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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가 방법이다 (왕상 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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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가 방법이다 (왕상 9:1-3)

만나 교회는 이 지역에서 아주 독특한 전통을 가진 교회입니다. 매일 새벽 1, 2부와 저녁 기도회로 3번에 걸쳐서 드리며, 금향로 기도회는 금요일 저녁에 뜨겁게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매월 첫날은 초하루 기도회로 모든 교인이 나와 기도하며 한 달을 시작합니다. 무엇보다 1년에 2번 있는 변화산 기도회는 이 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기도회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만나 교회를 창립한 김우영 목사님은 늘 ‘4도 목회’를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리스도’, ‘기도’, ‘전도’, ‘성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축 중의 하나가 ‘기도’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기도가 방법이다’ 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들으신다!’라는 것은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구와 소원을 들으신다는 차원의 문제뿐 아니라 매일 하나님께 기도하며 대화하는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솔로몬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전을 짓기 전에 기브온에서 1천 번제를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소원을 물으셨습니다. 열왕기상 3장 3-5절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3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행하였으나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 4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5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그러자 솔로몬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합니다. 그랬더니 열왕기상 3장 10절,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솔로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이런 솔로몬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와 만남, 그리고 교통 속에서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는 우리의 모든 간구와 기도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줄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간구에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그 간구가 우리의 정욕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을 구할 때에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원하는 모든 기도가 이루어진다면 절대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신실한 사람들의 기도가 이루어질 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기도가 방법이 된다는 것은 매일매일의 삶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구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절대 일방통행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본문 1절을 보세요. “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치며 자기가 이루기를 원하던 모든 것을 마친 때에” 

그렇습니다. 솔로몬이 원하던 모든 일을 마쳤을 때, 그 일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주 기쁘시게 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소원과 솔로몬의 소원이 같았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기브온에 나타나셔서 솔로몬의 소원을 물으셨던 하나님께서 다시 솔로몬의 기도를 들으시고 축복하기 위해 나타나신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후원하는 일본의 김광현 선교사를 처음 만났을 때, 저는 무척 놀랐습니다. 사역지에 간 지 1년밖에 안 된 사람이 얼마나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지 깜짝 놀랐습니다. 어디에서나 거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며칠을 같이 다니면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는 열심히 말하는데 일본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열심히 말하고는 있었지만,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기도가 방법임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심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기도가 일방적인 요구나 소원이 될 때,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가장 경계해야 할 잘못된 기도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야고보서 4장 3절입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사도 바울도 로마서 13장 14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정욕을 위함이란

기도생활이란, 기도하는 시간이 아니라 거룩한 삶을 사는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룩함이란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삶이 거룩했던 때, 그의 정치가 왕국을 굳건히 하는 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을 굳건히 했던 때에, 그의 구함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래서 주신 축복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3절의 말씀입니다.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영히 그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

여러분은 아십니까? 열왕기상 9장은 솔로몬의 위대함과 동시에 솔로몬의 몰락이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의 거룩함이, 하나님과의 대화가 호화로움과 정욕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열왕기상 11장 9-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9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그에게 나타나시고 10 이 일에 대하여 명령하사 다른 신을 따르지 말라 하셨으나 그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솔로몬의 호화로움이 극에 달하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이방 여인들과 연애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삶이 거룩함에서 정욕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거룩함과 정욕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거룩할 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지만, 정욕의 지배를 받게 되면 사람의 소리와 달콤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열왕기상 11장 1절에 보면,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그렇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하나님과의 대화가 단절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음성과 거룩함을 구별하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아십니까?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도 하나님의 음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할 거룩함을 상실하기 때문에 기도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7절의 말씀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매일 순간순간마다 기도만 하고 앉아 있으라는 말이 아니라 매일매일 거룩함을 유지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과의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말입니다.

“기도가 방법이란” 우리가 모든 일을 아무리 잘한다 할지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삶이, 거룩함이 상실되는 순간,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사무엘상 12장 23절에서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그는 끝까지 역사상에서 위대한 선지자요, 제사장으로 기억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영적인 거장으로 살다가 말년에 거룩함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렇게 위대한 사도로 살아가면서 염려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9장 27절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정욕을 극복하며, 기도가 방법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결단이 있습니다. 
매일매일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 중의 “오늘 집을 나서기 전”이 있습니다. 

메리 A. 키더가 작사한 것입니다. 

1. 오늘 집을 나서기 전 기도 했나요. 오늘 받을 은총 위해 기도 했나요.
2. 맘에 분노 가득할 때 기도 했나요. 나의 앞길 막는 친구 용서 했나요.
3. 어려운 시험 닥칠 때 기도 했나요. 주가 함께 당하시면 능히 이기리.
4. 나의 일생 다가도록 기도하리라. 주께 맡긴 나의 생애 영원 하리라.
후렴: 기도는 우리의 안식 빛으로 인도하리. 앞이 캄캄할 때 기도 잊지 마시오.


