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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렘 3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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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말씀에는 예루살렘 함락 직전에 예레미야를 중심으로 펼쳐진 사건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서 예레미야가 밭을 사게 되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인 예레미야가 땅을 매입했다고 하는 것은 이례적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 배경을 살펴보면 더욱 특이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본문 앞에 있는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본문 말씀의 시대적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유다의 시드기야 왕 열째 해 곧 느부갓네살 열여덟째 해라는 시간적 배경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때는 기원전 587년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서 588년에 함락되니까, 예루살렘 멸망 1년 전입니다. 시드기야 왕 9년에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해서 예루살렘을 포위한 지 1년이 지나가고 있는 때였습니다. 이렇게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있는 이 때에, 2절 말씀을 보면,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의 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갇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왕의 시위대 뜰에 갇혀 있게 된 이유는 뒤에 있는 3절에서 5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3절에서 5절 말씀을 현대인의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시드기야왕이 나를 그 곳에 가둔 것은 내가 다음과 같은 여호와의 말씀을 전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 성을 바빌로니아 왕의 손에 넘겨 줄 것이니 그가 이 성을 점령할 것이다. 유다의 시드기야왕은 바빌로니아 사람들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바빌로니아 왕의 손에 넘어가서 그와 직접 대면하여 말할 것이다. 시드기야는 바빌로니아로 끌려가서 내가 그를 돌아볼 때까지 거기 있을 것이며 그는 바빌로니아 군대와 싸워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나 여호와의 말이다.”

  시드기야 왕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포위된 상황에서 예루살렘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왕의 요구를 거절하고, 오히려 바벨론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될 것과 시드기야 왕의 비극적인 최후에 대해서 예언했습니다. 이 예언은 반바벨론 정서가 강했던 시드기야 왕과 유다 백성들에게는 용납되기 힘든 반민족적인 발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개의치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않고 충실히 전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시드기야 왕의 귀에 거슬렸겠지만, 시드기야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줄 알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했겠지만, 시드기야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예레미야 선지자를 반국가 사범으로 몰아세우고 시위대 뜰에 투옥시키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나라는 멸망 직전에 있고, 예레미야는 투옥된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6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예레미야에게 임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하나님은 하나멜이 예레미야를 찾아 와서 무슨 말을 할 것인지를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정말 사촌 하나멜이 와서 말합니다. 8절입니다.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하나멜은 그의 밭을 예레미야가 사주기를 요청했습니다. 밭을 사달라고 요청하면서 그 근거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누가 부득이하게 토지를 팔게 될 경우에, 그것을 가장 가까운 친족이 사서 각 지파에게 할당된 토지가 다른 지파에 팔리지 않도록 규정한 이스라엘의 토지법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런 표면적인 이유를 내세웠지만, 그 속내를 우리는 쉽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멜은 예레미야에게 상속권이 있다고 하면서 왔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핑계일 뿐이었습니다. 이제 나라가 곧 멸망당하게 될 것 같으니까, 그렇게 되면 땅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곧 멸망당할 나라의 땅보다는 현찰을 가지고 있는 것이 낫겠다는 얄팍한 생각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너를 위하여 사라’고 하면서, 이것이 하나멜 자신에게 유익한 것이 아니라, 마치 예레미야를 위한 일인 것처럼 말하는데, 이것은 사기꾼이 사기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이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가면 갖고 있던 모든 것들을 다 빼앗기게 될텐데 누가 땅을 사겠습니까?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멜의 말을 듣고서, 그 땅을 사야 될지 말아야 될지에 대해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봤다면, 땅을 사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그것은 어리석은 짓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유다의 멸망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고 그것에 대해서 예언을 했다가 투옥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유다의 멸망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레미야는 어떻게 합니까? 9절 말씀에서와 같이, 예레미야는 은 십칠 세겔을 달아주고 그 밭을 삽니다. 살 필요도, 이유도 없고, 살 형편도 안 되고, 사서는 안 될 밭을 그는 값을 치르고 샀습니다.

  예레미야의 행동은 상식을 벗어난 것이었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는 왜 아무 쓸모도 없는 땅을 샀겠습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볼 핵심 질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왜 밭을 샀을까요?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멜에게서 땅을 산 이유를 우리는 8절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8절을 보면,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이 그가 밭을 산 이유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고, 밭을 사라고 하는 하나멜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 줄 알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밭을 샀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 것은 전혀 뜻밖의 명령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누구입니까? 그가 농부였습니까? 그는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가 해야 할 일은 농사짓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입니다. 혹시 농사를 짓는다고 해도, 지금은 시위대 옥에 갇혀서 언제 나올 수 있을지 알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풀려나게 돼도 나라가 망하고 나면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자신의 생각이나, 일반적인 상식으로 결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인 줄 알았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어떻게 보면 머리가 참 나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가 왜 옥에 갇힌 신세가 됐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될 것이고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했다가 투옥됐습니다. 정상적이라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 내게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하라고 해서 전했으면 뒤를 책임져 주셔야지 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십니까? 날 이렇게 대우하시려고 나를 선지자로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했습니까?’라고 따져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다가 옥에 갇혀놓고서는, 하나님이 하나멜의 밭을 사라고 말씀하시니까 또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밭을 샀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인 줄 알면! 그대로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예레미야와 같은 모습이 있습니까? 

