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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요 4: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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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요 4:23-24)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일주일에 여러 차례 예배를 드립니다. 주일예배, 수요예배, 새벽예배, 금요도고기도 예배, 목장예배. 예배를 많이 드리다보면 타성에 젖어 예배를 드릴 수도 있고, 예배는 성도들이 모이면 한번은 해야 하는 의례 정도로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계신 분들은 어떤 자세로 예배를 드립니까?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나와 은혜를 사모하여 기도합니까? 예배 시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감동 없이 찬양을 부르지 않습니까? 설교를 들으면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거나 주보에 낙서를 하면서 다른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까? 주중에 말씀 묵상을 하십니까? 예배에 대한 태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예배를 원하실까요?

지난봄에‘목회와 신학’ 잡지를 읽었는데 마침 주제가 예배였습니다. 그중에서도 이유정 목사님이 쓴 칼럼이 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인터넷으로 수소문하여 그분이 쓴 책 “예배 성공의 7가지 법칙”을 구입하였습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온 교우들이 이 내용을 숙지하여 삶에 적용할 때 예배가 더 upgrade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원래 이 책은 40일 훈련교재로 만들어졌는데, 그것을 7주간의 설교로 바꾸어 보았습니다. 설교 듣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예배의 원리들을 각자에게 잘 적용하면서 팔로마 교우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자들이 되는 것이 목사의 간절한 바람입니다. 앞으로 7주 동안 예배에 관한 설교를 할 텐데 오늘 설교는 서론에 해당됩니다. 이번 기회에 모든 교우들이 주님의 마음에 합한 믿음의 사람들, 특히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기본이 중요합니다. 모든 운동은 기본에 충실할 때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집니다. 예배가 신앙의 본질이요 기본입니다. 특히 회중예배는 성도의 영적 성숙을 위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신앙행위입니다. 회중은 예배를 통해 양육되고, 성령의 감화를 입어 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자주 예배를 드리다보면 새로움이나 긴장감이 없이 타성에 젖기 쉽습니다. 그러다 보면 10년 교회를 다녀도 삶의 변화가 없는 성도가 있게 마련입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지 못하고 영적인 힘을 공급받지 못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삶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어려움에 시달리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거나, 여전히 안정되지 않은 이민자의 삶을 살다가 교회에 찾아왔는데 예배를 드려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채 성전 뜰만 밟고 다시 세상으로 힘없이 돌아간다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모든 성도는 예배자입니다. 예배의 선수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배의 선수로 뛰어야 할 회중이 수동적 관객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유일한 관객이신 하나님의 자리를 회중이 차지하고 찬양이 어땠느니, 설교가 어땠느니 하며 예배를 평가하고 비판하는 역할을 하려 합니다. 

이번 예배 캠페인을 통하여 관객의 자리에서 잠자고 있는 회중을 선수의 위치로 복귀시키기 위한 실제적인 전략을 함께 살펴봅니다. 언급될 예배의 법칙은 크리스천이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예배의 보편적 원리입니다. 기대감, 드림, 반응, 경외, 친밀, 영과 진리, 그리고 순종입니다. 이 원리들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알지만 너무 오랫동안 무시하던 것들입니다. 이 원리들은 주일의 회중예배와 주중의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줍니다. 이 원리들을 일주일 예배 사이클에 적용할 때 영적성장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려면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군사로 모집된 자가 자기 편한 대로 훈련을 받으면 그 군대는 오합지졸이 되고 맙니다. 왜 예배를 훈련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예배자를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하) 

우리가 무엇을 찾을 때는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결코 쓸데없는 것을 찾지 않으십니다. 틀림없이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예배자인 우리를 찾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예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외에 관심을 끄는 것들이 있습니까? 돈을 예배하거나, 명예를 예배하거나, 세상에 좋아 보이는 것들을 예배합니까? 모르는 사이에 우리에게 배어있는 잘못된 예배습관으로부터 회복되려면 훈련이 필요합니다. 

