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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탐욕의 길 (약 1:14-15)

첨부 1


탐욕의 길 (약 1:14-15)


할렐루야!
평안하셨습니까?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행복의 역설(逆說)

숫자를 좋아하는 외국 사람들은 
행복을 공식으로 만들었습니다.
미국의 철학자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는 
‘행복은 성취 나누기 욕망’(행복=성취÷욕망)이라고 했습니다. 
즉 행복하기 위해서는 성취를 크게 하든가, 
아니면 욕망을 줄이든가 하라는 의미입니다.
<서울경제신문, 2012. 09. 02. 기사 참조>

사람들은 더 많이 가지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부유한 생활을 하면 행복해질까요?

최근 전 세계 151개국을 대상으로 한 
국가별 행복지수 조사에서는 
중남미의 ‘코스타리카’가 1위
동남아의 ‘베트남’이 2위를 차지했습니다. 
국내총생산(GDP) 1위 미국은 105위를 했고,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은 40위권에 그쳤습니다. 
우리나라는 63위를 차지했습니다. 
최근 고도성장으로 세계 경제를 주름잡는 중국은 
종전 20위에서 추락하여 60위로 밀려났습니다. 
반면 1-10위는 모두 경제력이 취약한 나라였습니다. 
<동아일보, 2012. 06. 17 기사 참조>

이것이 바로 ‘행복의 역설’입니다. 
사람들은 더 많이 가지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행복은 
객관적인 조건이나 소득수준과 별개일 때가 많습니다. 
더 많이 가지면 행복할 것이라는 착각은
인간 안에 있는 ‘욕심’이라는 죄의 뿌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욕심에서 탐욕으로

욕심은 무엇을 지나치게 탐내거나 누리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보통 욕심이란 말을 쓸 때는 
때론 긍정적으로, 때론 부정적으로 사용합니다. 

시편 기자도 하나님을 찾으려는 자신의 마음을 
마치 욕심을 부리는 상황에 비유하였습니다.(시42:2; 63:1; 143:6)
또한 다윗은 하나님이 반드시 자신의 소원을
이루실 것에 대해 기대하며 이 단어를 썼습니다. (시37:4; 103:5; 145:19)
신약에서도 욕심을 의미하는 
헬라어 ‘에피뒤미아’는 강한 열망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2장 3절이나 
본문 말씀(약 1:14~15)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새성경사전 & 비전성경사전,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긍정적인 의미의 욕심은 가져야합니다. 
그것은 「열정」과 「열망」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자본주의가 돌아가는 밑바탕에는 
어느 정도 사람의 긍정적인 욕심이 깔려있습니다.
열심히 일해도 결과가/소득이 똑같다면 
누가 계속해서 열심히 하겠습니까?
이처럼 긍정적인 욕심은 사회를 발전시키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죽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이 가르쳐주는 욕심의 가장 큰 특징은 
‘자란다’는 것입니다. 
좋은 의미의 욕심이라도 
그것이 점점 커지게 되면 과하게 되고,
과하게 되면 과한 욕심은 결국 죄를 낳게 되며, 
그 죄가 자라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욕심이 자라다 보면 탐욕이 될 때가 있습니다. 
탐욕은 재물에 대한 멈추지 않는 욕망을 말합니다. 
탐욕의 끝은 결국 재물/돈을 더 가지려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돈은 탐욕을 확실하게 만족시키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전통에서 탐욕은 
교만, 시기, 탐식, 분노, 정욕, 나태와 더불어
‘7가지 대죄’에 속합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 
죄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따지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수도원의 교부들과 중세 교회의 전통에 의하면
7가지 대죄는 다른 죄를 낳는 뿌리(근원)로 여겨졌습니다. 
<신원하 저,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IVP, 2012, p. 15-17.>

그중에 탐욕은 만족을 모르는 인간의 욕망을 나타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남편/아내 다 마음에 드십니까?

<남편감을 파는 백화점이 있었답니다. 
이 백화점에 가면 마음대로 남편감을 골라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 올라가면 다시 내려올 수 없다고 합니다. 
두 처녀가 꿈에 그리던 남편을 사려고 찾았습니다. 
1층에는 직업이 있고 아이들을 좋아하는 남자들이 있었습니다. 
“괜찮군. 1층이 이 정도면 한층 더 올라가 볼 필요가 있겠어.”
2층에는 돈을 잘 벌고 아이들도 좋아하며 
아주 잘 생긴 남자들이 있었습니다. 
“아주 좋아. 더 올라가자.” 
3층에는 돈 잘 벌고 아이를 좋아하고 아주 잘 생겼고 
집안일도 잘 도와주는 남자들이 있었습니다. 
“우와, 여기서 멈출 수 없어.”
4층에는 돈 잘 벌고 아이 좋아하고 잘 생겼고 집안일 도와주고 
아주 로맨틱한 남자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맙소사! 4층이 이 정도면 5층은 상상을 초월하겠지.” 
그러면서 5층으로 올라갔습니다. 
5층의 출입문을 열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나가는 곳’> 