  예레미야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계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멜의 요청 앞에서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밭을 사면 내게 이익이 되는지 그렇지 않은지 손익을 따져보지 않았습니다. 계산을 해보면, 망국 직전에 땅을 산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고,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따져보지 않고 계산 없이 밭을 샀던 반면, 하나멜은 달랐습니다. 하나멜은 약삭 빠르게 계산할 줄 알았습니다. 땅을 갖고 있는 것보다는 현금을 소유하는 것이 더 낫다는 계산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멜과 같이 계산을 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도 누가복음에서 말씀하실 때에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건물을 짓기 전에 건축비용을 미리 계산하고 하지, 그렇지 않았다가는 건물을 완공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전쟁 때에도 적군과 아군의 전세를 계산해 보고 이길 수 없다면 평화조약을 맺는 것이 상식적인 행동입니다. 계산할 줄 아는 것이 잘 하는 일이고, 요즘은 그런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세상 사는 지혜가 있다고 더 칭찬을 듣게 됩니다.

  저도 보기보다는 계산이 빠른 사람입니다. 말만 이렇게 하면 안 믿으실 것 같아서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신학생 시절에 동기들과 같이 학교 앞에 있는 식당에 가게 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 식당에 가면, 1인당 메뉴 하나씩을 시키는 게 아니라, 여섯 명이 가면 메뉴를 네 개나 다섯 개 정도만 시키고 공기밥만 추가로 시킵니다. 그리고, 먹다가 양이 부족하면 공기밥 하나를 더 추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밥그릇 들고 가서 밥 좀 더 달라고 하면 됩니다. 돈 없는 신학생들이다 보니까 그렇게 해서 밥을 많이 먹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친구들은 다 먹고 나서 ‘우리 먹은 게 전부 얼마지? 우리 얼마씩 내면 되나?’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미 밥 먹기 전부터 계산이 다 끝나 있습니다. 무슨 메뉴가 얼마이고 몇 개를 시켰고 우리가 모두 몇 명이기 때문에 얼마씩 내면 된다는 계산이 이미 다 돼있어서 밥값은 항상 제가 계산했습니다. 밥값을 혼자 낸 적은 별로 없지만, 그 시절에 “내가 계산할게.”라고 하면서 얼마씩 내면 된다고 계산은 많이 해줬습니다. 저는 그래서 밥 먹고 나서 ‘우리 얼마씩 내면 되지?’라고 묻는 친구를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는 좀 한심하게 여겼습니다. 왜 저렇게 계산이 느릴까. 저래서 이 힘든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지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예레미야보다 훨씬 우수한 두뇌를 갖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세상살이에 익숙하고 이해타산이 빨라서 예레미야와 같은 실수를 결코 범하는 법이 없습니다. 내게 유익이 되는지 불이익이 되는지를 계산해 보고, 불이익이 되는 경우에는 절대로 그 일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셔도, 성경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해야 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고, 그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계산이 빠르기 때문에 내 기준에서 유익하지 못한 명령에는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신앙생활에 적용하고 하나님 앞에서 내 기준으로 계산하고 판단하는 것! 그 자체가 불순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명석한 두뇌를 가졌고, 많은 경험과 세상 사는 지식을 갖고 있고 계산을 잘 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고 받는다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만큼은 계산이 빠른 사람이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계산해 봤을 때, 내게 유익은 커녕, 손해가 된다고 하더라도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예레미야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잠시 머리가 나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계산하지 않는 우리들을 향해서 결코 머리가 나쁘다거나 어리석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멜보다 예레미야를 더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하나멜입니까, 아니면 예레미야입니까?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멜에게서 밭을 사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었습니다. 누가 들어봐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이었지만, 예레미야는 그래도 순종했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상식에 어긋나는, 심지어는 말도 되지 않는 명령을 하실 때가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서 우리는 이해하기 힘든 하나님의 명령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이 75세가 돼서 익숙할 대로 익숙한 본토 아비 집을 그냥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100세에 어렵게 겨우 아들을 얻었는데 그 아들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출애굽의 역사 때도 젊은 사람을 쓰시지 않고 80세나 된 모세에게 그 일을 맡기십니다.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도 일반적인 전략전술이 아니라 성 주위를 돌라는 명령을 하십니다. 

