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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훈련과 축복 (단 1: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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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훈련과 축복 (단 1:17-21) 

  
이 세상에는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줄 믿고, 인생의 역전을 꿈꾸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함께 하면, 우리 인생은 얼마든지 역전될 수 있다. 따라서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을 만나기를 바란다. 
다니엘(ל󰔞יּ󰗼󰕏)은 어렸을 때, 바벨론으로 끌려왔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세계 여러 나라의 똑똑한 소년들을 포로로 끌고 와서, 자신의 궁중학교에 입학시켜, 3년 동안 집중적으로 훈련시켰다. 자신이 먹는 음식과 포도주를 제공하며, 온갖 특혜를 다 부여했다. 

이렇게 특혜를 준 이유는, 그들을 훈련시켜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다른 포로들은 왕의 음식을 “황공합니다, 감사합니다.”하며, 넓죽넓죽 잘 받아먹었다. 그런데 유독 다니엘과 3친구들만은, 기름진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말했다. 왜 다니엘은 왕의 음식을 거부했나요? 
그 이유는 우상에게 바쳐진, 왕의 음식과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뜻을 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니엘은 궁중학교 총책임자 환관장을 찾아가서, 자신의 뜻을 전했다. 왕의 음식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말했다. 

왕의 음식을 ‘더럽다’고 말하다니, 얼마나 왕을 무시하는 말이다. 따라서 왕명을 거역한 죄요, 왕의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해서, 죽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다니엘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셨다. 그를 불쌍히 여겼다. (10) 그렇지만 환관장은 왕을 두려워했다. 

다니엘이 초췌하게 되면, 자기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고 했다. 그러자 다니엘은 환관장 밑에서, 자신을 감독하는 자를 찾아가, 열흘 동안 기한을 정해놓고, 채소와 물을 제공하면서, 한 번 시험해 보라고 했다(11-13). 그 결과 다니엘과 3친구의 얼굴이, 더 아름다워졌다. 살도 더 윤택해졌다. 

채소와 물이, 왕의 음식과 포도주보다, 건강에 좋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그렇게 해석하면, 안식교회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믿고, 충성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또 6장을 보면,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져져, 죽임 당하는 상황이 된다. 
그러나 하루에 3번씩, 기도하는 일을 계속 하였다. 권력자가 되면, 자신의 안위와 안정을 지키기 위해 타협해야 할 가능성도 많아진다. 그냥 속으로만 기도하고, 하나님께 이해해달라고 기도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인본주의 문화에 물든 우리는, 이 말씀을 보고, ‘꼭 이렇게 해야만 하는가?’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다니엘의 행동을 보고, 하나님이 얼마나 기뻤을까?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지 않기 위해,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다니엘의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하나님이 기뻤을까? 
현대인은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믿음 생활을 하고 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온전한 신앙을 기대할 수 있는가? 학생들은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주일에도 교회가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고3이 되면, 교회에는 1년 동안, 출석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주님을 위해 헌신해야 할 재직들이, 이리 저리 재면서, 옥합을 깨지 않는다. 이런 신앙의 태도를 보이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고, 복을 주실 수 없다. 하나님을 위하여 뜻을 정하는, 위대한 결단이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야 세월을, 낭비하지 않고, 진정한 복을 받을 수 있다. 

1. 하나님이 크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되려면, 믿음의 훈련이 있다(8-16). 

하나님은 어두운 시대마다, 타락한 세대마다, 오합지졸의 군대가 아닌, 한 사람을 사용했다. 인류가 극도로 타락하였을 때, 인류 앞에 의로운 삶을 보여준, 노아를 들어 썼다. 
노예의 속박 속에서 신음하던 민족에게, 자유의 대로를 열어준, 민족의 영웅 모세를, 지도자다운 지도자가 없어 방황하던 백성들 앞에, 소망의 닻줄을 내려준 성군 다윗을, 하나님을 전부 배반하던 시대에, 신앙의 결단을 촉구하며, 회개를 외치며 사라진,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이방 땅에 포로로 끌려가, 절망 가운데 주저앉은 인생들에게, 희망의 불꽃을 지펴준 다니엘을…, 모두가 한 결 같이 칠흑같이 어두운 시대에, 눈부신 광명의 횃불을 들었던 하나님의 한 사람들이다.이처럼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위인들의 생애를 살펴보면, 고난의 공통점이 있다. 
요셉은 17세의 어린 나이에, 형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려가고, 또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다. 모세는 도망자가 되어서, 40년 동안 기나긴 세월을 광야에서, 고독과 싸워야 했다. 골리앗을 무찌른 다윗도, 사울 왕의 칼날을 피해 도망 다녀야 하는 도망자요, 망명객이 되었다. 