기도가 방법입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시오, 정욕이 아닌 거룩한 삶을 살 때, 매일매일의 삶을 통해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크리스천 개극 작가로 유명한 전영호 씨가 쓴[웃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는 책에 탤런트 이영범 씨와 그의 부인 노유정 씨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노유정 씨는 새벽 예배를 쉬지 않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새벽 예배가 경제적이기 때문이랍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전화도 새벽 통화료가 훨씬 싸잖아요. 기도도 하나님과의 영적 통화인데 아무래도 새벽 통화료가 저렴할 거예요.”라고 대답을 하더랍니다.

그럼 여기서 기도의 유익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과 동행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아모스 선지자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저는 서론에서 기도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각이라고 했는데, 아모스서 3장 3절에서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세상과 충돌하라]를 쓴 A. W. 토저는 그의 책에서 둘이 동행하기 위한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첫째, 가는 방향을 합의해야 한다. 
둘째, 목적지에 대해 합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중도에서 갈라서야 할 것이다. 
셋째, 어떤 길을 택할 것인지 합의해야 한다. 목적지에 이르는 많은 길이 있기 때문이다.
넷째, 가는 속도에 대해 피차 동의해야 한다. 속도가 다르면 만날 수는 있어도 동행은 못한다. 
다섯째, 서로 동행할 의사가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바로 이 몇 가지 조건을 맞추어 가는 과정입니다. 기도는 나 혼자 일방적으로 소원을 쏟아 내놓는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기도가 여러분의 삶에서 방법이 되기 위해서는 이 과정을 꼭 거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길을 제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12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제자들에게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성령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사람, 기도가 삶의 방법이 되지 못하는 사람은 마치 보험을 든 것과 같은 형태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대개 이런 사람들은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을 원하지 않고 가능하면 천국에 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보험료를 냅인니다. 불편하지만, 보험을 드는 심정으로 교회에 출석하고 헌금을 합니다. 그리고는 세상에서 저질스런 삶을 삽니다. 쾌락을 즐깁니다. 이들은 나름대로 신앙의 불편함을 감수하므로 보험이 유효하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적인 목적이 아니라 사교적인 목적으로 교회를 다니기도 합니다. 혹은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가정을 위해 내가 귀한 시간을 내 희생한다는 차원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영적인 차원의 교제도 원하지 않습니다. 흔히 말하는 교회에서의 “은혜의 삶”을 거부합니다. 성령님이 내 속에 인격적으로 임하셨을 때의 결단과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자신의 삶의 변화를 싫어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기도는 하나의 형식이 되고 방편이 되지만, 결코 삶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방법’이 되지 못합니다. 기도는 철저하게 추상적인 개념에 머무르게 됩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아주 추상적인 개념에 머무르게 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예수님에 대하여 아주 자세히 알기를 원하며, 그분께서 당신의 삶에 주인이 되시므로 일어나는 변화를 기대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고린도 전서 12장 3절에 “…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기도하며 그분과 동행하기로 하는 것은 아주 강력하고 심플한 결단을 요구합니다. 다른 삶의 방식이 시작되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당신의 삶의 주인이신 그분이 주인이 되시도록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동의의 과정에 방해가 되는, 이 영적인 과정에 방해가 되는 것을 끊어야 합니다.

얼마 전 집회에 갔을 때, 한의원을 하는 장로님이 저를 진찰했습니다. 저는 잘 몰랐는데, 이분에 의하면 제가 오랫동안 감기 증세처럼 몸살을 앓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목이 많이 상해 있고 염증으로 다른 기능적인 이상이 온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처방 중의 하나가 “찬 것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찬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더운데 어쩌란 말입니까? 그러나 대답은 간단합니다. 건강을 위한다면 찬 것을 끊어보십시오. 분명히 좋아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찬 것을 끊으면 무슨 낙으로 사느냐고 생각했는데, 끊어보니까 몸도 좋아지고 따뜻한 것이 먹히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적 건강을 해치고, 성령님의 임재를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끊어야지요.”

