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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사람의 언어생활 (엡 4: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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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사람의 언어생활 (엡 4:22-32)

1950년대 미국 위스콘신대학에는 전국 각지에서 아주 우수한 문학 지망생들이 아주 많이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특별히 그들은 남자 그룹과 여자 그룹으로 나뉘어 정기적으로 자기들의 자작시나 소설이나 편지를 발표하고 평가해주는 그런 발전적인 모임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특별히 남자 그룹에서는 이렇게 규칙을 정했습니다. ‘우리는 잘하는 것은 이야기 하지 말고 잘 못하는 것, 부족한 것만 혹독하게 지적을 하자.’하고 규칙을 정했습니다. 남자 그룹에서는 누가 발표를 하면 아무리 잘해도 잘한 것은 얘기하지 않고 부족하고 못한 것만 아주 신랄하게 비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자 그룹에서는 규칙을 달리 정했습니다. ‘우리는 잘못한 것은 이야기하지 말고 잘 한 것 좋은 것만 칭찬하고 격려해주자.’ 여자들의 모임에서는 칭찬하고 격려를 반복했습니다. 10년이 지났습니다. 어떤 결과가 일어났을까요? 우수한 문학 지망생들이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남자 그룹에서는 그 시대의 주목할 만한 아무런 작가도 배출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수많은 문학 지망생들은 그 비판 속에서 스스로 의욕을 잃고 ‘나는 문학에 소질이 없나봐, 매일 비판을 받는 거 보니까...’ 그들은 스스로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시대의 걸출한 인물들은 평범했던 여자 그룹에서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들은 계속 격려와 칭찬을 받으면서 장점을 더 계발했고 그 시대를 지배하는 훌륭한 문학인들이 많이 나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칭찬과 격려의 힘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단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울의 한 명문대학교 대학원에 재학하고 있는 금주라는 학생의 이야기를 어느 책에서 읽었습니다. 이 학생은 키도 아주 작습니다. 외모도 별로 뛰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관계가 너무 좋고 아주 성품이 훌륭했다고 합니다. 그 학생과 이야기만 하면 모두가 마음에 기쁨을 얻고 마음에 감동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 번은 그 대학의 교수님이 그 대학원생을 만나서 ‘너는 시골 출신인데 어떻게 이렇게 원만하게 아름답게 성장을 했니?’ 라고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별 대답을 기대도 하지 않고 질문했는데 이 학생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제 고향은 강원도 산골입니다. 너무너무 가난해서 밥 세끼를 걱정할 정도로 어려운 가정에서 살았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제가 5살 때 저를 낳고 제 동생을 낳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이후 재혼을 해서 동생들을 많이 낳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한 번은 겨울에 도박을 하러 갔다가 그 도박이 너무 발전을 해서 땅 몇 마직 남은 것을 다 걸고 다 날려 버렸습니다. 그리고 너무 자책을 하다가 아버지가 농약을 먹고 자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자 이 학생은 새 어머니 밑에서 그 줄줄이 딸린 동생과 함께 가난한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학교에서도 밝은 얼굴이 아닙니다. 인간관계가 원만치 않습니다. 늘 자신감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이 변화된 한 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운동장을 맥없이 지나가고 있는데 자기 담임선생님이 아주 얼음 선생님이라는 웃지도 않는 분인데 한 번은 자기 어깨를 토닥거리면서 ‘야 금주야 너는 참 보통 놈이 아니야’ 라는 한 마디 말을 남기시더라는 거예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그 다음날 학교에 가서 학급 일지를 교무실에 가져다 놓으려고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마침 자기 담임선생님이 다른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 반에 금주라는 아이가 있잖아. 그 녀석은 처지도 어려운데 열심히 공부하고 애쓰는 것을 보면 참 기특하고 놀라운 애야.’ 

그 얘기를 자기가 무심코 들었다는 거예요. 그리고는 자기는 선생님 얼굴을 볼 수 없어서 학급일지를 그냥 책상에 올려놓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뛰쳐나왔습니다. ‘금주야 너는 보통 놈이 아니야.’ 그 말이 인생을 바꿨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감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를 하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불평하지 않고 성장을 했는데 그 시골 고등학교 개교 이래로 처음으로 서울 대학교에 처음으로 입학했다는 것입니다. 놀라워요. 그래서 그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 담임 선생님의 말씀 한 마디. ‘금주야 너는 보통 놈이 아니야.’ 그 말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고 그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말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렇지요. 여러분 아침에 누구로부터 기분 좋은 말 한 마디 들으면 하루 종일 행복합니다. 하루 종일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요. 그러나 아침에 누군가로부터 쓴 한 마디의 말을 들으면 그 날 하루가 온 종일 우울합니다. 불행해요. 

