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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석] 고향인가, 본향인가? (창 2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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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인가, 본향인가? (창 24:1-9)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을 보내고 있습니다. 추석을 맞아 고향으로 향하는 귀성행렬은 그야말로 가관(可觀)입니다. 하기야 한국인구의 44%가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라고 하니 그럴 만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북에 고향을 두고 있습니다. 고향을 떠났던 제1세대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한 맺힌 생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평양을 방문하여 대동강으로 내려가 페트병에 대동강 물을 담아 와서는 장로님께 드린 적이 있습니다. 장로님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던 것을 기억합니다. 

왜 이렇게 모두들 고향을 그리워할까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 마음에 ‘영원’에 대한 그리움,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전 3:11). 

여기 ‘영원’이란 첫째, 하나님 자신을 뜻합니다. 누구든 그 마음에 각자 나름의 하나님이 있습니다. 의지하는 대상, 신앙의 대상이 있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 여기 영원이란 ‘고향’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고향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넣어 주셨습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참 아름답고 순수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고향에 얽힌 스토리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죽기 전에 아들 끈을 이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몸종을 고향으로 보내면서 그곳에서 이삭의 아내를 택하라고 하였습니다(창 24:4). 그러자 몸종이 제안하기를, 여자가 따라오려고 하지 않거든 이삭을 고향으로 데려가도 되냐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하라”(창 24:6). 

아들을 장가보내지 못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홀로 늙어도 좋으니 고향으로 데려가서는 안 된다는 강한 의지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왜 아브라함은 이삭이 그곳에 가는 것을 단호히 거절합니까? 왜 아브라함은 이삭이 직접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을 막았을까요? 여기에 깊은 영적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바로 고향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고향’이라는 단어가 두 번 등장합니다(4절, 7절). 여기에 어떤 깊은 진리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런 의문을 가지고 아브라함의 생애를 추적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본토, 친척, 아비 집, 즉 고향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 하란을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오래 머물렀습니다(창 11:31). 이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두 번째 나타나 명령하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창 12:1-2). 그는 마지못해 가나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때문에 그의 마음은 언제나 고향, 즉 콩밭에 가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가리켜서 ‘히브리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창 14:13). ‘히브리’란 단어는 ‘에블라’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에블라’란, 당시 하란을 중심으로 북쪽에 세력을 확장했던 거대한 왕국의 이름입니다. 그는 고향을 에블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도 그를 에블라, 즉 히브리 사람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몸은 비록 그곳을 떠났지만 마음은 항상 그곳에 가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연이어 사건 두 개가 터집니다. 하나는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야만 하는 사건입니다(창 22장). 다른 하나는 사랑하는 아내 사라의 죽음이었습니다(창 23장). 이 두 사건 앞에서 그는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것은 고향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육적인 고향’에 연연해 왔는데, 하나님은 그 고향을 떠나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믿는 나에게는 새 고향이 있다. 여기 가나안이다.” 

아브라함 스토리는 고향으로 시작하여 고향으로 끝납니다. 우리는 이런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그에게 얼마나 많은 약점이 있었습니까? 흉년을 피해 애굽으로도 내려갔고(창 12:10),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시키기도 했습니다(창 12:13).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여종과 동침하여 아이를 낳기도 했습니다(창 16:1). 

그런데 그에게서 한 가지 도전받는 것은 그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생활한 100년 동안 그의 육적인 고향을 단 한 번도 찾은 흔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도 역시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때문에 고향을 떠나는 것,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번 떠난 뒤로, 그는 다시 육적인 고향에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아들을 장가보내는 중요한 순간에도 아들을 고향으로 보내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이곳 가나안 땅을 본향으로 삼았습니다. 자신도 그곳에 묻혔습니다. 아내도, 아들도, 자부도, 손자도, 손부도, 대대손손 그곳에 묻혔습니다. 

이 아브라함이 본향으로 삼았던 가나안이 영적으로 어디입니까? 우리가 가야할 저 천국입니다. 저곳이 나의 본향입니다. 저곳을 더 사모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생활이란 무엇입니까? 고향에서 본향으로의 이동입니다. 내 마음, 몸, 생각, 정성. 물질을 옮기는 것입니다. 내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내 영적 아버지로, 내가 태어난 고향으로부터 내가 장차 갈 영원한 본향으로, 해 아래서 해 위로, 육신의 혈육에서 영적인 혈육으로(마 12:48) 옮기는 것, 이게 믿음생활입니다. 

믿음이란 ‘나온바 본향’을 떠나 ‘더 나은 본향’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이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나온바 고향’을 떠나 ‘더 나은 본향’을 향하여 나아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인(印)쳐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면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곳에 보물을 쌓아두기를 즐겨하며, 그곳을 향하여 나아가기를 소원하십니다. 이것이 올바른 믿음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곳이 우리의 본향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육적인 고향, 갈대아 우르 혹은 하란을 떠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고향 가나안을 더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향을 버리라, 고향에는 가지 말라, 부모도 버리라, 정을 끊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육적인 고향을 생각할 때에 가지는 그 애틋함과 그리움보다 영적인 고향 천국을 더 사모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명절, 고향에 가기 위해 치르는 희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새벽에 일어나고, 아니 잠을 자지도 않고 가족들을 재촉하여 떠납니다. 교통체증으로 열 시간 이상 걸려도 싱글벙글입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습니다. 선물을 이것저것 정성스럽게 마련합니다. 고향에 가려고 하니 가슴이 두근두근합니다. 잔잔한 흥분까지 느낍니다. 

바로 이와 같은 열정과 사랑으로 저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열정과 열심, 그리고 정성을 가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옥성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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