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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들으라! 하나님의 백성아(4) (신 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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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으라! 하나님의 백성아(4) (신 6:6-9)

: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성도들에게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깨닫고 따르는 사람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무엇이든 깜빡깜빡 잘 잊어버리는 할아버지가 살았습니다. 어느 날, 할아버지 집에 새로 일하는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할아버지는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이보게. 자네 성이 뭔가?”

“예, 저는 배 서방입니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음, 배 서방. 알겠네. 잘 지내보세”

하지만 할아버지는 하인의 이름을 늘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배 서방을 볼 때 마다 “이봐, 자네가 누구라고?”하고 다시 묻곤 했습니다. 배 서방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배 서방은 “제 목에 배를 달고 다니면 어떨까요? 절 부르실 때 배를 보시면 되지 않겠어요.” 하고 지혜를 냈습니다.

“옳거니, 배 서방, 앞으로는 말이야, 목에 배를 달고 다니게.”

다음날, 할아버지가 배 서방을 부르려는데 또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배 서방 목에 걸린 배를 보고 “옳지, 배다! 배 서방.”하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하인이 문지방을 넘다 넘어졌지 뭡니까! 배는 뚝 떨어지고 꼭지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그것을 보고 “옳지, 꼭지다. 꼭지 서방”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날부터 그 하인은 꼭지 서방이 되었습니다.

요즘, 기억력에 대한 문제, 건망증 또는 치매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요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억력의 감퇴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만약 모든 것을 낱낱이 기억한다면 그것도 비극입니다. 문제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쉽게 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도 인간의 이런 문제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중요한 것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할례’라고 생각합니다. 할례는 남자의 몸에 표시하여 하루 몇 차례씩 그것을 보고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기억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안식일,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림으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의 백성들에게 그들이 복을 받고 크게 번성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 6:4)라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의 기억을 위한 여러 장치를 그들에게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기억하기 위하여 해야 할 것입니다.  

I. 기억을 위하여  

하나님은 인간의 뇌를 한 번 기억하면 영원히 잊지 않게 만들어 주지 않으셨습니다. 잊을 것은 잊고, 기억하여야 할 것들을 기억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하여 할 일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억을 위하여 주신 것들은 무엇입니까?

6절 말씀입니다.
: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그들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이 말씀’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흔히 쉐마라고 합니다. 

그리고 ‘새기다[hy:h;/하야]’는 말은 ‘존재하다’ 또는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말씀이 마음에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일시적으로 한 번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지속적으로 상태에 있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말 성경에서는 마음에 새기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이 항상 마음에 있는 것은 마음에 새긴 것입니다.

1. 마음에 새기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이 마음에 있게 하라는 말은 단지 말씀의 내용을 기억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은 말씀은 기억만 하고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과 의지와 생각에 말씀이 반영되어 있는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자신의 삶 속에서 주님의 향기를 풍겨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새기라는 말은 역사로써 기억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는 험난하였습니다. 유태인들만큼 험난한 역사를 견디어 내고 살아남은 민족도 그리 흔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시대에서부터 지금까지는 어림잡아 4,000년의 역사입니다. 이 가운데 독립적인 기간은 불과 4분의 1일이 채 되지 않습니다. 3 천 년 이상을 노예로, 포로로, 그리고 강대국의 속국으로 또는 나라 잃은 민족으로 압제와 박해 속에서 살았습니다. 이런 역사를 통하여 그들은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였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그들의 역사 속에 새겨 넣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기 위하여 부르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고향을 떠나기는 하였지만, 언제나 항상 하나님의 뜻을 따랐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여쭙지도 않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하여 바로에게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그를 가나안으로 이끌어 올려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그는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하고 증거를 요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제사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았습니다. 이것은 자신과 하나님이 동등한 자격으로 계약을 맺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 15:13-14)

이것이 이스라엘의 400년간 애굽의 노예 기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그마치 400년이나 노예 노릇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고 가나안을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40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 기간이라는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을 지금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망각은 나라를 망하게 하지만 기억은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불행했던 과거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언제나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머물러 있기를 바라서 그들은 역사를 기억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새기라는 말은 마음에 언제나 기억하고 있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기억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억을 위한 여러 가지 보조 장치가 필요합니다. 가장 탁월한 기억의 보조 장치는 역사를 기록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기록하신 하나님의 발자취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우리나라를 통하여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기억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마음에서 희미해지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 넣으십시오. 기억력에 의존하지 마시고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하십시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어지는 말씀에서 계속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만들어주신 기억의 보조 장치들을 볼 수 있습니다.

