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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친구가 된다는 것은 (눅 7: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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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된다는 것은 (눅 7:31-35)


<황금 알을 낳는 거위>라는 유명한 이솝우화를 아실 것입니다. 한 농부가 거위를 키웠는데 어느 날 아침에 거위가 황금 알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매일 하나씩 황금 알을 낳는 것이었습니다. 이 농부는 매우 즐겁고 만족했습니다. 이대로 계속된다면 큰 부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점점 탐욕에 취하자 ‘저 거위 뱃속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금이 들어 있을까?’ 가 궁금해졌고 성급해진 마음에 그는 그 거위를 죽여서 배를 갈라보았습니다. 

그러나 뱃속에는 금덩어리는커녕 아무 것도 없고 멀쩡한 거위만 죽이고 말았습니다. 욕심에 빠진 성급한 사람의 모습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잘 보여주는 우화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이야기를 함께 생각해 봅시다. 농부의 어리석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황금 알이 아무리 귀하고 놀라워도 그것은 거위 뱃속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냉정하게 판단을 해보십시다. 황금 알이 귀합니까? 그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귀한 것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더 귀한 것은 오리입니다. 오리가 없이 어떻게 황금 알이 만들어지겠습니까? 그런데 이 이야기처럼 우리는 때로 무엇이 중요한지를 몰라서 잘못 결단하기도하고 우리의 욕심 때문에 실패하며 살아갈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최첨단 과학이라는 현대문명 속에 살아갑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들은 놀랍습니다. 꿈에나 생각 했던 일들이 현실 적으로 이루어지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생활 도구들이 정신을 혼미하게 할 지경입니다. 스마트폰이라는 것이 그렇고 컴퓨터라는 괴물이 그렇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들이 손 안에서 다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좋은 세상이 올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편리하고 최첨단 과학의 삶의 모습, 여기에 우리 삶의 맹점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현대문명의 산물인 이것들을 인간 이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입니다. 지나치게 맹신하거나 우상화마저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냉철하게 한번 생각해봅니다. 모든 문명이 굉장한 것 같아도 그것은 결국 인간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기에 편리한 문명보다 인간자체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의 소중함을 잊어버리고 편리함과 스피드와 생산성, 그리고 우리 앞에 있는 이 문명이라고 하는 거대한 것에 도취되어 있습니다. 분명 커다란 우상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현대화의 우상 때문에 생활 전반에서 인간성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편리하고 빠른 문명이 분명히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때로는 더욱 잔인한 범죄의 교본이 되기도 하고 인간성을 메마르게 하는 매개라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날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사건, 사고들 그리고 다툼들을 보면 다양한 이유들이 있고, 원인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를 찾고 원인을 찾아서 사건, 사고들을 해결합니다. 그러나 이유 이전에, 원인 이전에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 자체에 대한 문제요, 인간성의 문제입니다. 인간성이 원인을 무효화할 수 있고, 이유를 긍정적으로 바꿀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인간성입니다. 
자, 그러면 도대체 그 인간성이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인간성이 좋은 사람일까요? 넉넉하게 가지고 살아가는 부자들이 인간성이 좋은 것일까요? 아니면 그 사람의 지위나, 힘이나, 권력이 그 인간됨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겠습니까? 

그 사람의 인간성, 사실 이것은 철학의 문제요, 인생관의 문제입니다. 그가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데에 달렸습니다. 극단적인 예를 말하면, 공산주의자들의 철학은 [유물사관] 에 기초합니다. 그런데 이 유물사관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문제가 있느냐를 보세요. 모든 것의 근본은 물질이므로 사람 또한 포유류에 속하는 동물일 뿐이지 동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없어지고 아직까지도 공산주의는 불행을 자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 탈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프로그램이 있더라고요. 그 프로그램을 자주 시청하는데 탈북 하다가 잡히면 아주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바로 죽이지는 않는데 인간이하의 생활이 더 견디기 힘들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반드시 또 탈북 한답니다. 이게 물질을 인간보다 더 우선하는 유물사관의 공산주의입니다. 