군대에서 군기를 잡고 혹독한 훈련을 하는 까닭은 사회에서 체질화된 생활방식으로는 도저히 군 생활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병훈련을 통과해야만 정식 군인으로 거듭납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속적인 삶에 젖어있던 우리의 가치관과 생활방식은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에는 부적절한 상태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될 때부터 시작한 신앙행위 중의 하나가 매 주일 교회당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그렇게 시작된 예배는 기초도 제대로 익히지 않고 반복되어 평생 예배습관으로 굳어버립니다. 주변을 보면 은사는 탁월한데 사역의 실패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삶을 성령의 통제에 굴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 훈련이 세상 훈련과 다른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많이 배우려 하기보다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예배야말로 철저한 성령의 사역입니다. 진정한 예배의 지휘자는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는 훈련의 key는 내가 주인 노릇하던 삶의 습관을 성령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배에 참석할 때마다 내 무대가 아닌 성령의 주 무대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예배에 마음을 집중하고, 시간을 투자하고 삶을 희생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동안 잘못 형성된 예배습관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예배습관으로 바뀌게 됩니다.

예배 훈련과정의 목표

1) 예배의 본질을 꿰뚫는 안목을 가집니다

바울은 예배와 삶을 하나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성도의 삶은 예배자의 삶입니다.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을 만나고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와 삶을 연결시키는 성경적인 원리입니다. 

바울은 ‘너희 몸’ 즉 삶 전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우선순위는 있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그때 예수께서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율법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이 율법을 십자가에서 완성하셨습니다. 우선순위는 ‘하나님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에 예배의 본질이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 없이 이웃 사랑도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의 힘을 공급받지 않고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예배가 죽었을 때 그 외의 봉사와 교육, 훈련과 교제는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예배가 살아나면 모든 것이 살아납니다.


2) 삶이 변화되는 예배를 경험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만남이요, 만남에서 그치지 않고 사귐으로 이어집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분의 완전한 성품에 부패한 자아가 노출될 때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고 정결케 됩니다. 구약의 제사는 항상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습니다. 그 임재가 너무 강력해서 때로는 제사 드리는 중에 범한 죄로 제사장이 그 자리에서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약의 예배는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임재와는 상관없는 부족한 예배처럼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약의 예배에서 놀라운 영적 역사가 일어납니다. 귀가 열리고, 죄 사함 받고, 올무에서 해방되고, 상한 마음이 치유되며, 앉은뱅이가 일어나며, 눈먼 자가 눈을 뜨고, 병든 자가 낫고, 죄로 물든 지각이 천국의 지혜로 변화됩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렸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비극입니다. 물론 변화가 예배의 목적은 아닙니다. 예배의 결과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예배의 진정성은 그 결과를 통해 드러납니다. 유기체의 본질은 생명이고 생명이 있으면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성장이 없고 변화가 없다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예배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흐릅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 우리의 인생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3) 예배의 원리들을 몸에 배도록 훈련합니다.

‘나쁜 반복은 나쁜 기적을 낳고 좋은 반복은 좋은 기적을 낳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22장에 나오는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은 나쁜 반복의 모델입니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어떻습니까?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렘 22:21) 여호야김은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의 인생은 비참한 결말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좋은 반복은 좋은 기적을 낳습니다. 

워싱턴에 있는 어느 교회 2부 찬양대에서 매주일 아침 연습 시작하기 전에 15분씩 QT 나눔을 시작했습니다. 1명씩 돌아가면서 한 주간 동안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 깨달은 말씀을 발표했습니다. 처음에는 왜 이런 것을 하느냐고 불만을 내비치고 시큰둥하던 대원들도 차츰 나눔이 구체화되면서 도리어 그 시간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봉사하면서도 서로 영적 교제가 없었는데 점차 그 벽이 허물어졌습니다. 불과 6개월도 되지 안 되어서 찬양대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영적인 하나 됨이 느껴졌습니다. 영적 분위기가 바뀌니까 예배 때 찬양이 바뀌었습니다. 찬양이 은혜로워지니 예배가 살아났습니다. 예배가 달라졌다는 소문이 나면서 2부와 3부 예배 출석수가 역전되었습니다. 단 15분의 반복이 예배를 바꾸었습니다. 

영적 훈련의 이면에는 반복의 원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생활은 반복되는 습관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눅 22:39) 우리는 믿음의 선배들로부터 성수주일이라는 귀한 유산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그 정신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성수주일의 가치보다는 ‘주일예배에 빠지면 벌 받는다’는 정죄감과 율법적 의무 정도로 전락했습니다. 최근에는 그 의무마저 사라지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볼 일이 있으면 주일예배는 얼마든지 빠질 수 있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성수주일이라는 아름다운 유산을 이어받으며 일주일 사이클의 반복되는 예배 원리를 삶에 적용하여 영성훈련의 차원으로 끌어올릴 때 그 시너지 효과는 대단한 것입니다.

