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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냄새 혹은 향기? (고후 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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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 혹은 향기? (고후 2:12-17)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고 드로아에 갔을 때에, 주님께서 내게 거기에서 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여,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그들과 작별하고 마케도니아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에 언제나 우리를 참가시키시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어디에서나 우리를 통하여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그러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죽음의 냄새가 되고,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향기가 됩니다. 이런 일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저 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살아가는 장사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꾼답게, 진실한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 청년이여, 일어나라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어제가 추분이었으니, 이제부터는 밤이 낮보다 조금씩 길어질 겁니다. 이맘때면 피어나는 코스모스가 참 깨끗하고 가벼워 보입니다. 코스모스 길을 걷다보면 마음도 덩달아 가뿐해집니다. 김명인의 시 <추분의 코스모스를 노래함>은 여름 내내 초록의 줄기를 뻗던 코스모스가 추분에 꽃대를 세웠다면서 그 흥겨움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알맞게 온 색색의 꽃잎들이 결을 맞춘다
새털처럼 가벼워진 지구가
코스모스 잎잎 위에서 저마다의 이륙을 준비한다”

우리 마음도 그렇게 가볍게 이륙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무게에 짓눌린 채 살아갑니다. 오늘은 우리 감리교회가 청년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청년 세대’ 하면 저는 불온함이라는 단어를 먼저 떠올립니다. 청년들의 불온함이야말로 역사 변혁의 동력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기성세대의 가치관에 순치된 젊은이들을 보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청년들은 상당히 암울하고 불우한 세대로 치부되기 시작했습니다. 

‘청년’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학자금 대출, 청년 실업, 88만원 세대 등입니다. 어떤 이는 청년세대를 가리켜 삼포三抛세대라 했습니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는 뜻일 겁니다. 일본에서는 청년들이 프리터(free+arbeiter)세대로 지칭되고 있습니다.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사는 세대라는 뜻입니다. 미국에서는 아이팟ipod세대라고 하는데, 여기서 아이팟은 애플사가 제공하는 기기가 아닙니다. 

불안정하고insecure, 압력 받으며pressed, 과중한 세금 부담overtaxed, 빚에 쪼들리는debt-ridden세대라는 말의 약자입니다. 분노의 세대라는 말도 있더군요.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던 프랑스의 스테판 에셀의 책 <분노하라>에서 유래한 명칭입니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의 책임을 힘없는 일반 시민들에게 떠넘기는 사회 분위기에 저항하고, 돈과 시장의 무례한 힘에 맞서 싸우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젊은이들의 정신을 왜소하게 만드는 체제는 불의하다고 확신합니다. 요즘 <개그 콘서트>에서 뜨는 코너 중 하나는 ‘멘붕스쿨’입니다. 거기 등장하는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맥락을 무시하는 화법을 사용합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의 소통에 늘 실패하는 패배자들입니다. 자아 정체성이 무너진 그런 인물들의 정점은 ‘갸루상’입니다. 기괴한 화장을 한 그와 선생님의 대화는 늘 어긋나곤 합니다. 결국 그의 독백 아닌 독백은 ‘사람이 아니무니다’라는 말로 끝납니다. (한신대 김종엽 교수의 9월 19일자 창비주간논평 참고)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세상입니다. 무엇을 위해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든 것이 착종된 세상에서 우리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합니다. 사람됨은 역사가 혹은 현실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길이 없다고 울기보다는 길을 만드는 검질김이 필요합니다. 성경에는 그런 모델적인 인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 길이 막힐 때