더 나아가 인간의 문제에 정말 중요한 것은 곧 그가 지닌 종교의 문제에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종교가 그렇게 중요할 수가 없습니다. 잘못된 종교를 가지고 있는 민족은 삶 자체가 형편없습니다. [티베트]같은 곳은 사람이 원숭이, 돼지, 고양이, 개 등 동물과 함께 자고 아침에 마치 돼지우리에서 나오는 것과 같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종교적 신념에 있습니다. “사람과 동물은 하나다, 전생에 내가 개일 수도 있고, 또 저 개가 나를 유독 따르는 것을 보니 우리 어머니가 죽어서 개가 되었나보다.” 흔히 말하는 <전생> 의 개념이나 <윤회설> 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종교의 테두리 안에서는 당연히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종교가 인간의 삶을 이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객기를 조종하는 조종사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늘을 수차례 날아보지만 세계 각국들 중에 기독교 국가와 그렇지 못한 나라는 하늘에서 내려다보이는 분위기나 느낌 자체가 크게 다르답니다. 무언가 모르게 그 풍겨 오는 기분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인간에게 종교란 정말 중요한 삶의 에너지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문제, 인간의 문제는 곧 종교의 문제입니다. 바른 종교를 가지고 살아갈 때에 인간이 인간될 수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인생관을 크게 두 가지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에로스 적 인간관> 입니다. 동물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그리고 인간의 세계에서 신의 세계로, 즉 가장 낮은 처지와 차원에서 높은 세계로 지향하는 그런 의미의 인간관입니다. 불교의 인간관이 이것일 것입니다. 또 하나는 <아가페 적 인간관> 입니다. 이것은 본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그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는데 그 본래적 의미를 가장 귀중하게 여기고, 다시 그것을 회복해야 한다는 위치에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아가페 적 인생관이요, 기독교적인 인간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속에서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인간관을 배우려고 합니다. 그것은 본문 34절에 있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 라는 구절에서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비난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붙인 별명입니다만 이것이 예수님의 인간관이자 인생관입니다. 그런데 이 세리라는 말은 사실 듣기 싫은 말입니다. 이들은 민족 반역자요, 돈만 아는 사람이요, 윤리 도덕도 없는 사람입니다. 당대의 사람들이 얼마나 세리를 미워했는지 구걸하는 거지도 세리의 돈만큼은 절대로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달갑지 않게도 예수님의 별명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이 별명에 대하여 기분나빠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뭔가 다른 특별함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하찮은 것들과는 상대도 하지 말아야할 거룩함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논리입니다. 그러면서 세리와 친구나 하는 저 사람이 무슨 메시아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굉장히 거룩한 척, 의로운척하며 영적교만에 빠져서 세례요한의 외침도 거절하여 회개의 세례를 받지 아니하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도 거부하고 살아가던 존재들이었습니다. 세상이 다 잘 못되었고 오직 자신들만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논리처럼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런 의식이 없는지 생각해 봅니다.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는 의식, 그래서 괜히 사람을 미워하며 교제하지 않으려고 하는 의식, 이것은 그 사람의 인간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아가페 적 인간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너나 나나 원래 하나님의 향상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타락함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피차 찾아가자’ 이런 인간관을 가진다면 더 이상 사람 만나는 것을 회피하고 인간관계를 단절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믿을수록, 신앙의 햇수가 많아질수록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려고 해야지 세월이 지날수록 주위에 사람이 없어진다면 이건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고한 척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오만을 버려야합니다. 먼저는 저 사람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인식부터 바꾸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처럼 사람을 보는 눈이 그랬더라면 세리와 죄인들과 친구 될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더럽고 추하고 상대하기도 싫은 사람들과 어떻게 먹고 마시며 친구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랬다면 오늘 성경의 기록도 없을 것이고요. 

예수님께서도 성육신하셔서 사람이 되시고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를 자처하셨는데 우리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엄청난 교만입니다. 예수님의 이 행보는 멀리서 사랑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하여 친히 사람이 되셨다는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 이라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보세요. 이 표현은 예수님을 불편하게 보는 사람들의 시각이고 예수님 입장에서는 다가가서 사랑하고 함께 잡수신 것입니다. 인간성이 바뀌고 마음을 고쳐먹으면 이렇게 세상 보는 눈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 그 속에 참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서로 인간임을 생각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는 친구입니다. 나아가서 세상을 친구로 삼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나를 버리지 못하면 진정한 친구를 만나지 못합니다. 의인의 껍데기를 벗지 않고는 한 영혼도 구원하지 못합니다. 무슨 이유로든지 착각하지 말아야 됩니다. 저 사람이 정말 잘 못된 사람이면 나는 얼마나 잘된 사람입니까? 저 사람이 죄인이라면 나는 얼마나 깨끗한 사람입니까? 세리와 죄인들을 위하여 친구 되신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진정한 친구 됨의 의미는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낮아지고 다가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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