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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눅 20: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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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눅 20:19-26)
 
12대를 이어온 만석꾼 경주 최 부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최부자집은 부자이면서도 존경 받은 집안이었습니다. 이 집안에 전해져오는 가훈은 참다운 선비나 부자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흉년에는 땅을 사지 않는다. 파장 때는 물건을 사지 않는다. 1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한다.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한다. 주변 100리에는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한다. 벼슬은 진사 이상 하지 않는다. 며느리는 시집오면 3년 동안 무명옷만 입는다. 보릿고개 때는 쌀밥을 먹지 않고 은수저를 사용하지 않는다.” 

부자 3대를 못 간다는데 12대를 이어온 것도 대단하지만 마지막 부자인 최준 옹도 식민 치하에서 일제에 협조하지 않기 위하여 재산을 모두 독립자금으로 내놓아 12대를 이어 온 부자의 삶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들은 부를 취하되 부의 노예가 되지 않고 부자라면 주변의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하였습니다. 이런 정신은 성경적인 재물관과 잘 어울립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은 누구의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가지고 있으니 내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쯤은 얼마든지 뒤로 미루어도 괜찮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에 대하여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면 아무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 취하시는 자도 하나님이라고 욥은 고백했습니다. 무엇이‘하나님의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하나님의 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말세를 사는 성도들이 가져야할 바른 청지기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백성을 두려워한 지도자들(19절)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을 보면 낮에는 주로 성전에서 밤에는 주로 감람산에서 보내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러 아침 일찍 성전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대하는 사람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즐겨 들었던 백성들과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된 유대인 지도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환호와 적개심, 인기와 시기의 상반된 분위기에서도 말세를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자세에 관한 귀중한 교훈을 제공하십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의 존재는 여간 껄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성전 사용과 성전 관리를 중심으로 온갖 기득권과 이권을 챙겨왔던 그들은 예수님이 무슨 권세로 성전에서 이런 일을 행하는지 물어 보았다가 예수님의 역공세에 밀려 말 한마디 못하고 물러섰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포도원 주인이 타국에 가며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소출을 바치게 합니다. 농부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핍박해 내쫓습니다. 주인이 아들을 보내자 이번에는 아예 포도원을 가로채려고 아들을 죽입니다. 그 일을 인하여 농부들은 주인이 올 때 진멸을 당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하신 비유가 자기들을 겨냥한 것임을 알고 서기관과 대제사장들은 분노하며 예수님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주위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는 무리들을 두려워하여 함부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말씀을 깨달았으면 즉시 회개해야 하는데 도리어 예수님을 잡고자 한 것은, 그들이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보다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을 책잡으려는 자들(20-21절)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20절)

유대인 지도자들은 다시 머리를 맞대고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까 궁리합니다. 이번에는 자신들이 직접 예수님에게 손을 대는 것보다는 로마 총독에게 넘기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하고 예수님을 고소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를 찾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선량한 청중으로 위장하여 예수님에게 보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병행기록은 이 정탐꾼들의 정체를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로 밝힙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자기들만이 가장 잘 믿는 것으로 자부하는 그룹으로 예수님 당시에 약 6000명가량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헤롯당은 헤롯 가문이 유대 지역에서 계속 권력을 잡기 위하여 로마 관리들과 교분을 가지는 그룹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평소에는 부정한 사람들로 취급하던 헤롯당 사람들조차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목적을 이루고자 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선생님을 보니 아주 진실한 분이시고 사람들의 인기나 평가에 신경을 쓰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선생님은 사람의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본색을 감추고 마음에도 없는 찬사를 하는 것은 예수님을 책잡기 위함입니다. ‘책잡는다’는 뜻의 헬라말 ‘아그류오’는 방심하는 틈을 타서 잘못된 말을 하게 하려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도’ 즉 진리를 말하는 율법의 참된 교사라고 부추김으로써 은근히 세금 내는 것에 반대를 하도록 유인을 합니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22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이 질문을 만들면서 드디어 예수를 함정에 빠뜨릴 절호의 질문을 준비했다고 하며 내심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 질문은 yes 또는 no 어느 쪽으로 대답해도 함정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했다면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는 유대 백성들에게 예수는 민족의 반역자라고 선동하며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할 것입니다. 만일 로마 황제에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했다면 이것이야 말로 지도자들이 원하는 대답입니다. 그러면 바로 로마 당국에 고소하여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제거하도록 할 것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25절)