  어떤 명령에 대해서 왜 그런 명령을 내리는지 이유가 명확하면, 그것이 잘 이해가 되면 순종하기가 쉽습니다. 반대로, 어려운 명령은 아니라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으면 순종하기가 어렵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바로 그랬습니다.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는 것 자체는 어렵고 힘든 일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순종이 힘들었습니다. 이해가 되면 순종하기에 좋은데, 하나님은 우리를 이해시키기 이전에, 이해시키기 보다는 먼저 순종을 요구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실까요? 이것은 이야기 하나를 통해서 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선교사님 가족이 아프리카에서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어린 아들이 밖에서 나무 그늘 아래서 혼자 놀고 있는데 갑자기 아빠가 다급한 목소리로 아들에게 말합니다. “얘야, 얼른 땅에 엎드려!” 아이는 곧바로 땅에 엎드렸습니다.“이제 아빠한테 빨리 기어와.” 아이는 시키는 대로 기었습니다.“이제 일어나서 뛰어와!” 아이는 아빠 품으로 달려와 안겼습니다. 아빠 품에 안겨서 자기가 놀고 있던 나무를 쳐다보니까, 엄청나게 큰 독사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습니다.만약에, 아빠가 아이를 불렀을 때 아이가 “아빠 왜? 왜 그렇게 해야 돼?”라고 물어보면서 꾸물거렸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선교사님이 어린 아들을 충분히 이해시키려고 했다면, 아이가 이해하고 난 후에 순종하려고 했다면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를 가지기 이전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으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 줄 안다면,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먼저 순종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알고 보면 깊은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괜히 밭을 사라고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손해를 끼치게 하기 위해서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멜의 밭을 사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결코 버리신 것이 아니라, 다시 회복시켜주실 것이라는 메시지가 그 안에 담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봉인하지 않은 매매증서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토기에 담아서 오랫 동안 보존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오랫 동안이라고 하는 시간은 바벨론 포로 70년의 세월을 의미합니다. 15절 말씀은 하나님이 밭을 사라고 말씀하신 의도를 보여줍니다. 바벨론에 의해서 망하겠지만, 유다 백성들이 70년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장차 다시 회복돼서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깊은 뜻이 있으셔서 말씀하시지, 결코 이해도 되지 않는 맹목적인 순종만을 요구하시거나, 우리에게 손해를 끼치기 위해서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버지와 딸이 야외로 소풍을 가서 아버지는 고기를 굽기 위해서 불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딸은 뛰어다니면서 놀다가 물건 하나를 주워왔습니다. 나무로 만든 예쁜 구슬 상자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쁘구나. 그렇지만 그것을 이 불 속에 집어 던져 버려라." 뜻밖의 말에 딸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머뭇거리고 서있는 딸에게 아버지가 다시 말합니다. "얘야, 내가 너에게 강요하지는 않겠다. 너의 뜻에 맡기겠다. 그러나 네가 이 아빠를 믿는다면 그것을 이 불 속에 던져 버려라. 이유는 말하지 않을께."

  딸은 잠시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것을 불 속에 집어 던졌습니다. 아버지 뜻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아버지는 딸에게 선물을 했습니다. 포장을 뜯어보니까 그 안에는 예쁜 구슬 상자가 들어 있었습니다. 자기가 불 속에 던진 것보다도 훨씬 더 값지고 아름다운 예쁜 나무 상자였습니다. 아버지는 그것을 딸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에게 이렇게 한 것은 네가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도록 가르치기 위함이었단다. 네가 살아가다 보면 때때로 하나님은 이유를 말씀하시지 않고 무엇인가 너에게 포기하도록 요구하실 때가 있으실 거야. 그럴 때마다 너는 지금 이 아빠를 믿고 아빠의 뜻을 따랐던 것처럼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해라. 그것이 너에게 언제나 최선의 길이 될거야.”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신 깊은 뜻을 가지고,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는데, 우리는 순종하지 못해서 더 좋은 것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내 생각대로 살아가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내게 손해가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에는 깊은 뜻이 있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에게 더 복되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본 훼퍼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믿는 자만이 순종할 것이며 순종하는 자만이 믿게 될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믿음과 순종은 별개가 아니라, 함께 간다는 것입니다. 믿기 때문에 순종하고, 순종을 통해 믿음이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고, 우리가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순종을 통해서 그것이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과연 우리의 믿음은 증명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을 순종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까? 원하기는, 예레미야와 같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계산하지 말고,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순종함으로 우리의 믿음을 보여줄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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