그 순간부터 성령님과의 동행이 시작됩니다. 성령님이 동행하시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사람의 삶입니다. 
기도하면서 성령님이 동행하실 수 있는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주 추상적인 기도에 머무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즐기고, 세상 사람과 함께 하던 것을 끊으면 외로워질까 봐 걱정이 되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싸우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과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이기심과 편안함을 위하여 외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영적 삶을 살기 위해 외로워져야 한다면 기꺼이 감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살다 보면 말입니다. 축구를 하다가 다리가 부러지기도 합니다. 전쟁에 나가 싸우다 보면 부상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면서 십자가도 지고, 고통도 당하고, 어려움도 처해 보라는 것을 그렇게 이상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둘째,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비밀한 일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니 기도하는 사람들이 혹 오해를 받는 것이 있습니다. “저 사람은 미친 것 같아!” 라고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령님을 모시고 살기로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라면 이러한 오해가 아주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세상이 보지 못하는 비밀한 일을 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지만 자의적인 신앙과 거룩함을 상실했다면 이것은 본래의 신앙이 아니라 사이비 신앙에 불과합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진리”로 나타납니다. 비 진리가 드러난다면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폴 레이더라는 유명한 라디오 설교자는 이런 예화를 즐겨 사용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는데 어떤 소년이 길가의 담장에 얼굴을 대고 서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아이는 때때로 펄쩍펄쩍 뛰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 사람은 ‘도대체 무슨 일인데 저 애가 저 난리인가? 혹시 저 애의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냐?’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애는 담장 너머에서 벌어지는 야구 경기를 그 구멍을 통해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애는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안타를 칠 때마다 펄쩍펄쩍 뛰면서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행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았던 그 애는 행인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

기도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눈에 보이지 않는 분’과 동행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미쳤다고 오해할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고, 성령님께서 우리의 심령 가운데 역사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분명히 미친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살아서 역사하시고 계시는 한 우리는 미친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분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를 오해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에게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과연 세상 사람들이 오해할만한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기도가 여러분의 삶을 얼마나 변화시켰습니까? 기도하기 전과 후가 달라지지 않았다면, 하나님과 동행하며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지 않았다면 오늘 드리는 당신의 기도는 능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기도하며 당신은 세상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영이 당신의 심령 가운데 진리를 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당신은 가지지 못했던 담대함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거룩한 나의 삶에서 동행하고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강점’으로 살라고 합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약점’으로 삽니다. 약점을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약점을 드러내고 삽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잠재력을 개발하라!” 혹은 “당신 안에 잠자는 거인을 깨우라!”라고 제안합니다. 인간의 능력은 무한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나요?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을 보세요.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세상과 신앙이 다른 점입니다. 우리의 능력은 다른 데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우리의 삶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시면 적극적인 사람이 됩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됩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추상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은 구하고 찾는 자에게 찾아오십니다.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그러면 성령님은 어떻게 역사하시나요? A. W 토저는 “내면의 부흥”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우리의 영에 영으로 역사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사실 우리는 이 성령님의 신비를 설명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심을 압니다. 토저의 책 [세상과 충돌하라]에 나오는 말입니다. 

“기독교의 신비적 요소가 싫어서 기독교만 보면 뒷걸음질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기독교가 ‘설명할 수 없는 종교’라고 말하면서 거부감을 보인다. 나는 이런 사람들에게 ‘인생은 설명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라고 한결같이 대답을 들려준다. 내가 생명을 설명하지 못하지만, 나는 살아 있소. 사랑에 대한 나의 이해가 걸음마 수준이지만,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오. 이 세상 모든 것을 내가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체험한다오.“

신앙의 문을 통해서 우리의 가슴속으로 들어오는 성령님의 능력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만들어내는 분이 아니시다. 온갖 종류의 섬뜩한 미신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만들어내지만, 성령님은 그렇지 않다. 그분은 대상을 둘러싸고 있는 안개를 걷어버리고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신다. 성령님은 산을 창조하시지 않는다. 다만 그분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며, 그럴 때 우리는 밝은 햇살 가운데 웅대한 자태를 드러낸 산을 볼 뿐이다.“

그렇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오시면 모든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내면의 부흥이 일어납니다. 막혔던 삶의 문제들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요한일서 2장 27절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이제 기도가 방법이라는 사실이 이해가 가십니까? 여러분이 외적으로 기도하는 그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기도하는 여러분의 삶에서 성령의 동거하심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동거하심이 여러분의 삶의 내적인 부분, 즉 내면의 부흥을 일으키십니다. 

기도하며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그분 성령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시며, 그분 때문에 여러분의 삶에서 결단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간혹 세상이 여러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미쳤다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담대하십시오. 여러분이 성령님에 취한 사람이 되면, 절대 잘못되지 않습니다. 단지 세상이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 이 이해하지 못함이 조롱거리가 된다면 성령님의 역사가 아닙니다. 이 이해하지 못함은 세상 사람들의 두려움이 될 것입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기도가 여러분의 삶에 방법이 되심을 믿으십니까? 오늘도 여러분의 삶에서 성령님과의 구체적인 역사가 일어나고 있음을 믿으십니까? 대충 타협하고, 대충 얼버무리는 삶에서 벗어나십시오.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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