여러분 우리는 말의 지배를 받아요? 안 받아요? 지배를 받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들은 한마디가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내가 누군가에게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생애를 불행하게 바꿔 놓을 수도 있어요. 그 사람의 하루를 온통 망쳐 놓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 한마디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말 속담에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 성경에 보면 ‘사람의 살고 죽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려 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언어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말에는 축복과 저주의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로 축복할 때 그 말이 그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으로 풍랑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죽은 나사로를 불러 내셨습니다. 말씀으로 행하셨어요. 무화과나무를 향해 명령할 때 무화가 나무가 마르는 저주의 사건도 있었습니다. 언어라는 것은 이처럼 중요합니다. 오늘 성경 에베소서 4장은 언어생활의 교훈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자 오늘 우리 25절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만 말하라. 그런데 25절 앞에 보면 어떤 말이 옵니까? ‘그런즉’ 요즘 말하면 그러므로, 그런즉 같은 뜻입니다. 접속사라고 하죠. 앞의 얘기를 받아서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25절 앞에는 어떤 얘기가 있습니까? 22절부터 24절의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는 이제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이 연결되어 집니다. 그런 상황을 보면 오늘 에베소서 바울이 바로 에베소 교인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인데 그 에베소 교인들은 바로 새 사람을 입은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면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아니라 옛 사람의 구습과 죄악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은 성도들에게 오늘 사도 바울은 권면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권면은 새 사람의 언어생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 받은 백성들이 어떤 언어생활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 오늘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간곡히 권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런가 하면 25절의 마지막을 보면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지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고린도 전서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각 지체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한 몸이신 그리스도 교회의 각 지체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람은 눈의 역할도 코의 역할도 손가락 발가락 심장 간 콩팥의 역할을 감당하는 거예요. 우리는 모든 지체라는 거예요. 지체라는 것이 뭐예요. 모든 같은 성도 간에 가족 간에 이웃 간에 라는 것이지요. 같은 믿는 자들 간에 이런 언어생활을 해야 한다고 성경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새 사람의 언어생활은 어떠해야 할까요? 첫째는 거짓 대신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자 25절 말씀을 한 번 더 읽습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아멘! 거짓을 버리고 진실만을 말하라. 아마 에베소 교회에는 초대 교회 얘기죠.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세례를 받았지만 아직도 혹 그 가운데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보지도 않았으면서요. 

오늘 우리들을 보면 알죠. 우리도 간혹 거짓말을 할 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이고 어떻게 또 크게 있다고 하시네요. 용기 있게요. 물론 우리는 때로 백색 거짓말이다 해서 선한 거짓말을 하곤 하죠. 애들을 격려한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거짓을 버리라. 그리고 참된 것. 진실 된 것을 말하라. 여러분 거짓이란 무엇입니까? 모든 종류의 부정과 속임수, 악한 궤계를 다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참된 것이 무엇입니까? 진실입니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거짓을 말하지 않고 바르고 정직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그 진리라는 말은 진실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 자신은 진실한 분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우리들도 진실한 언어생활, 진실한 삶을 살아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잠언 4장 24절에 보니까 “구부러진 말을 내 입에서 버리며 삐뚤어진 말을 내 입술에서 멀리하라.” 구부러진 말, 삐뚤어진 말은 다 거짓말이에요. 거짓말 하지 말라. 때로는 손해를 볼지라도 거짓말을 하지 말라 진실만을 말하라. 특별히 이 초대 교회나 구약에서는 거짓말은 굉장히 큰 악입니다. 왜냐하면 법정에서 재판을 할 때 반드시 증인을 세웁니다. 두 명 이상의 증인. 그 증인들이 거짓말을 하면 살아야 할 사람이 죽고 죽어야 할 사람이 살 수 있습니다. 거짓 증인이 되면 안 되죠. 

오늘 날에도 법정에서 어떤 증언을 하는 분들이 뇌물을 받고 거짓 증언을 하게 되면 죄 없는 사람이 고통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 증언은 자신을 괴롭힐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엄청난 고통과 아픔을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악입니다. ‘아이 그런 거야 애교로 봐주셔야죠.’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거짓말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새 사람은 진실만을 말해요. 옆에 분들과 함께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진실만을 말합시다.” 