탐욕의 끝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강물이 계속 흘러도 바다는 채워지지 않는 것처럼(전1:7)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
인간의 탐욕은 만족할 줄을 모르며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경마는 말을 경주하게 하여 돈을 받는 게임이 아닙니다. 
말의 고삐를 말합니다. 
어쩌다 남의 말을 타면 걷지 않아서 편합니다.
그런데 말을 계속 타다보면 
남에게 경마(말의고삐)를 잡게 하여 
‘누가 말을 끌어 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요즘 이야기로 바꿔 말하면
‘차 사면, 기사 쓰고 싶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욕심이 한없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탐욕의 자갈길

탐욕에 눈이 어두워진 사람은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발밑에 깔린 것들은 한낱 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탐욕에 눈이 어두워지게 되면
좋아 보여서 … 마음에 쏙 들어서 … 
주머니와 가방에 하나씩 하나씩 자갈을 넣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짐이 되어 걷기 어렵게 됩니다.
편안히 가려면 그 돌들을 버려야만 합니다.

인간의 보기에 보석(寶石) 같아서 
더 많이 가지고 싶어 하지만 
언젠가는 모두 놓고 가야할 자갈에 지나지 않습니다.
탐욕도 그런 것입니다. 
세상 만물 가운데 어느 것도 
인간의 완전한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부유하게 살았던 인물인
록 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1893-1937)가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이 회계를 담당하던 직원에게 물었습니다. 
“고인이 얼마나 남겨두고 가셨던가요?”
회계 직원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가진 것 전부 다 두고 가셨어요.”
<맥스 루케이도, 「짐을 버리고 길을 묻다」>, 
좋은 씨앗, 2002, p.66. 참조>

전도서 5장 15절에 
“그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가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자기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전 5:15) 했습니다.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영원한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잠시 맡겨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잠시 맡아서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리 좋아도 아무리 비싸도 영원히 움켜쥘 수 없습니다. 
결국에는 내려놓아야 하는 자갈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비싼 시계를 차고 계십니까?
시계는 시간이 잘 맞으면 됩니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C로 시작되는 브랜드의 시계는 3천 3백만원이더군요.

얼마 전에 다섯 분의 목사님들과 모임이 있었습니다.
저 포함 여섯 명이 만나서 식사를 했습니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시계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를 제외한 다섯 분은 서로 시계를 보여주면서 
‘이게 얼마짜리고, 누구에게 선물 받았다’는 등의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시계 얘기를 하는 동안 
아무 말 없이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 시계가 어느 브랜드 것인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고신일 목사님은 얼마나 좋은 시계를 차고 계실까’하면서
제 시계가 좋아 보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차고 있던 시계를 풀어서 
‘그럼 우리 바꿉시다’라고 했더니 
좋아 보인다고 하던 분이 ‘혹시 짝퉁 아니야?’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다른 목사님들에게도 ‘바꾸자’고 했더니 
‘아무래도 수상해. 쉽게 바꾸자고 하는 걸 보니 …’하면서
안바꾸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차고 있는 시계가 얼마짜리인지, 
어느 브랜드인지 저는 잘 모릅니다. 

시계는 시간이 잘 맞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계에 조각을 하고, 
금과 다이몬드를 붙이면서 값을 올렸습니다.
여러분이 귀중품이라고 가지고 있는 것들이
정말 없어서는 안될 꼭 필요한 것입니까?

탐욕은 우리의 열정이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향할 때 발생하는 것입니다. 
<폴 스티븐스 & 앨빈 웅, 『일삶구원』, IVP. 2011, p.37. 참조> 

우리의 열정이 하나님을 향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향할 때 탐욕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탐욕에 대해 경고합니다.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은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이나 그의 밭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네 이웃의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신 5:21)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시며 
탐욕이 그 중에 하나라고 하셨습니다.(막7:20-22)
바울은 돈을 사랑하고 탐내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딤전6:10)’, 
‘우상숭배(엡5:5; 골3:5)’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탐욕에 빠진 인물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아간은 여리고성에서 취한 노획물을 빼돌려 
자기 집에 숨기는 죄를 지었고 결국 목숨을 잃었습니다. (수 7:20-26)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아무 것도 남김없이 다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채 
가장 좋은 양과 소를 살려두었습니다. (삼상15:7-9) 
하나님은 그 일로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베드로 앞에서 헌금 일부를 숨기고 
거짓말을 하다가 즉사하였습니다.(행5:1-6)

이외에도 성경 곳곳에는 
탐욕에 관한 경고의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족하며 살기

탐욕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탐욕부리지 않고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탐욕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하고
하나님께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2장 15절에서 예수님은 
"…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눅 12:15) 고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것으로 
우리의 욕심을 채우려는 시도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목마르다고 바닷물을 마시면 
더 목마르게 되고 결국에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느 것으로도 
우리의 탐욕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에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했습니다.

