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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는 성례전이다 (고전 11: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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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성례전이다 (고전 11:23-25)


고린도전서 11:23-25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1:14)는 성육신 사건은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위대한 영원이 잡고 만질 수 있는 물질이 되었다는 정말 놀라운 사건입니다. 요한 사도는 요한1서에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말씀합니다. 창조자이시며 우주의 원리 되신 분을 손으로 만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요1:18)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같은 위대한 선지자도 하나님의 뒷모습만 볼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율법이란 것도 실은 천사들이라는 중보의 손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진 것입니다(갈3:19). 2천 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정의로우시고, 사랑이시고,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인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며, 우주를 향하여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계시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자신을 볼 수 있는 기관을 이 땅에 세워 놓고 가셨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것은 모든 능력과 영광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한 몸 된 공동체라는 선언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그것은 그리스도가 몸 된 교회를 통하여 가시화된다는 뜻입니다. 머리이신 예수님은 이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통해서 세상은 예수를 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너희 몸이 성령의 전이다”(고전6:19)는 말씀 또한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없어졌지만 이제는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성만찬과 세례

우리는 계속해서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해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은 교회가 성례전이라는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성례전은 무엇입니까? 성스러운 예전을 가리키는데 대표적으로 세례와 성만찬과 같은 의식을 들 수 있습니다. 성례전은 다음과 같이 정의되고 있습니다. “불가시적 은총의 가시적 형태” 말이 어려운 것 같지만 앞에서 했던 말들과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총이 보이는 형태로 드러나는 예식을 말합니다. 성만찬에서 빵이 대표적입니다. 우리는 성만찬을 나눌 때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빵과 잔을 받습니다. 제과점에서 만든 것 같은 이 빵이 그리스도의 몸이고, 이 빵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뜻입니다. 성만찬은 곧 말씀이 육신이 되는 성육신 사건의 재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곧 잡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성만찬을 행하셨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빵을 들고는 24절의 말씀처럼 “이것은 내 몸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5절에서처럼 포도주가 담긴 잔을 들고는 “이것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같은 의식을 마가복음에서는 “이것은 내 피다”(막14:24)고 말씀하셨습니다. ‘A=B’ 라는 형식의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성만찬의 교리가 나누어집니다. 

가톨릭에서는 사제가 성령의 임재 기도를 드리는 순간 실제 빵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믿고 있습니다. 이와 달리 개혁교회는 ‘~이다’를 ‘~의미한다’로 해석하여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정도의 ‘기념설’을 믿고 있습니다. 루터는 이 중간을 택하여 빵과 포도주가 실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지는 않지만 빵과 포도주 위에 성령의 형태로 그리스도가 임재한다는 공재설을 믿고 있습니다.

성만찬 예식의 무게는 화체설이 가장 무겁고 기념설이 약하며, 공재설은 그 중간 정도라 할 것입니다. 다양한 이론들이 있지만 성만찬은 교회에 가시적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의식입니다. 현대는 많이 약화되었지만 고대교회나 중세교회는 성만찬의 교회라 할 정도로 가장 중요한 예식이었습니다. 

원래는 오늘 23절의 “식후에” 라는 말씀처럼 성만찬은 저녁식사를 겸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예배가 저녁에서 아침으로 옮겨가면서 성찬과 애찬이 구분되기 시작했고, 결국 식사가 빠진 의식으로만 성만찬이 남았습니다. 그러나 의식화 되었기에 그 의미는 더 상징화되고 무게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1세기 말과 2세기 초의 대표적인 교부라 할 수 있는 이그나티우스는 “축사된 빵은 불멸을 주는 약이자 영적 죽음의 해독제”이라 하였습니다.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를 먹으면 몸과 마음에 영생과 건강을 가져다주는 마치 불사의 약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비스런 의식은 아무나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반인들과 함께 하는 말씀의 예배가 끝나면 모두가 퇴장을 하고, 세례를 받고 성결한 생활을 한 사람만이 2부의 성만찬 예식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성만찬의 빵에 대한 믿음은 너무도 커서 사람들은 이 빵을 가져다가 매일 아침 이것을 먹는 일이 관습화되기도 했습니다. 그날 병이나 감옥에 갇혔다든가 하여 여러 가지 사정으로 예배에 참석하지 못한 신도들을 위하여 그 집까지 찾아가서 성만찬의 빵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심방의 기원이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성만찬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권위와 영광과 능력을 그 당시에는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교회는 성만찬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보고 함께 체험하였습니다.