성경은 우리에게 진실만을 요구합니다. 잠언 14장 25절에 보니까 “진실한 증언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여도 거짓말을 뱉는 사람은 속이느니라.” 진실한 증언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잠언 6장과 12장에 보면 “거짓된 혀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나 진실히 행하는 것은 그분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잠언 12장 19절에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지만 거짓된 혀는 잠시 동안만 있느니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진실을 말합니다. 새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은 백성들은 진실만을 말해야 할 줄 믿습니다.

자 두 번째로 새 사람의 언어생활은 ‘더러운 말 대신 선한 말을 하자.’ 한 번 따라해보시죠. “더러운 말 대신!! 선한 말을 하자!!” 자 그러면 더러운 말은 어떤 말이고 선한 말은 어떤 말일까요? 29절 말씀입니다. 시작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아멘! 

오늘 성경이 말하는 더러운 말은 어떤 말일까요? 악의 있는 험담. 여러분 남에 대한 중상모략 이것을 바로 더러운 말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타인에 대한 없는 것을 지어낸 이 험담과 중상 모략을 더러운 말이라고 표현합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나쁜 말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선한 말은 무엇일까요? 도덕적으로 진실하고 옳은 말. 그래서 교회에도 덕이 되고 그리스도 상호간에도 덕을 세우면서 타인에게 은혜를 끼치는 말을 선한 말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특별히 오늘 성경에 뭐라고 소개합니까?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선한 말은 첫째 덕을 세우는 말입니다. 사람에게 그 말이 덕을 세워야 해요. 또 그 말이 유익한 말이어야 해요. 또 그 말이 은혜를 끼쳐야 해요. 옆에 분들에게 또 한 번 질문해 봅시다. “당신의 말은 은혜를 끼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 “아 정말 그 말씀을 들으니까 참 은혜가 되네요.” 이래야죠. “그 말을 들으면 그저 받은 은혜도 쏟아버려!” 그러면 안 되죠. “당신 말만 들으면 나는 시험이 듭니다. 회의가 생깁니다. 신앙의 의심이 생깁니다.” 그러면 안 되지요. 우리 언어는 교회에 덕을 세워야 되요. 또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끼칠수 있어야 해요. 

여러분들이 추석명절을 이제 당하면 가족들이 만날 것입니다. 크리스챤도 있고 크리스챤이 아닌 사람들도 있죠. 가족 간에는 친척 간에는.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언어가 너무나 중요해요. 그런 분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되요. ‘저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말은 저 꼴로 할까?!’ 이러면 안 되지요. 

우리는 말을 은혜 있게 해야 해요. 누가 들어도 은혜가 되도록 해야 해요. 덕을 끼치는 말을 해야 해요. 그것이 바로 선한 말입니다. 무릇 더러운 말 중상모략과 험담, 남을 헐뜯는 말 그것은 입에도 담지 말아라. 그리고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그런데 하나 무서운 것이 이 더러운 말은 성령을 근심하게 한다는데 문제가 있어요. 더 나아가서. 자. 우리 오늘 성경 30절 말씀 30절 같이 읽습니다. 시작 “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아멘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이 어떤 말 이예요. 더러운 말 이예요. 남을 헐뜯고 중상모략 하는 말은 결국 내안에 계신 성령님을 슬프게 만드는 거예요. 통곡하게 하는 거예요. 마음을 너무 아프게 만들어요. 여러분 예수님의 사람은 그 속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님이 임재 해 계셔야 해요. 근데 내가 내 입술로 이 더러운 말을 쏟아놓을 때 내안에 계신 성령님은 근심하고 탄식하고 슬퍼하고 통곡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나도 불행해지는거예요. 여러분 우리 가정에서 아내가 지금 마음이 많이 언짢아요. 그런데 나만 랄랄라 할 수 있습니까? 그거 안 되지요. 아내가 지금 우울해하면 나도 마음이 우울 할 수밖에요. 자식들이 다 괴로워하는데 나만 노래 부르고 신날 수 있습니까? 그거 안 됩니다. 내가 행복하려면 온 가족이 다 행복해야 되요. 마찬가지예요. 

여러분 진실로 행복하려면 내안에 계신 성령님이 기뻐서 춤을 추실 때 나도 행복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중요한거예요. 내안에 계신 성령님이 기뻐서 춤을 출 수 있어요. 그러기 위해서 나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돼야 되요. 무릇 더러운 말을 내 입에서 쏟아낼 때 그리고 그런 말을 하고 나면 나도 찜찜하고 나도 마음이 불편해요. 그런데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기뻐하실 수 없거든. 성경은 무릇 더러운 말은 입에도 내지 말고 선한말로 무릇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중요한거예요. 이게 새사람의 두 번째 언어생활이예요.

