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들으라! 하나님의 백성아(5) (신 6:6-9)

첨부 1


들으라! 하나님의 백성아(5) (신 6:6-9)

: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성도들에게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특별히 한가위를 맞아,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의 가정이 행복이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명절을 맞아 ‘민족의 대 이동’을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만큼 고향을 떠나서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품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인간이기에 고향을 그리워하고 찾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또 함께 살아야 할 사람들이 함께 살지 못하는 이 사회의 문제를 생각합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2 노령자 통계’에 의하면 지난해 기준으로 도시지역 노인의 63.8%가, 농어촌지역 노인의 79.1%가 자녀와 따로 살고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자녀와 함께 살고 있는 어르신들이 도시에서는 다섯 명중 두 명이 되지 않고, 시골에서는 다섯 명 중 한 명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함께 살아야 할 사람들이 함께 살지 못하는 것은 시대의 불행입니다. 

어르신이 홀로 살고 있다는 것은 어르신에게만 불편한 문제가 아닙니다. 심각한 문제는 공동체가 파괴되었다는 것입니다. 가족의 해체는 민족 공동체를 파괴하고 결과적으로 역사의 단절을 가져올 것입니다.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래된 문화를 이어가는 것도 중요한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버이에게 말씀하시고, 그 어버이가 자신의 자녀에게 그 말씀을 전하여주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시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일 찐데 우리는 자녀들에게, 다음 세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가족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그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그의 자녀들에게 들은 말씀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모세는 그들의 기억을 위하여 구체적인 방법을 주었습니다.
  

I. 기억을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들어야 할 말씀은 ‘쉐마’의 말씀입니다. 쉐마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기 위하여 어떻게 하도록 하였습니까? 모세는 백성에게 무엇이라고 가르쳤습니까? 6절 말씀입니다.

: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1. 마음에 새기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항상 그 말씀이 그 마음에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그 말씀을 기억만 하고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감정과 의지와 생각에 말씀이 스며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역사에 새겨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 속에서 주님의 향기를 풍겨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기 위한 가장 탁월한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7절 말씀입니다.

: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2. 자녀에게 가르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칠 때 가장 많이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 자신일 것입니다. 저는 성도들에게 ‘성경의 파노라마’를 가르침으로 제 자신이 확실하게 기억하게 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가르침으로 그 내용을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습니다. 또 가르치기 위하여 스스로 그런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가르치기를 주저하는 것은 자신이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가르침으로 스스로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살아내는 것을 훈련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억을 위하여 가장 가까이 쉽게 볼 수 있는 곳에 말씀을 기호와 표로 두게 하였습니다. 8절 말씀입니다.

: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3. 몸에 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손목에 매고 이마에 붙이는 것이 겉으로 꾸미는 형식으로 흘러 비판을 받게 되기는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뜻까지 무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심장에 그 말씀이 머물도록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장에서 함께 뛰게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우리에게 머물러 있게 하셔서 우리를 성전으로 삼으신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또한 말씀을 듣고,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고, 적용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억을 위하여 시청각 교육도 하셨습니다. 매일 문을 열고 나가고 들어가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음을 그의 백성들이 기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4. 문에 기록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문은 세상과 소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올 때 자신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았는지를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을 열고 세상을 향하여 나아갈 때마다 그 말씀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출입이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것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명절을 맞아 오고 가는 모든 발걸음이 복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들어가고 나아감이 다른 사람에게 축복이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자녀에게 가르치라는 말씀을 좀 더 깊이 생각하려고 합니다. 자녀에게 가르치는 방법은 자신이 기억하기 위한 방법이자 자신의 변화를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역사를 이어가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전승’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전승(傳承)은 문화, 풍속, 제도 따위를 이어받아 계승함입니다. 말씀을 자녀에게 물려주어 잇게 하는 것입니다.
  

II. 전승을 위하여  

우리는 자신의 기억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역사를 이어가기 위하여, 우리의 공동체가 같은 경험을 가지기 위하여 또한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까?

7절 말씀입니다.

: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우리가 이 말씀에서 첫 번째로 관심을 가지려는 구절은 ‘부지런히 가르치며’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n"v/솨난]은 ‘뾰족하게 하다’, ‘구멍이 뚫리다’는 뜻의 말입니다. 상징적으로 ‘마음속에 뿌리박게 하다’는 것입니다. 자녀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질 정도로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로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부지런히 가르치다보면 마음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1.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의 마음에 새겨지도록 부지런히 가르치기 위해서 고려하여야 할 중요한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가 그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들이 가정교육에서 마주치는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국어나 수학이나 영어와 같은 지식을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어떤 삶을 살든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윤리를 가르치는 사람이 비윤리적이면 큰일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의 말과 행동이 다르면 가르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미 게가 옆으로 걸으면서 아기 게에게 옆으로 걷지 말고 앞으로 똑바로 걸으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옳은 말이 아니라 옳은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모의 고민입니다.

하물며 자녀에게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을 가르치는 부모가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말로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신앙적으로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자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부모 자신이 수행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칭얼대는 아이를 업고 “맹구야 울지마! 맹구야 울지마!”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아이는 무엇이 불편한지 그치지 않고 아버지 등에서 계속 칭얼댑니다.