7절 말씀입니다.
: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기억을 위하여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잊어버리는 것이 정상이니 거듭거듭 들려주라는 것입니다. 집에서 쉴 때나 길을 갈 때나 자리에 들었을 때나 일어났을 때나 항상 말해 주라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말은 다른 면서 자연스럽게 잊어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쉬지 말고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르치다[@n"v/솨난]’는 말은 ‘뾰족하게 하다’, ‘날카롭게 하다’는 뜻입니다.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예리하게 파악하여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자녀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질 정도로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에 새겨 넣을 뿐만 아니라 자녀의 마음에도 새겨 넣으라는 것입니다.


2. 자녀에게 가르치라고 하였습니다.

역사를 이어가지 위해서는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필요합니다. 가르치되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항상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에게 가르치라는 말씀은 다음에 다시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어지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말씀을 기억하기 위한 기억 보조 장치로 하나님이 마련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8절 말씀입니다.
: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모세는 계속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명령합니다. 그 내용은 ‘당신들은 그것을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으십시오.’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서 기호로 삼아야 할 그것은 무엇입니까? 

역시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내용을 손목에 매고 이마에 붙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몸에 말씀을 가까이 하라는 명령입니다.

3. 몸에 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테플린’이라는 것을 사용합니다. 우리 한글 성경에서는 ‘경문’이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테플린’은 히브리어로 ‘기도’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경문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네모난 상자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이마와 왼 손에 부착하는 도구입니다. 

이 상자 안에는 신명기 6:4-5절의 말씀을 양피지 조각에 손으로 써서 넣었습니다. 말씀을 적은 양피지를 넣은 네모진 검은 상자에 가죽 띠를 연결시켰습니다. 상자를 이마 위와 팔뚝에 얹고 가죽 끈으로 둘둘 감아 맵니다. 그리고 다시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구절을 읽습니다. 이들의 생활신조가 바로 여기에 다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그들의 생활과 신앙의 밑바탕이 된 것입니다. 그들이 그것을 왼쪽 손에 매는 것은 사람의 심장이 일반적으로 왼쪽에 있기 때문에 심장 가까운 쪽에 매기 위하여 왼쪽에 맨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세인들을 꾸짖으시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 술을 길게 하고”(마 2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 경문의 띠를 넓게 하는 것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경문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발굴에 의하여 손톱만한 경문도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크기는 상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경문을 넓게 하는 의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형식적인 의식이 되었고 후대로 갈수록 내용은 잃어버리고 형식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미 신약시대에 예수님께서도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형식만 남게 되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형식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이 부적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합니다. 어떤 일이나 형식에 지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는 것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성경 말씀을 정기적으로 읽는 것도 해당합니다.

요즘 제가 우리교회 교역자들을 들들 볶고 있습니다. 부목사님과 수련목전도사님의 출근시간이 8시 반입니다. 8시 반에 모여서 한 시간 가까이 성경말씀을 큰 소리로 읽고 있습니다. 제 아내는 전도사님들 피곤한데 그만 괴롭히라고 하는데 세 주간을 마쳤습니다. 그동안 창세기에서 여호수아 앞부분까지 읽었습니다. 이것은 교역자들의 영성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말씀을 함께 소리 높여 읽는 것은 눈으로 읽고, 귀로 읽고, 마음으로 읽고, 함께 읽는 것으로 아주 오래 전부터 교회에 내려온 좋은 전통입니다. 앞으로 계속할 작정입니다. 그리고 효과가 좋으면 성도들에게도 적용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외식이 되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명령으로 전달된 말씀이라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 겉으로 드러내는 겉치레에 불과하다면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되지 않은 채로 기억하고 간직만 하고 다니는 말씀은 부적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말씀이 부적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합니다. 알고 있는 말씀이 아니라 살아지는 말씀이 되도록 순종하여야 합니다.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가 그 말씀을 기억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하라고 하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9절 말씀입니다.
: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쉐마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몸 가까이 두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문설주는 문의 틀을 말합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갈 때나 밖으로 나갈 때에 잘 보이는 곳에 쉐마의 말씀을 기록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깥문은 집의 대문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한 마을이나 도시의 입구를 일컫는 말입니다. 개인의 집이나 공동체의 출입구 어디든지 들어가면서 나가면서 볼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4. 문에 기록하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실천하기 위하여 양피지에 신명기 6:4-5 말씀을 손으로 직접 기록하여 문설주에 부착하였습니다. 그 후 쉐마를 적은 양피지를 나무나 금속으로 만든 통속에 동그랗게 말아서 넣고 그 통을 문설주에 부착하는 풍습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런 통을 메주자(Mezuza)라 합니다. 메주자의 히브리어 원래의 의미는 문(Door)과 문설주(Door-Post)을 동시에 가리키는 것인데 통상 문설주를 의미하는 단어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메주자를 부착하는 위치는 문안으로 들어가는 쪽에서 볼 때 바깥 오른쪽 문설주 에 사람의 평균 눈높이로 부착합니다. 이것은 집을 드나드는 사람이 쉽게 발견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사는 집이면 예외 없이 붙어있는 이 메주자 풍습은 성서 이래 지금까지 지켜 오고 있는 가장 오래된 풍습중 하나입니다. 오늘날 모든 이스라엘 인들의 집에는 화장실, 헛간, 창고를 제외한 모든 문설주에 메주자를 부착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 갈 때, 방으로 들어 갈 때는 반드시 메주자를 만지고, 메주자를 만진 손을 다시 입에 대는 입맞춤의 관습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이 관습은 일상생활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순종하겠다는 표시입니다. 