물론 이렇게 고난당한 이유는,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런 상황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믿음을 훈련시키려고 고난을 허락하셨다. 바로 이렇게 고통스러운 현장이, 믿음의 훈련장이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을 통해, 믿음의 훈련을 받았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밑에서, 훈련을 받았다. 요셉은 애굽에 종으로 끌려가, 훈련을 받았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라는 고난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는 고난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을 받았다.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서, 사르밧 과부 밑에서 훈련받았다. 본문의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믿음의 훈련 받았다. 이처럼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어려움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믿음의 훈련일 뿐이다. 
믿음의 훈련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은 후에, 세상으로 나가서, 나보다 더 힘들고, 어렵고 고통당하는 자의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해서다. 우리 주변에는 어려운 사람,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많다. 누군가 하나님의 손길이 되어,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한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빛나는 인생을 살기 원하기에, 믿음의 훈련이 필요하다. 하루아침에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 않는다. 하루아침에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 반드시 훈련 과정이 필요하다. 세상과 단절되고, 하나님만 오직 바라보는 훈련장이,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필요하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이후, 이 훈련은 삶의 현장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훈련을 잘 받아, 하나님의 크신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자. 특별히 훈련을 받아야 할 부분은 정직이다. 다니엘은 정직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죽임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다니엘은 하루에 3번씩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 그냥 속으로만 기도하고, 하나님께 이해해달라고 기도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우리 사회에 거짓말이 얼마나 팽배해 있는지 모른다. 
특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맹점은, 지도층이 정직하지 않다는데 있다. 청문회를 보면, 정직이 상실됐다.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갑자기 바보가 된다. 그래서 무엇을 물어보면 “모르겠는 데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요.”라고 은폐한다. 

다윗은 성경에 무려 800회나 등장하는, 성경의 호평을 받는 인물이다. 그를 가리키는 말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행13:22)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다윗에 대해, 하나님이 직접 언급하신 말씀 가운데 “다윗은 정직히 행했다.”(왕상15:5)는 말이, 많이 나온다. 
다윗은 정직한 자였고, 하나님은 정직한 그를 사랑했다. 하나님이 정직한 분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죄를 많이 지었다. 다윗은 멀쩡하게 남편이 있는 아내를 빼앗아, 간음죄를 범하고, 또 죄를 감추기 위해, 살인죄를 저질렀던 악질적인 죄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직한 죄인이었다. 나단 선지자가 와서 “바로 당신이 도적이다.”했을 때,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회개한다. 다윗의 위대성이 여기에 있다. 그는 전혀 변명이 없다. 환경 탓을 늘어놓거나, 구차한 변명을 하지 않았다. 자기 범죄의 원인을 남에게 돌리지 않았다. 
“하나님!, 밝은 대낮에 목욕하는 여자를 보고, 넘어가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누구 때문에’라고 변명하지 않았다. “제가 잘못했다. 하나님 제가 죄인이다.”며, 무릎 꿇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데, 변명이나 핑계가 없어야 한다. 

정직해야 하나님이 불쌍히 보신다. 정직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떠나지 않는다. 잠시 비틀거리고 넘어진다고 해도, 반드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그에게 임해서, 치유하고, 회복시키고, 놀라운 도구로 쓰신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매우 치사한 죄인들이다. 
이 사람 저 사람 걸고넘어지고, 물귀신작전이다. 목장에서 삶을 나눌 때, 정직해야 치료가 있고, 삶이 변화된다. 그러나 정직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정직하면 고난이 따르기 때문이다. 폴리갑이라는 순교자가 있다. 요한의 제자로, 믿는 사람들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도, 굉장히 존경하고 따랐다. 

폴리갑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잡혀서 순교하게 되었을 때, 믿지 않는 지방총독이, “당신이 그리스도를 욕하면, 내가 너를 석방하겠다.” 했다. 그러나 폴리갑은 이렇게 말했다. “85년 동안,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었다. 그동안 그분은 나에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왕을 모독할 수 있는가?”라고 대답하고 순교하게 되었다. 상황에 맞게 슬쩍 거짓말하면, 순교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정직해져야, 순교도 할 수 있는 믿음이 된다! 정직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 

2. 믿음의 훈련을 벗어나라면, 믿음이 성장하면 된다(18). 

“왕이 말한 대로, 그들을 불러들일 기한이 찾으므로, 환관장이 그들을 느부갓네살 앞으로 데리고 가니” 시간이 흘러서, 쓰임 받을 만큼 성장했다는 말이다. 우리는 쓰임 받으려면, 성장하면 된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으려면, 믿음을 키워야 한다. 훈련받는 사람들은, 훈련기간이 짧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훈련은, 주님이 원하는 분량에 이를 때까지 계속된다. 하나님이 원하는 분량에 이르기면, 주님은 또 다른 훈련을 하신다. 

이처럼 인생에는, 시련이 계속되는데, 이는 믿음을 훈련하는 기간이다. 하나님의 훈련은 계속 반복된다. 우리는 시련을 받고 나면,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 한다. 그래서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느긋해 한다. 남의 떡이 커 보이듯이, 남의 고난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남의 말은 쉽게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똑같은 고난을 당하면, 자신의 고통은 다르다고 말한다. 자신의 고통만 크게 보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부족하면, 고통만 크게 보인다. 그러므로 믿음을 키우면, 시련은 끝난다.  아니 시련이, 더 환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고난은 항상 있다. 