서기관과 대제사장과 그들의 앞잡이는 사단의 하수인들입니다. 거짓, 위선, 음모가 그들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빛이시기에 그분 앞에서는 어둠이 드러납니다.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불꽃같은 눈으로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은 그들의 간교한 속셈을 아시고 지혜롭게 대답하십니다. 이번에도 랍비들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 나가십니다. 질문에 직접 대답을 하시기보다는 다시 질문을 던지십니다. 예수님은 데나리온 하나를 보여 달라고 하시면서 그 은전 위에 새겨진 형상과 글이 누구 것인지 물으십니다. 그들은 주저 없이 황제의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때 주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Tiberius가 황제로 있었기에 은으로 만든 데나리온 앞면에는 티베리우스의 얼굴 그림과 함께“티베리우스 시이저, 신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황제의 어머니인 리비아가 올림피아의 홀을 쥐고 왼손에는 감람나무 가지를 들고 신들의 보좌에 앉아 하늘의 평화를 주는 인물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 주화는 그의 지배하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황제를 신으로 섬길 것을 요구합니다. 이 주화는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로마의 경제적 수탈과 정치적 압제와 종교적 우상숭배를 상징하는 것이기에 유대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황제의 형상이 새겨진 은전은 로마황제에게 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로마 당국에서 볼 때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다음 말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라." 헬라 원어를 보면 ‘가이사에게’와 ‘하나님의 것’ 사이에 ‘kai’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kai’는‘그리고’라는 뜻도 있고 ‘그러나’라는 뜻도 있습니다. 문맥으로 볼 때 ‘그리고’ 보다는 ‘그러나’ 로 번역하는 것이 낫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 구절은 정치와 같은 세속적인 영역은 가이사에게 돌리고, 교회는 영적인 일에만 집중하라면서 정교분리를 주장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정치적 권위를 부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통치 하에서도 하나님이 섭리하고 계심을 암시합니다.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하니라.” (26절)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그의 예상치 않았던 답변에 깜짝 놀랍니다. 예수님의 말로 꼬투리를 잡으려던 그들은 예수님을 책잡는데 실패하였고 잠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본문 후에도 예수님은 사두개인들과 부활논쟁, 율법사와 율법논쟁을 벌이지만 그때마다 지혜롭게 답변하심으로 그들의 계교를 물리치심으로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고 마가는 적고 있습니다. 연이은 논쟁을 통하여 예수님이 가지신 탁월한 지혜와 그가 가진 신적 권위 그리고 예수의 주 되심을 잘 드러납니다. 우리의 신앙을 흔들리게 하고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것들이 많은 험한 세상을 살면서 비둘기 같이 순결하고 뱀같이 지혜롭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대처해야 합니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형상(icon)이라는 말은 창세기 1:26-27에 나오는 형상(image)과 같은 말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물론 심지어 로마 황제까지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사건의 맥락에서 본다면 예수님은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옳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근거는 데나리온에 새겨진 글과 상이 황제의 것이라는데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처하면서 어쩔 수 없이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고 황제의 이름이 들어 있는 데나리온을 사용할 수밖에 없고 때로는 헌금으로까지 바쳐야 한다면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옳다는 것입니다. 세금을 바치는 책임을 정당화하는 예수님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황제의 힘과 영향력을 막지 못한 유대인 지도부, 그리고 그들의 조상에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 하나님께 속하는 부분이 있음을 지적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제대로 분별하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릴 줄 알아야 합니다. 가이사의 것은 하나님의 것 안에서 이해되어야 할 상대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사회나 국가에 대한 의무를 감당해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의무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미 시작되었고 재림 때에 완성되므로 믿는 자들은 영적 잠에서 깨어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말세를 사는 성도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주인으로 섬기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음과 동시에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소유권을 하나님께 넘겨드렸다는 분명한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현재 사용하고 누리고 있지만 나의 가진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가 삶의 주인인양 행세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가지고 섬김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거두어 하나님께 보여드려야 합니다.