가톨릭은 그래서 지금도 성만찬과 세례를 비롯한 일곱 성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개신교는 믿거나 말씀을 읽거나 기도하는 등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만, 가톨릭은 이런 예식들에 참여하는 객관적인 방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받습니다. 은총의 주입(injection)이라고 하여 우리 몸과 영혼에 마치 은총의 주사를 맞는 것과 같이 표현합니다. 아무래도 의식이라는 면에서는 개신교는 가톨릭이나 동방 정교회를 따라가질 못합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이성과 자기 내면의 세계에 지쳐 이제는 점점 더 외부로부터 오는 권위와 전통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 생각 없이 예배나 의식에 참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은혜 받는 것이 편하지, 내적인 각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나약하고 임의적이고 피곤할 때가 많습니까? 동시에 권위라는 것은 내 안에서보다 밖에서 올 때 더 강력하지 않습니까?

우리 개신교에서는 일곱 성사 중에서 성만찬과 세례만 남았습니다. 세례만 해도 단지 상징으로만 생각할 뿐 믿음의 고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는 세례도 의식 자체가 매우 중요하게 간주되었습니다. 고대나 중세 교회에서는 세례를 통해서 사람들이 이전의 지은 모든 죄를 사함 받고 불멸성을 획득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꾸 세례를 늦게 받으려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지은 죄를 한꺼번에 용서를 받고픈 얄팍한 생각에서입니다.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황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임종 직전에 세례를 받은 이유가 아마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죽기 전에 세례를 받아야 그동안의 죄를 순식간에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세례 또한 이처럼 중요한 예식이었기에 학습기간도 길고 철저했습니다. 주로 부활절 저녁에 세례가 행해졌는데 당시의 세례 의식은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마귀추방 의식이 있고, 수세자의 악마에 대한 장엄한 거부과 신앙고백의 선언 있습니다. 이어서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을 부르면서 흐르는 물에 세 번 침례를 행합니다. 병자의 경우에는 물을 뿌리는 것으로 대체되었지만 온전한 형태로 인식되지는 않았습니다. 성령 전달의 상징으로서 안수와 기름 바름이 있고,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며 우유와 꿀을 먹었으며, 성결의 표시로 흰 세례복을 입었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세례예식을 재현했으면 합니다. 그래야 정말 자신의 죄가 다 씻음 받고 거듭났음을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성례전으로서의 교회

제가 이처럼 성례전 의식들을 장황하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바로 그런 의식들을 통해서 교회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기관이요 성례전임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회의 예배에서는 이런 거룩함과 무게와 영광과 신비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예배와 설교란 것이 인간의 이성에 호소하고 교회는 인간들의 공동체로 전락했습니다. 현대인들이 영성의 고갈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자기 이성만의 세계 살다보니 영혼이 메마르게 된 것입니다. 예배에 참여하기만 해도 그냥 교회에 앉아 있기만 해도 보이지 않은 신비 가운데 우리 영혼을 채우는 그런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설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도 성례전입니다. 인간의 입술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설교자가 전하는 말씀은 기록된 성경과 동등하다”고 말합니다. 칼빈은 “복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설교 현장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육신하여 인간의 귀에 들리는, 시내 산을 울리고 두렵게 만들었던 바로 그 위엄의 현장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설교를 통해서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까? 인간의 소리로 듣고 한편으로는 판단하거나 다른 한 편으로는 나태하게 듣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설교자는 이런 두려움을 안고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까? 신변잡기나 자신의 알량한 경험이나 판단을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만찬, 세례, 예배, 설교를 통하여 다양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성육신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놀라운 곳이고, 이런 영광스런 임무를 받은 위대한 기관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고후4:7) 하나님께서는 우리 연약한 인간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이런 연약한 인간들의 공동체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 부르시고 ‘산 위에 있는 동네’라 부르십니다. 세상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중계하고 중보 하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어떻습니까? 세상은 예수님은 좋은데 교회는 싫다고 합니다. 교회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요 근래 한국교회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은 감리교의 교회세습방지 법안입니다. 대형교회나 중형교회를 막론하고 이미 많은 교회가 세습을 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인데 세습한다는 것은 교회를 인간의 교회로 사유화했다는 것입니다. 청지기가 아니라 자기가 세워놓은 것 아까워서 다른 사람 주기 싫다는 것이고,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어 죽을 때까지 교회에서 주인 노릇하겠다는 태도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세상 기업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인간의 탐욕과 소유욕, 반민주성과 인간에 대한 맹신이 총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 바로 세습입니다. 북한의 3대 세습이 비판을 받는 이유도 여기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한 국가를 마치 왕정처럼 사유화하고 있는 전근대성에 대한 비판 아닙니까? 