자 세 번째 우리 새사람의 언어생활은 뭘까요? 악한 말을 버리라 하는 것입니다. 악한 말. 자 우리 31절 말씀을 또 읽어볼까요? 31절 말씀입니다. 시작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아멘 자 우리가 버려야 할 것, 우리가 새로 취할 것이 있고 버려야 할 것이 있는데 이 악의가 있는 감정과 언어를 던져버리라는거예요. 더 이상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 안돼요. 이미 우린 새사람이 되었고 새 옷을 갈아입었는데 과거에 더러운 옷을 그대로 있고 고집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옷을 새로 갈아입어야 해요. 자 그중에서 악독을 던져버려라 악독이란 무엇이냐. 

주석에 보니까 자기가 당한 손해나 모욕에 대한 원한을 버리지 않고 마음속에 품고 있어서 이웃과 화해하기를 거부하는 마음상태가 악독이예요. 누군가로부터 아픈 말을 들었어요. 또 마음에 어떤 원한을 가지고 있어서 풀 수가 없어요. 그래서 늘 관계를 거부하는. 그리고 관계를 화해할 수 없는 그런 악독, 그걸 악독이라고 해요. 악한 마음 있죠. 내 마음속에 아직 맺혀있는 것, 여러분 그걸 풀어버리셔요. 맺혀있는 것 그게 인내라는.. 내 마음에도 평화가 없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화해할 수 없다는 것, 또 그런 생각이 있다면 우리의 입에서는 독설이 나갈 수밖에 없는 거죠. 

자 또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이 노함과 분냄이예요. 노함과 분냄. 이 노함이라는 것은 감정이 폭발되는거예요. 그냥 생각만 하면 감정이 막 격렬하게 폭발되는 것. 또 분내는 것. 어떤 마음에 적의가 가득차서 지속적으로 분노하는 상태를 분냄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아주 위험한거죠. 내 마음이 지금 끓어오르는데 좋은 말이 나갈 수가 없죠. 그렇죠 그것도 버려야 될 것입니다. 

또 떠드는 것. 이건 뭐냐 분노를 자제하지 못하고 소리 지르는 것이 바로 떠드는 거예요. 그냥 무슨 얘기만 나오면 막 흥분해서 떠드는 것. 막 소리 지르고. 그것도 우리가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또 보면 성경에 마지막 비방하는 것. 비방은 옛날 성경에 훼방이라고 설명합니다. 상대를 헐뜯거나 모욕하는 언사. 그것이 비방이죠. 비방. 이것도 우리가 버려야 될 것이다. 왜? 형제간에 같은 그리스도 인 간에 서로 비방해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마태복음 7장에 보면은 “너희는 서로 비판하지 말라” 그래요. 같은 의미지요.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남을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당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비판이라는 말은 원어로 보면 판단하다. 정죄하다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감히 누가 누구를 판단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판단하실 분은 우리 재판장 되신 하나님 외엔 없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판단하실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형제를 판단하는 거예요. 아무개는 어떻고 아무개는 어떻고. 우리 그리스도인간에 서로 판단 하는거예요. 재판 하는거예요. 하나님이 그것을 금하고 계신다는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특별히 말씀하셨어요. 비판을 금하시면서 뭐예요? 너희가 너희 눈 속에 있는 대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에 눈 속에 있는 티를 뽑으려고 한다고. 

이 대들보라는 것은 큰 통나무예요. 내게 있는 엄청난 결점이나 대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에 눈 속에 작은 티를 찾아내려고 네가 그렇게 애 쓴다는거예요. 잘못된 거죠. 형제의 허물을 들춰내거나 비판하지 말라. 비판하는 사람은 결국 그 비판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비판을 죄라고 설명하고 있는 거지요. 악한 말, 악독과 노함과 분냄, 떠드는 것. 소리 지르는 것. 비방하는 것. 비판 하는것. 이것을 성경은 금하고 있고 또 예수님께 곧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 된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것들을 입술에서 버려야 될 것이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내입에 파수꾼을 세워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악독을 버릴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 입술에 이런 파수꾼을 세울 수 있을까요? 성령의 도움을 구하라는 것이지요.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어요.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때 우리는 선한 말을 우리는 사용해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악한 말을 금하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이 원한을 풀어야 되요. 그 원한을 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요? 용서해야 되요. 용서해야 되요. 자 우리 32절 말씀 읽어볼까요? 