예수님이 수가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셨던 
생명수 같은 말씀이
지금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다음 빈 칸에 여러분은 무엇을 채우겠습니까?

“______________만 있으면(된다면) 더는 소원 없다!”

잠깐 시간을 내서 생각해보세요. 
무엇을 적어 넣으시겠습니까?
저도 설교 준비를 하면서 생각해 봤습니다.
‘돈이 10억, 100억 있으면 행복할까?’
100억이 있어도 모자랍니다. 
천억이 있으면 … 하고 생각했더니 막 흥분되기 시작했습니다. 

‘승진만 하면’, ‘합격만 하면’, 
‘병 낫기만 하면’, ‘복권 맞으면’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가지고는 모자라지요.
정답이 있습니다. 
바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내 편이시면 됩니다.”

어느 날, 목사님께 주보를 하는 인쇄소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주일 예배의 설교제목이 빠졌습니다. 
설교 제목 좀 알려주십시오.”
“아, 그런가요? 제목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입니다.”
인쇄소직원이 한 번 더 확인차 물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거면 됩니까?”
“아, 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주일 아침 예배시간, 찬양대의 찬양을 하는 동안
주보를 확인한 목사님은 순간 깜작 놀랐습니다. 
설교제목이 이렇게 나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그 설교제목을 몇 번 되뇌던 목사님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강단에 선 목사님은 계속 눈물이 나오는 바람에 
설교를 시작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목사님은 몇 번이나 반복해서 외쳤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김운용 저, 『하늘소리 땅의 소리』, 두란노, 2010. 참조>

우리는 살면서 너무 많은 것에 욕심을 내고 
그것에 마음을 빼앗겨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친 채 삽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마음을 두고 계십니까?
아우구스티누스는 
“내 하나님이 아닌 모든 부는 내게 빈곤이다.”
- 아우구스티누스 - 고 말했습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모든 것을/만족이라는 창고를 
채울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것 가지고는 안 돼. 그것만으로는 불안할 거야’
그런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 불안에 떨게 되고
결국 더 가지려고, 더 채우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는데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주어진 조건과 상황에 자족하며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단테의 <신곡>에 보면 탐욕의 죄를 지은 자들은 
모두 땅바닥에 얼굴을 붙인 채 지냅니다. 
세상 살 때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오로지 땅의 것들만 바라보며 살았던 것에 대해 
벌을 받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목자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자족하며 살아야 합니다. 
만족(滿足)과 자족(自足)은 다릅니다. 
‘만족’은 채워져야 족함을 아는 것이고,
‘자족’은 스스로 족함을 깨닫고 족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성경은 만족하라고 하지 않고, 자족하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6~8절을 봅니다. 

“…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딤전 6:6~8)

자족은 감사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복을 세어볼 줄 아는 사람은(찬송가 429장)
자족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달라고 기도하지만 사실 우리 모습 뒤편에 
이미 허락하신 하나님의 축복이 많이 있습니다.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책을 쓴
로날드 사이더(Ronald Sider)는 의식주와 관련된 것을 
‘필수품/있으면 유용한 것/없어도 되는 것/사치품’
4가지로 나눴습니다.
그리고 필수품을 제외한 나머지는 ‘잉여소유물’로 취급했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집에 돌아가서 집 안을 둘러보며 
이 방법대로 분류해보시기 바랍니다. 
① 필수품 (꼭 있어야 하는 것)
② 있으면 유용한 것 (있으면 좋고 없어도 사는 것)
③ 없어도 되는 것 (불필요한 것/너무 많은 여유분)
④ 사치품 (그렇게 좋거나/비싼 것이 아니라도 되는데 
‘멋’으로, ‘보이려고’가지고 있는 것)
이렇게 분류해 보면
우리는 정말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자족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리차드 포스터(Richard Foster)는 
자족하며 감사할 줄 아는 삶을 위해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울 것을 제시했습니다. 
어떤 물건을 구입하기 전에 
‘하나님이 이것을 기뻐하실까?’라고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집이나 자동차, 그 밖의 물건을 살 때
‘그 정도는 구입할 능력이 있어’라는 생각으로 구입한다면
그것은 욕심에 따른 결정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신원하 저,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IVP, 2012, pp.150-151. 참조>

성도 여러분!
웨슬리 목사님 말씀처럼
할 수 있는 한 많이 벌고,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저축하세요.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할 수 있는 대로 나누기 위한 것임을 
기억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잠언 19장 17절에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 19:17)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꾸어 드리는 마음으로 
베풀고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과 남이 가진 것을 비교하지 말고
내가 가진 것 그것에 자족하며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학교에서, 그 밖의 어디서든지 
범사에 감사하면서 행복한 삶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며 
복된 주일 예배 드리며 말씀을 전했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이 얼마나 큰지, 
얼마나 많은지 스스로 깨닫고 감사하며 사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족한 것, 없는 것을 찾지만
우리들이 기도하다가 등 뒤로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수많은 복들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행복한 삶의 주인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에 살며 땀 흘려 얻은 물질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 받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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