여기에서 청지기의 개념이 나옵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것을 주인의 뜻대로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과 보디발의 집에서 총무의 역할을 감당했던 요셉이 훌륭한 청지기의 예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몸, 시간, 재물, 은사 등을 잘 관리하는 청지기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관리하다가 하나님이 쓰시겠다 할 때 언제든지 내어드릴 자세를 갖춘 사람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청지기가 됩니다. 

그런데 청지기의 삶에는 많은 유혹이 따릅니다. 청지기가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나태’와 ‘교만’입니다. 주인이 없는 자리에서도 주인이 있는 듯이 생활하는 성실함을 보여야 하고, 쾌락과 부당한 소득에 대한 끊임없는 유혹 속에서도 주인의 것을 자신의 것인 것처럼 사용하고 누리고 싶은 교만의 유혹을 뿌리쳐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삶을 쾌락에 몰두하며 맡겨진 시간과 재능, 물질을 낭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청지기로서 우리의 자세를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재림의 준비를 당부하신 것은 이제 제자들을 떠날 시간이 다가오고, 또한 다시 오실 날이 멀지 않음을 깨우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항상 성실하게 준비하고 예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이 미래에 대한 소망과 영광의 기쁨을 주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긴장 속에서 성실하게 살도록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청지기의 직분을 제대로 감당하는지 세 가지 분야만 살펴봅니다. 

1) 물질의 청지기

재물은 사람에게 꼭 필요합니다. 재물을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재물은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도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재물은 사람에게 치명적인 위험이 되기도 합니다. 재물이 삶에 유익이 되기에 재물을 의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재물을 사랑하고 섬기면 재물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런데 재물을 허비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사용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성경은 재물을 얻는 것에 대해서는 많이 가르치지 않고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많이 가르칩니다. 재물을 얻는 것은 본능적으로 열심히 하지만 재물을 사용하는 것은 잘 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재물을 사용하는 올바른 동기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이웃이 유익을 얻는 데 있습니다. 

“교회 가니까 돈 이야기만 하더라” 하는 비판의 소리가 있습니다. 헌신자가 그런 이야기를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캘빈은 “우리의 문제는 교회에서 돈에 대해 너무 많이 이야기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해서 바르게 이야기하지 않는 것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존 웨슬리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회개를 믿을 수 없다.” 돈의 쓰임새야말로 우리의 인생관, 가치관을 대변해주는 삶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1장에 기록된 과부의 헌금 스토리는 어떤 것이 바른 헌금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부자들은 풍족함 중에서 헌금을 했으나, 가난한 과부는 빈곤한 가운데서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습니다. 예수님을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헌금을 넣었다고 칭찬하신 것은 재물을 얼마나 많이 사용했느냐 보나 얼마나 희생적으로 사용했느냐를 더 중요하다고 보셨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액수를 넣었느냐가 아니라 헌금을 하고 얼마나 남았느냐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드리는 자의 마음과 정성을 살피셨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적게 남겨야 올바른 재물사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재물관은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로서의 의식입니다. 그것은 만유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차원이기도 하고,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재물을 소유하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이 맡겨 주신 재물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십일조 할 때 세금 떼기 전의 십일조인가 아니면 세금 떼고 난 후의 십일조인가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물어보는 저의가 무엇입니까? 십일조를 내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십일조를 드릴 것을 명합니다. 율법은 은혜의 복음이 오기까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도 십일조를 내라는 말이 있습니까? 