예배는 인생의 기적을 낳는 보물이 됩니다.


*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는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1) 자격: 하나님의 자녀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예배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신 유일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의 자격은 한 가지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도를 닦거나 선한 행위를 많이 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2) 신분: 왕 같은 제사장

중세 시대 예배는 평신도와 성직자의 이중적 계급 구조를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즉 평신도가 알아들을 수 없도록 라틴어 성경이 사용되었고, 찬양도 사제들이 도맡아 했습니다. 평신도에게 예배는 그 의미도, 내용도 모르는 ‘신비스러운 사건’에 불과하였습니다. 평신도들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제들이 예배 집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당시 개혁자들이 부르짖었던 모토중의 하나가 “예배를 회중에게 돌려주자”였습니다. 

이 운동은 불같이 일어나 전 유럽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갔습니다. 회중은 비로소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자국어 성경을 사용할 수 있었고, 함께 찬송을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평신도의 진정한 신분인 ‘만인제사장직’이 회복되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일대일로 만나고 예배할 수 있는 제사장직에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개혁자들의 아름다운 정신은 불과 몇 세기도 되지 않아 희석되었습니다. 예배는 단순히 말씀 듣는 일이 되었고, 대부분의 성도의 역할은 축소되었습니다. 예배에는 구경꾼들이 넘쳐납니다. 우리는 격하된 평신도의 지위를 왕 같은 제사장 직으로 격상시킨 종교개혁의 혁명적 기치를 보다 구체적으로 예배에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자격이 있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다면 그 특권을 마음껏 누려야 합니다.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3) 자세: 영과 진리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이 서로 적대관계에 있었습니다. 예배 장소에 대해서도 입장이 달랐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던 시온 산에 예루살렘 성전을 지어놓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가 율법을 가르치고 언약을 갱신하던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서로 자기들의 예배가 진짜라고 우겼습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어느 쪽이 진짜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누가 드리는 예배를 받으십니까?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제사, 시내산의 언약을 온전케 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1) 지

금까지 드렸던 예배는 장소적이었습니다. 정해진 성전에 가야만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 장소를 벗어난 예배는 무의미했습니다. 그리고 제물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배자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그 제사를 진정하고 참된 제사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한다는 것은 바로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명제입니다. 여기서 영에 관사가 없이 쓰였기에 ‘성령’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약하고 썩고 부패할 보이는 땅의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생명과 능력과 진리의 보이지 않는 영 즉 초월자임을 의미합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땅의 성전의 실체이자 하늘의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이 오셨으므로, 이제는 영의 세계에서 참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언급되는‘영’도 성령을 지칭하기보다 영-육 대비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의 영은 육체가 소멸된 후에도 남아 있는 부분입니다. 참된 예배는 몸만 드리거나 물질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함께 드려야 합니다. ‘진리’라는 말은 진짜, 그림자가 아닌 실체를 가리킵니다. 

그동안 드려졌던 예배는 예수님께서 종말에 가지고 오는 하나님에 대한 실체적 예배에 대한 그림자요 모조품에 불과합니다.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은 진실 되게 예배드려야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성경말씀에 계시된 진리와 일치하게 행하면서 예배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진리 중의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따라 예배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참된 예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 가운데 그분과 교통하며,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예배해야 합니다. 참된 예배는 인격자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예배를 잘 드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예배를 드렸음을 의미합니다. 예배드릴 때마다 하나님을 높이고 진정한 기쁨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의 대상을 바로 알고 성령과 말씀이 충만한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 사이클 모델

기독교의 핵심적인 신앙행위인 예배는 1주일 단위로 반복됩니다. 매주 반복되는 예배를 우리 자신의 영적 성장의 핵심 동력으로 삼아야 합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를 중심으로 움직였습니다. 성막을 중심으로 12지파의 위치가 존재했습니다. 예배가 한 나라의 중심이었고, 백성의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그 예배를 중심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졌습니다. 신약 시대에 이 개념이 확장되었습니다. 제사와 성막, 성전의 제한적 장소 개념을 초월해서 영과 진리의 예배와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중요해졌습니다. 삶이 예배요 예배가 곧 삶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여전히 일주일에 하루를 따로 떼어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이를 회중예배라고 합니다. 안식일에서 주일로 바뀌기는 했지만 여전히 일주일 중 하루를 쉬고 정기적으로 모여 드리는 예배는 천상에서 함께 예배를 드릴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삶으로 드리는 개인 예배와 주일에 함께 모여서 믿음의 지체들과 드리는 공동체 예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를 머리로 한 지체들이 함께 드리는 예배의 현장에는 하나님의 임재, 성령의 감동, 은혜로운 말씀의 선포, 회중 찬양의 능력, 교우들과의 친밀한 교제 등 혼자 있을 때 경험할 수 없는 강력한 예배 파장이 일어납니다.