사도 바울은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만들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선교 여정 중 드로아에 도착한 바울이 마음껏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남겨두고 온 디도가 그곳 소식을 가지고 오지 않자 불안한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렇게도 지칠 줄 모르고 왕성하게 일하던 바울도 어느 순간 찾아온 내적인 어둠에 어쩔 줄 몰라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고린도 교회를 세우기 위해 했던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그는 드로아에서 복음 전할 의욕을 잃었습니다. 조급증을 내며 흔들리는 바울의 모습이 낯설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를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 또한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탈진하는 목회자들이 많습니다. 일이 많기도 많지만 내적인 빈곤이 더 큰 문제입니다. 어느 분은 ‘탈진’은 내가 가지지 않은 것을 주려고 할 때 나오는 결과라고 하더군요. 스스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평화를 만들기는 어려운 노릇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만 미국 가톨릭 노동자 운동을 시작했던 도로시 데이(Dorothy Day, 1897-1980)는 분주한 일정 가운데서도 피정을 거르지 않는 까닭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는 마른 샘이 되지 않으려면 나 역시 이처럼 달디단 샘물을 마셔야 한다.”(로로시 데이, <고백>, p.461)

바울도 불안감에 흔들렸고, 정서적 광야를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열어 주신 일터인 드로아를 떠나 마케도니아로 건너갔습니다. 미국 교사들의 교사라고 일컬어지는 파커 J. 팔머는 젊은 시절 소명 찾기에 실패했던 일을 회상합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면 길이 열릴 거라고 충고했습니다. 그 말은 중년에 이르도록 소명을 찾지 못한 그에게 너무 좌절되는 말이었습니다. 어느 날 루스라는 여성과 소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는 자기가 겪는 내적 고통을 털어놓으면서, 고요 속에 앉아 내면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기도 했지만 끝내 길이 열리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루스도 아주 솔직하게 자기 경험을 나누어주었습니다. “나도 모태 신앙인이에요. 그리고 60년이 넘게 살아왔지요. 그러나 내 앞에서 길이 열린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잠시 후 루스는 잔잔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어갔습니다. “반면에 내 뒤에서는 수많은 길이 닫히고 있었어요. 이 역시 삶이 나를 준비된 길로 이끌어 주는 또 하나의 방법이겠지요.”(파커 J, 파머,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한문화, 홍윤주 옮김, p.74를 자유롭게 요약) 문이 닫히는 것도 삶이 우리를 이끌어 주는 방법이라는 말에 동감합니다.

•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

드로아를 떠나 마케도니아에 당도한 바울은 어느 결에 자기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불안과 어둠이 물러갔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를 일으켜 세워준 것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자기 삶을 이끌어주신다는 확신이었습니다. 당장은 편치 않아도, 먼 길을 우회해야 해도, 기어코 가야 할 곳에 가게 하신다는 믿음 말입니다. 이런 확신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시간의 흐름과 깊은 침묵이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길을 걷는 동안 성령께서는 그의 마음에 깃든 어둠을 거두셨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나중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그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확신을 가지고 말했던 것은 이런 체험 덕분일 겁니다(롬8:28). 심란하고 불안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그의 어조는 갑자기 변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에 언제나 우리를 참가시키시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어디에서나 우리를 통하여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14)

바울은 왜 여기서 굳이 ‘개선 행렬’이라는 수상쩍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일까요? 개선 행진은 로마의 군사주의와 깊이 연루된 것입니다. 로마는 이역異域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거나, 5천 명 이상의 적을 죽이거나, 새로운 땅을 정복해 황제에게 귀속시킨 장군에게 개선 행진을 허락했습니다. 그는 호위대의 경호를 받으며 금빛 마차를 타고 로마의 주도로를 행진했습니다. 그의 부대가 획득한 전리품과 포로들이 행렬을 뒤따랐습니다. 사제들은 행렬을 뒤따르며 향을 피워 신들의 가호를 빌었습니다. 개선 행진은 원형경기장인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 ‘큰 원’을 뜻함)까지 이어졌습니다. 그곳에서 포로들은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로마의 개선행렬에는 피의 냄새가 납니다. 억눌린 울음소리가 섞여 있습니다. 사제들이 피우는 향기는 잔인한 폭력을 숨기는 역겨운 냄새였습니다. 그런데 어쩌자고 바울은 이런 단어를 가져다 쓰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로마 제국이 지배하던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던 것처럼, 바울은 로마의 개선 행렬과 철저히 대비되는 다른 개선 행렬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그 개선 행렬은 비폭력적일 뿐만 아니라, 생명을 풍성하게 하고, 낯설었던 사람들을 벗이 되게 하는 행렬입니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이 말을 택하여 로마 체제의 비인간성과 폭력성을 드러내면서, 전혀 다른 원리에 근거한 삶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희생함으로 다른 이를 복되게 하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는 멸망당하는 이들에게는 죽음의 냄새(stench)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는 이들에게는 생명의 향기(aroma)입니다. 가끔 텔레비전을 통해 힌두교도나 남방 불교도들 혹은 남미의 가톨릭교도들을 볼 때가 있는데, 그들은 신에게 나아갈 때 꽃을 사들고 갑니다. 나름대로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꽃이 아니라 삶의 향기를 가지고 주님께 나가야 합니다. 돈과 권력에 맛 들여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본질을 잊어버린 오늘의 교회는 하나님께 향기가 아니라 냄새를 바치는 것만 같아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 일꾼답게