눅 11: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예수님은 율법에 규정된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실천하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저것도 버리지 말지니라’ 즉 십일조도 드리라고 하십니다. 

십일조는 중직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규정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이 당연히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수입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여 나머지 아홉은 내 것이니 내 마음대로 쓰겠다는 생각을 해서도 안 됩니다. 내가 가진 물질 전부 하나님의 것인데 잠시 내게 관리하라고 맡겨 주셨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필요하실 때,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가진 물질을 언제든지 돌려드릴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물질의 청지기가 됩니다.

2) 시간의 청지기

오늘이 나의 인생의 마지막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오늘이라도 주님이 오실 수 있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주어진 시간에 주어진 물질을 가지고 주님을 위하여 사는 충성된 청지기로 살아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개같이 살다가 오늘 나의 생애가 끝나면 나는 개가 됩니다. 

지금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매사에 임해야 합니다. 구약 시대 물질이 최소 기준은 십일조(1/10은 하나님께)입니다. 그런데 시간의 기준은 안식일(1/7은 하나님께)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하였지만,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엿새 동안 일하는 것으로 부족하여 주일에도 일하겠다고 합니다. 또는 엿새 동안 일하느라 못 놀았으니 주일에 놀겠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주님과 상관없이 주일을 지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일은 주님의 날이라 하여 거룩하게 지키고 나머지 엿새는 내 것이니 내 마음대로 쓰겠다는 생각을 해서도 안 됩니다. 내가 가진 시간은 전부 하나님의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Sunday Christian이 아니라 everyday Christian이 되어야 합니다. 

시간의 궁극적인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주어진 시간을 쓰지만 주께서 쓰겠다고 하실 때 내어 드릴 자세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언제부터 드려야 합니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할 때 ‘바치라’는 과거명령형입니다. 지금 당장 바치라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부터 천국 백성으로 살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종말론적인 시간관을 가진 자의 자세입니다. 시간의 청지기 노릇을 바로 해야 합니다.

지금은 영원과 이어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산다면 지금 내 생명이 끝나도 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습니다. 따라서 주어진 시간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데에 거룩하게 사용할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성수주일을 제대로 할 뿐 아니라 주신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주님의 뜻대로 지혜롭게 사용하는 시간의 청지기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시간의 청지기가 됩니다.

3) 말의 청지기

성경은 말을 입술의 열매라고 합니다.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곧 그의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잠 18:20). 

“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더니 복이 그를 멀리 떠났으며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 같이 그의 몸속으로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의 뼈 속으로 들어갔나이다.”(시 109:17-18). 

하나님은 입술의 열매를 짓는 분이시요(사 57:19), 당신의 귀에 들린 대로 행하시는 분입니다. 정탐꾼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했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민 14:2) 

사실은 살고 싶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서 엎드러질 것이라”(민 14:28) 광야 제 1세대는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 순수하지 못한 동기로 말하거나, 다른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하여 거짓말하지는 않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뼈 있는 말, 가시 돋친 말, 부풀리는 말, 남을 무시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거짓을 버리고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해야 합니다(엡 4:25). 누구를 해치기 위하여 거짓말을 하거나 행동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갖추어져야 합니다. 

시 19:14“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섬길 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말의 청지기가 됩니다.

눅 12:42,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하며 주님은 지금도 주님의 마음에 합한 청지기를 찾으십니다. 열매를 요구하시는 주님을 믿으며 종말론적인 신앙관을 가진 물질의 청지기, 시간의 청지기, 말의 청지기가 되어 내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것을 믿음으로 잘 관리하며, 주님께서 원하실 때 언제든지 드릴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합니다.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순종과 헌신의 삶을 통하여 이 귀한 은혜에 동참하시고 나누시고 보여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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