32절 같이 읽습니다. 시작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아멘 누구로부터 받은 쓴말한마디가 내 안에 꽉 박혀있어요. 그래서 말은 할 수 없지만 나는 그 사람에 대해 나쁜 선입관을 가지고 나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앞에서는 굳이 안 그런 척 하지만 마음에 원한이 쌓여있다면 어떻게 해요. 

오늘 성경은 용서하라. 그 사람을 만나서 당신의 그 말이 내게 굉장히 상처가 되었다고 고백을 해서 서로가 화해할 수 있어요. 그리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 하는 것. 그것만이 온전한 언어생활, 인간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로에게 친절히 행하고 그리고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그리고 서로 용서하라 그래야 우리는 언어생활을 회복할 수 있어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오래된 이야기지요. 그는 흑인입니다. 그러나 이 남아공은 오랫동안 백인들이 통치해 왔습니다. 최초의 흑인으로 27년 동안 수감되어 있던 넬슨 만델라가 최초의 흑인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왜? 실제 백인들이 지배계층인데 흑인 대통령이 그들을 통치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흑백 간에 인종갈등이 너무나 격심해 있기 때문에 서로 죽일 듯이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아공에 대표적인 럭비 팀에 스프링 복스라는 럭비 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근데 이 선수들 다 백인들이예요. 흑인들 아무도 없어요. 다 백인선수들이예요. 그래서 때론 이 스프링복스가 대표 팀이 다른 나라하고 럭비를 경기하면은 이 남아공사람들은 흑인들은 자기나라 팀을 응원 안 한답니다. 상대팀을 해. 상대팀을 .상대팀이 이기라고. 그 정도로 흑인들은 백인들을 증오 한다는거예요. 왜? 너무 많이 착취당했기 때문에. 너무 한이 맺혀 있다는거예요. 이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남아공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어요. 흑인대통령도 제대로 통치를 할수 없어요. 

그런데 한번은 이 남아공에 스프링복스. 이 백인 팀과 오스트레일리아 대표 팀과의 경기가 열리게 되었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했습니다. 그런데 5분전에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입장했습니다. 그런데 복장을 입었는데 유니폼을 입었는데 바로 그 스프링 복스 백인 럭비 팀의 복장을 입고 나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의 눈빛으로 바라봤습니다. 대통령이 어떻게 된거 아니냐고. 

그런데 넬슨 만델라가 그 스프링 복스 주장에게 찾아가서 그와 악수를 나눕니다. 그리고 선수들을 격려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대통령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느냐고 한동안 잠시 긴장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관중석에서 넬슨! 넬슨! 넬슨! 하는 소리가 울려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거대한 함성이 되어서 온 운동장에 있는 백인들, 흑인들이 넬슨을 연호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경기에서 흑인과 백인은 하나가 된 것입니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27년 동안 백인에 의해서 고통을 당한 것을 그는 다 용서하고 용납했습니다. 그리고 백인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흑백이 하나가 되어서 그들은 이제 온전한 나라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럴 때 우리는 마음에 원한을 털어버릴 수 있고 서로를 격려하고 축복하는 관계가 될 줄로 믿습니다. 용서와 선행되어야 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행복하지 못하고 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올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내게 임할 수 없습니다. 혹 여러분 가족 간에도 같은 그리스도인간에도 형제간에도 불편한 게 있으면 이번 명절을 통해서 다 털어버리고 용서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용서만이 진실한 그리스도의 삶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언어생활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이미 앞부분에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이 날마다의 삶에서 점수를 매겨봤으면 좋겠어요. 여러분이 하루를 살아가면서 많은 말을 합니다. 덕을 세우는 말, 사랑의 말, 격려의 말, 진실한말을 할 때마다 여러분의 통장에 만원이라고 쓰세요. 만원. 플러스 만원. 그런데 내가 오늘 돌아보니까 또 오늘 내가 누구 험담도 좀 했어. 그럼 마이너스 오 천원. 부정적인 말도 했어 마이너스 오 천원 하세요. 계산해내겠죠. 좋은 말 할 때는 만원씩 플러스. 안 좋은 말을 할 때, 더러운 말을 할 때에는 오 천원씩 마이너스. 하루 지나고 나서 결산을 해보면 내가 오늘 흑자인생인가 적자인생인가 여러분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옆에 분들한테 물어보세요. "적자인생입니까 흑자인생입니까?" 시작 "적자인생입니까 흑자인생입니까?"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 가능하면 오늘 성경에 말씀하시는 선한 말, 격려의 말, 진실한 말 아름다운 말, 사랑의 말을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흑자인생의 삶을 사실 겁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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