메주자의 표면에는 히브리어로 쉰(v)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랍비전통에 의하면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로는 이 쉰이라는 글자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샤다이’의 첫 번째 글자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쉰은 ‘300’이라는 숫자를 의미합니다. 300이라는 수는 일 년 365일에서 52주의 안식일과 13일의 절기를 제외하고 남은 수이기도 합니다. 즉 안식과 절기와 마찬가지로 평일도 말씀을 기억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하여야 합니까? 

말씀을 듣고,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고, 적용하는 것이 여기에도 해당합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말씀을 가까이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기왕에 문에 연관된 적용을 하나 하자면 ‘교패’를 활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식구라는 표시인 교패를 모든 성도들이 집집마다 빠짐없이 부착하고 있습니다. 단지 붙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들어가면서 나가면서 교회의 표어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표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과 생명을 나누자!’입니다. 집을 나서면서 교패를 보고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하십시오. 집으로 들어가면서 사람들과 생명을 나누었는가를 반성하십시오. 교패가 단순히 우리 교회 교인이라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활용하기에 따라서 훌륭한 기도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선 교패가 없으신 분들은 오늘 사무실에서 가져다가 붙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기 위하여 좋은 도구를 사용하시기는 지혜가 여러분에게 있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의 기억과정이란 어떤 정보를 받아들여서 뇌 속에 기록하고 저장하였다가 필요할 때 이를 다시 끄집어내어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건망증이란 이런 기억 과정에서 일부 장애가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분명히 기억을 하였는데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 건망증입니다. 그런데 이 건망증과 비슷한 것이 치매입니다. 하지만 건망증과 치매는 분명히 다릅니다. 

치매는 뇌세포의 고장으로 생긴 질병입니다. 건망증은 나이가 많아짐으로 나타나는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하나의 현상에 불과합니다. 임상적으로 볼 때 건망증은 자신이 어떤 기억이 상실되었음을 잘 알지만, 치매환자는 자신의 기억력이 상실되었음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건망증은 귀띔해주면 금방 기억을 하는 것이고, 치매는 귀띔해주어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치매는 보고도 모르는 것이고, 보면 아는 것은 건망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억을 살리기 위해서는 자주 보고, 계속 생각하여야 합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왼 쪽 손에 담배 곰방대를 들고 팔을 휘적거리면서 길을 갑니다. 그런데 곰방대를 든 왼쪽 팔이 뒤로 가서 곰방대가 보이지 않으면 “내 곰방대 어디 갔지?”합니다. 곰방대를 든 왼쪽 팔이 앞으로 나와 곰방대가 보이면 “내 곰방대 여기 있구나!”하였답니다. 그래서 길을 가면서 “어디 갔지?”, “여기 있구나!”, “어디 갔지?”, “여기 있구나!”를 반복하였답니다.

우리의 기억이 이렇습니다. 보면 생각나고 보지 않으면 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아시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몸 가까이에 두고, 문에 새겨서 보고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배드리는 것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고 생각할 때라야만, 기도할 때라야만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살아갈 때라야만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하여 주신 방법들입니다. 예배에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지혜와 용기와 능력주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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