주일예배가 바로 일주일의 초점이자 목표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거꾸로 삽니다. 그들에게 주말은 5일 동안 열심히 일하면서 생긴 스트레스에 대한 보상으로 누려야 하는 여가일 뿐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나 예배드림에 대한 설렘이 없습니다. 토요일까지 그 에너지를 소비하며 겨우 견디어 내다가 주일은 단지 다 쓴 기름을 재충전하는 날에 불과합니다. 

주일 예배는 삶의 필요를 채우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소극적 예배 사이클 모델’입니다. 이런 삶을 살 때 신앙의 영적 성장 정도는 전반적으로 하향 곡선을 이루거나 기껏해야 현상유지에 급급합니다. 그나마 주일 예배를 통해 은혜의 강에 잠시 발을 담갔던 그 물기마저 세상에 나가 며칠 만에 메말라 버립니다. 영적 전투는커녕 생존을 위해 버둥거리는 패잔병이 되고 맙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일예배에 대해 무의식중에 갖고 있는 잘못된 패러다임입니다. 

반면에 적극적 예배 사이클 모델에서는 주일이 영적인 사이클의 클라이맥스가 됩니다. 월요일부터 주일을 준비하며 주일을 향해 나아갑니다. 매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면서 2000년 전에 마귀를 꺾고 세상 권세를 십자가 앞에 굴복시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통치권을 위임받습니다. 주일예배 자리는 하나님 보좌 앞에 승리를 자축하는 축제의 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나비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 베이징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다음 달 뉴욕에서 폭풍을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이론입니다. 나비 날갯짓 정도의 가벼운 움직임이 그렇게 큰 결과를 가져온다면 예배행위는 이에 비할 수 없는 놀라운 효과를 낳지 않겠습니까? 월요일 아침에 하나님께 드린 아주 작은 개인 예배가 7일 후인 주일에 강력한 영적 폭풍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 예배 속에서 작지만 왠지 모를 진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합니다. 이 예배 경험 때문에 6개월 후, 아니 1년 후 그 사람의 삶에 영적인 폭풍이 일어나고 인생에 혁명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적극적 예배 모델로 일주일을 살 경우 신앙은 한 주 한 주 지날수록 성장곡선을 그리게 됩니다. 영적인 상태는 놀라울 만큼 성숙해질 것입니다. 

“예배 성공의 7가지 법칙”은 예배가 삶이요 삶이 예배인 성도의 삶을 일주일이라는 크리스천 라이프 사이클과 접목시킨 예배의 원리입니다. 주일 회중예배와 삶으로 드리는 주중예배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더 이상 수동적 관객으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회중이 예배의 선수가 되었을 때 목회자와 회중은 최고의 동역자가 될 것입니다. 이 원리 하나하나를 신앙의 습관으로 만들 때 우리의 인생에 변화가 시작될 것입니다. 교회의 분위기가 바뀔 것입니다. 가정은 물론 그가 일하는 직장과 사회에 거룩한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삶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예배 사이클의 이번 기회에 저희 모두에게 적용하기 원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예배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다는 긴장감이 있어야 합니다. 이 영적 긴장감을 성경은 ‘깨어 있다’로 표현합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골 4:2)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이 영적인 긴장감은 우리의 영적 근육을 단련합니다. 영적 근육은 반복되는 영적 습관에 의해 형성됩니다. 영의 양식인 말씀을 늘 가까이 하지 않고, 영의 호흡인 기도생활을 게을리 할 때, 영적 근육은 허약하게 됩니다. 예배를 소홀히 하면 영적 샘의 근원이 막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올 때마다 우리 중심을 바로 내놓아야 합니다. 그분 앞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바라는 마음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온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죄 용서받는 기쁨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십니다. 우리 모두 거룩한 예배 습관을 회복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 16:9)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그런 자를 만나주시고 위로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나를 알고 주님을 알고 주님 앞에 참된 예배자가 되어 삶 전체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를 드릴 뿐 아니라 삶의 열매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증인의 삶의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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