그런데 감리교에서 뒤늦게나마 교회에서 세습을 방지하는 법안을 내놓았고 이를 중요 언론들이 보도하면서 좋은 평판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인정받는 것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칭찬을 하고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움직임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금란 교회 김홍도 목사가 주요 일간지 전면 광고로 세습을 옹호하는 글을 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습을 옹호하는 논리가 너무 유치합니다. 세습을 해야 시기심이라는 무서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는 취지였습니다. 후임으로 다른 목사가 와서 잘하면 시기심이 나는데, 자기 아들이 담임으로 와서 잘 하면 그런 시기심이 나지 않고 오히려 흐뭇하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전 높은뜻 숭의교회 김동호 목사님이 페이스북에 반박하는 글을 썼습니다. 한국교회의 타락의 시작은 세습에서부터 비롯되었으며, 이런 논리로 세습을 옹호하는 김홍도 목사의 글은 영적 치매 수준이라며 강하게 비판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김홍도 목사 측이 치매 운운하며 자기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하며 명예훼손죄로 고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분은 자기 명예가 훼손되는 것만 안타까워하지, 한국교회의 명예와 더 나아가 예수님의 명예가 훼손되고 있는 현실은 별로 안중에도 없는 모양입니다. 

김선도, 김홍도, 김국도 목사 모두 한 배에서 나온 3형제이며 굴직한 대형교회를 이룬 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지탄을 받는 교회 세습을 감행했고 지금 감행 중에 있습니다. 교회를 돈벌이하는 기업체와 같이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 돈은 하나님의 소유이며, 성도들의 피땀 어린 헌금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자기 임의로 처리하거나, 자기 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 이외에 이번 주간에도 어김없이 불미스런 사건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이번 주간에는 각 교단마다 총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중 가장 크고 장자교단이라고 자랑하는 예장 합동 총회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 교단 총회장은 노래방에서 도우미를 끼고 함께 술을 마시고 노래 불렀다는 불미스런 행각으로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 총무는 더 가관인데 자기 반대 세력들의 총회 진입을 막는다고 용역을 불러서 출입구를 통제했습니다. 이에 항의하는 총대들에게 변명하는 와중에 총회 강대상 정면에서 시위하듯 가스총을 들고 발언을 했는데 이 모습이 그대로 사진에 실려 공개적으로 노출되고 말았습니다. 

도무지 거룩한 교회, 거룩한 총회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며, 한국교회의 도덕적 수준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교회가 비난을 받은 것은 적지 않습니다. 인터넷 상에는 기독교 대신 ‘개독교’라는 용어가 등장한지는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9월에 장자 총회, 성총회란 이름으로 교단 총회가 이루어지는 곳이 백여 개 이상입니다. 장로교 교단만 백여 개인데 세계 교회사에 유래가 없는 교회 분열입니다. 한국교회에는 살아 있는 총회장 수만 해도 수천 명에 이릅니다. 분열이 거룩한 동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해하겠는데, 조그만 차이로, 또 인간들의 탐욕과 아집으로 거룩한 하나의 교회라는 위대한 전통을 망가뜨려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희망, 교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위대합니다. 교회의 위대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수단으로 교회를 세우셨다는 데 있습니다. 참 하나님도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연약하고 이렇게 부패하기 쉬운 존재들과 그들의 모임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마치 옛 이스라엘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완고하고 불평하고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딴 길로만 가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끝까지 사랑을 하셨습니다. 중동에 얼마나 강한 나라들이 많습니까? 그런데도 가장 약한 이스라엘을 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자신의 희망을 거기에 거셨습니다. 때로는 전적으로 편을 들어 주시고 복을 주시며, 때로는 때리거나 망하여 포로로 끌려가게 하시면서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제 주님은 교회와 함께 합니다. 교회는 스스로가 어떤 기관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씀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벧전2:9) 제사장은 하나님을 대변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을 대신해서 제사를 드리며 중보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들에게 용서와 축복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교회가 그런 기관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나라입니다.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보여주는 기관입니다. 교회는 사랑과 정의와 섬김과 하나 됨으로 세상 나라에 모범을 보이는 해방구와 같은 공간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주님은 교회가 그 사랑을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잃은 자를 찾고 작은 자를 섬기는 그 모습에서, 모든 권리를 희생하는 모습에서, 세상의 소유와 안전보다는 하나님 말씀과 나라를 구하는 그 결연한 모습에서 세상은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희망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성만찬은 주님의 희생을 기념하는 예식이기도 하면서 장차 하늘나라에서 맛볼 구원의 축제를 미리 경험하는 현장이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기쁨과 감사, 여유와 소망을 통해서 세상은 하늘나라의 풍성함을 미리 엿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은총이 가시화되는 성례전의 현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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