고난이 올 때, 2종류로 나누어진다. 고난의 용광로 안에서 타죽는 사람과, 고난의 용광로 속에서 순금같이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욥23:10). 따라서 고난당할 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여, 믿음이 성장하는 사람이 되기 바란다. 믿음의 훈련에는, 기다림의 과목이 있다. 
그러나 기다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요셉은 17세에,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30세까지 기다렸다. 모세는 40세부터 80세까지, 미디안 광야에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다. 이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모든 종들은, 기다림의 훈련을 받았다. 

우리는 기다리는 성품과 훈련이 필요하다. 기다릴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그 때가, 언제인지 모른다. 하나님만 아신다. 따라서 우리는, 그 때까지 기다리며 훈련해야 한다. 어제 씨를 뿌렸는데, 오늘 바로 열매가 되는 과일이 있나요? 

어제 결혼했는데, 오늘 태어나는 아기가 없다. 있다면 속도위반일 뿐이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않으면,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죄인이 하루아침에, 성자로 둔갑되는 일은 없다. 그때까지는 참고 기다리고, 기다리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주님께 우리의 삶을 맡기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하루아침에 좋은 교회가 되는 법은 없다. 김장을 해도 기다려야, 발효하여 숙성하고 맛있게 익는다. 우리는 기다리는 동안, 실력을 키워야 한다. 복음도 실망하지 말고, 전해야 한다. (갈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3. 믿음의 훈련을 통과하면, 축복이 넘친다(17, 19-20). 

다니엘과 3친구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주님만을 섬기겠다는 각오로, 왕이 주는 음식과 포도주를 거절하고, 그 대신 채식과 물을 먹었다. 그리고 3년의 훈련기간이 지났다. 
그러나 다니엘과 3친구는 왕명을 어겼다고, 탄로 나서 처벌받지 않았다. 또 영양 보충이 미비해서 다른 소년들과의 경쟁에서, 이겨낼 수가 없었나요? 아니다. 다니엘과 3친구는 다른 동료들에 비해, 학문에 있어서 더 뛰어났다. 그리고 왕의 사랑을 받고, 높이 들림을 받게 되었다. 

(17)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여기서 중요한 단어로 시작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 뜻을 정하고 노력할 때, 하나님이 이루신다. 

실력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 뜻을 정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욱 노력할 때, 이 세상을 뒤집어엎을 수 있는, 인물이 될 수 있다. 이 모든 일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며,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이들에게 지혜와 지식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 자신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니, 겸손 하라. 

(19-20) “왕이 그들과 말하여 보매, 무리 중에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은 자가 없으므로, 그들을 왕 앞에 서게 하고,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 
이처럼 믿음의 훈련기간을 통과하면, 하나님이 큰 은혜와 복을 주신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뜻을 정했던 다니엘을, 하나님이 놀랍게 복해 주셨다. 그의 삶을 책임져주셨다. (21)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 왕들이 바뀌고, 나라가 바뀌어도, 다니엘은 변함없이, 귀하게 쓰임 받았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가능할 수 있었나? 다니엘과 3친구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에 그랬나요?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죽으라고 공부한다고, 되지 않는다. 죽으라고 공부하면 죽게 된다. 
모든 주권을 가지고 역사하는 하나님이 돕고, 하나님이 지켜주실 때 가능하다. 여러 해 전에, 어떤 호텔 ‘고고 장’에서 큰불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 가운데 장로님의 아들이 죽었는데, 그 장로님은 자신이 죽였다고 고백했다. 그 장로님 아들은, 그 화재로 숯 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장로님의 아들은 고3이 되자, 입시 공부하느라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 된 장로님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임을 깨우쳐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한 수 더 떴다. “대 
학 들어가고 난 다음에, 교회에 열심히 나와도 괜찮으니까, 열심히 공부나 해!”라 했다. 

그렇게 공부했는데, 대학에 떨어졌다. 재수를 하면서, 나쁜 친구들을 사귀고, 술과 담배를 배웠다. 고 
고 장에서, 밤새도록 춤추다가, 화재로 숯 덩어리가 되었다. 우리는 무엇보다 자녀들에게, 믿음을 키워주어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임을 깨우쳐주어야 한다. 

하나님이 건강도 가정도 지켜주고, 생업도 재산도 지켜줘야 한다. 또 다니엘은,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17下). 다니엘에게 그 방면에, 선천적인 재능이 있어서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안 것이 
아니다. 다니엘이 뜻을 정하고 앞장섰기에,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큰 선물을 주었다. 
오늘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기를 바란다. 그 어떤 일들도, 하나님의 영광보다 중요하지 않다. 다니엘과 3친구가, 여호와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고, 하나님 뜻대로 살기 원했을 때, 하 
나님이 존귀하게 여겨주셨다. 심는 대로 거두게 된다. 

내 힘과 내 생각, 내 재주와 내 방법을 의지하려고 하지 말고, 범사에 여호와를 의뢰하자. 그래서 하나 
님께 더욱 귀하게 쓰임 받고, 오랫동안 지속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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