로 쓴 것입니다. 장기려 박사는 그 이야기만 하면 자신은 그런 인물이 못된다면서 극구 아니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장기려 박사는 의사로서도 놀라운 업적을 남기셨기에 국민훈장도 받으시고, 막사이사이상, 등 많은 상도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에 별세하였는데, 자신은 집 한 칸 없이 협소한 사택에서 지내면서 마지막까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박애와 봉사정신으로 인술을 펼쳐 한국의 성자로 칭송 받고 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있지만, 사실 자신은 거룩한 바보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거룩한 바보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바보를 쓰십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정말 ‘거룩한 바보’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바보로 100% 손해 보고, 희생하고, 인내하셨기에 우리의 구주가 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는 진정한 돌이킴이 없이 두 마음을 품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복선이 깔려있는 두 마음을 가지면 안 됩니다. 

금주에 김소엽 시인의 ‘오늘을 위한 기도’라는 시를 보았습니다. “잃어버린 것들에 애달파하지 아니하며 / 살아있는 것들에 연연해하지 아니하며 / 살아있는 일에 탐욕하지 아니하며 / 나의 나됨을 버리고 / 오직 주님만 / 내 안에 살아있는 / 오늘이 되게 하소서 / 가난해도 비굴하지 아니하며 / 부유해도 오만하지 아니하며 / 모두가 나를 떠나도 외로워하지 아니하며 / 소중한 것을 상실해도 절망하지 아니하며 / 오늘 살아있음에 / 감사하고 격려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 누더기를 걸쳐도 디오게네스처럼 당당하며 / 가진 것 다 잃고도 욥처럼 하나님을 찬양하며 / 천하를 얻고도 다윗처럼 엎드려 회개하는 / 넓고 큰 폭의 인간으로 / 넉넉히 사랑 나누며 / 오늘 하루 살게 하소서”,  내용을 보면 거룩한 바보의 삶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혹시 너무 똑똑한 사람은 아닙니까? 손해볼 줄도, 인내할 줄도, 희생할 줄도 모르는 그런 사람들은 아닙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거룩한 바보를 쓰십니다”, 

찬송 450장,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 이 세상 이별하는 날 주 앞에 가리라”

바로와 같은 두 마음이 아니라 순전하게 거룩한 바보의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쓰임받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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