바울은 성도의 존재를 한 마디로 요약합니다. “우리는…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15) 이 말 속에는 우리 실존의 두 가지 과제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삶이 하나님을 향한 봉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시간과 공간과 인간관계를 주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되는 대로 살면 안 됩니다. 자원을 마구 낭비할 수 없습니다. 

이웃을 함부로 대할 수도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먹고 사는 장사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꾼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일꾼’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다운 삶입니다.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에 나오는 이슈마엘은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며 말합니다. “배에 오르면 난 결코 시중 받는 손님이나 선장은 되지 않을 것이다. 오직 수고하는 선원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가 일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 삶이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향수를 뿌린 사람이 옆을 지나가기만 해도 우리는 의지와 상관없이 그 향을 맡게 됩니다. ‘낯선 여자에게서 내 남자의 향기가 난다’는 대사의 광고가 있었지요? 지금 우리에게서는 어떤 향기가 납니까? 수십 년 교회에 드나들었는데 그리스도의 향기가 조금도 나지 않는다면 슬픈 일입니다. 그런데 정직하게 말하자면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기가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전히 자아라는 틀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일 겁니다. 내 문제에만 골몰하는 한 그리스도의 옷자락조차 만지기 어렵습니다. 

진실로 주님의 은총을 경험한 사람들은 값없이 받은 사랑의 빚을 갚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의 마음으로 이웃을 보기 시작합니다. 애끓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했던 예수의 마음, 바로 그 마음이야말로 너와 나를 가르는 분리의 담장을 허물고, 인류를 하나로 묶어주는 마음입니다. 성도들은 자아를 넘어 이웃에게로 나아가야 하고, 이웃을 넘어 하나님의 마음에 다다르려는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이 세대의 풍조’에 속절없이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그들은 남이 정해놓은 행복의 조건을 얻기 위해 자기를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다른 삶’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이들은 고통의 자리로 내려갑니다. 그곳이야말로 예수님을 만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의 삶의 자리를 본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한 부류는 ‘정말 다행이다. 내가 이런 불행을 당하지 않다니!’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그런 현장에 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또 한 부류는 지금까지 살아온 자기 삶이 얼마나 허구에 찬 것이었는지를 깨닫습니다. 뭔가가 부족하다고 투덜거리며 살았던 삶, 허영과 사치를 추구하던 삶이 부끄럽게 회상되고, 자기가 지금까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누려왔던 것들이 사실은 다른 이들의 몫을 가로챈 것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걸 깨달을 때 사람들은 통곡합니다. 비로소 예수의 마음과 접속한 것입니다. 예수의 마음에 접속되면 삶이 새로워집니다. 가끔 흔들릴 때도 있고, 두려운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는 예수의 길 위에 서 있음을 감사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롬8:31b)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롬8:37) 

예수의 마음과 접속되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정말 많음을 알게 됩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우리 삶을 규정한다면 인생이 너무 비참합니다. 사람은 뜻을 먹고 삽니다. 길이 없다고 울지 마십시오. 주님은 지금 우리를 평화의 길, 생명의 길로 부르십니다. 고통의 현장으로 부르십니다. 예수를 길로 삼으십시오. 그러면 우리 삶의 비애가 줄어듭니다. 청년들은 물론이고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 예수의 마음에 접속되어, 상한 세상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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