지나가던 할머니가 이 모습을 한참 지켜보더니 아이를 달래는 아빠가 안 되었다 싶어 다가와서 등에 업힌 아이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그래 맹구, 착하지! 맹구야 울지마!”하였습니다. 

그 때 아이를 업고 있던 아빠가 말하였습니다.
“할머니, 맹구는 제 이름입니다. 지금 울고 싶은데 참고 있는 것은 아빠인 저입니다.”

아빠가 자기 이름을 부르면서 자기에게 울지 말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말씀을 기억하기 위하여 자녀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자녀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도 배울 뿐만 아니라 자녀를 통하여 역사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교육을 위한 부모의 책임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아무리 좋은 모범을 보여도 따라하지 않는 자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예를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인생의 마지막에 백성들 앞에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보라 나는 늙어 머리가 희어졌고 내 아들들도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았느냐? 누구의 나귀를 빼앗았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누구의 손에서 받았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삼상 12:2-3)

그 때 백성들이 한 말은 무엇이었습니까?

“당신이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고 압제하지 아니하였고 누구의 손에서든지 아무것도 빼앗은 것이 없나이다.”(삼상 12:4)

사무엘은 백성들 앞에서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들 앞에서 자신의 삶을 자신 있게 드러냈습니다. 사무엘은 자신의 자녀들과 백성들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의 아들들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사무엘이 늙어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들은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였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배우지 않은 짓을 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이렇게 사무엘에게 항의하였습니다.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삼상 8:5)

사무엘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온전한 모습을 보고도 그대로 배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와는 정반대로 행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바르게 산다고 자식들도 반드시 보고 배우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녀에게 모범을 보이지 않아도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모습을 보여도 소용이 없다고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하여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자녀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가르치지 위하여 또 어떤 수고를 하여야 합니까? 이번에 관심을 가지려는 말은 ‘강론하다[rB'D;/다바르]’는 말입니다. 이 말의 본래 의미는 ‘정돈하다’입니다. 강론은 가르치고 토론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로는 단순히 ‘말하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의도적으로 가르치려고 해서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생활의 대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자연스럽게 전달하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부모가 생활 전반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한두 번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보여 주어야 합니다. 앞에서 ‘부지런히 가르치다’는 말과 크게 다른 말이 아닙니다. 같은 말을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반복하여 가르쳐야 합니다.

‘반복’은 가장 탁월한 학습 방법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들에게 말씀을 전하면서 반복하여 가르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을 빌립보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빌 3:1)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은 망나니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우습게 여겨 규정을 무시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하인들을 시켜서 누가 제사를 드릴 때 고기를 삶고 있으면 삼지창을 들고 다니며 가마솥이나 노구솥이나 뚝배기나 냄비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휘저어서 삼지창에 꽂혀 나오는 것은 모두 가져갔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기름을 태워 바치기 전에도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에게 와서 ‘구워 먹을 고기를 내놓아라.’ 하고 생떼를 썼습니다. 그들이 하인들을 시켜 저지른 잘못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너무나 심하였습니다. 아버지 엘리는 자기의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온갖 못된 짓을 하였고, 그리고 만남의 장막 문간에서 봉사하는 여인들의 방에 들기까지 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들들을 꾸짖었습니다.

“어쩌자고 그런 짓을 하느냐? 나는 너희가 못된 짓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있다. 이놈들아, 못쓴다!”

아버지 엘리는 분명히 자녀들을 꾸짖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상 3:13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아버지 엘리는 아들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꾸짖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가 아들들의 죄악을 금하지 아니하였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말하였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식들이 못된 행동을 고치도록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부모는 자식에 대하여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결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자녀를 위한 기도를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계속하여 생각하여야 할 말씀은 부지런히 그리고 반복하여 가르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오늘 말씀은 부지런히 반복적으로 가르치는 구체적인 방법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주목하려는 말씀은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집 안에서 쉬고 있을 때나 집 밖에서 길을 갈 때나 어디에서든지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3. 어느 곳에서나 가르쳐야 합니다.

어떤 상황,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가르치는 것으로는 유대인들을 따를 수 있는 민족이 없을 것입니다. 

유럽의 역사에 ‘게토(ghetto)’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게토는 소수 인종이나 소수 민족, 또는 소수 종교집단이 거주하는 도시 안의 한 구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게토가 유명하게 된 것은 ‘유대인 강제 거주 지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토는 나치가 유태인을 통치하고 그 존엄성을 짓밟고 대량 학살을 자행하는 과정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독일은 일반적으로 게토 내에서 어떤 형태의 학교나 지속적 교육도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게토 안에서라도 유대인들이 외워서 가지고 있는 율법을 무슨 수로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게토 안에도 비밀 예시바가 조직 되어 자녀들에게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그들의 말인 히브리어가 보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발전을 이룬 것은 힘들고 어려울 때도 부모들이 자녀들을 가리킨 덕택입니다. 어렵고 힘든 시절에도 자녀들을 가르친 수고의 열매를 우리가 먹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부모는 어떤 형편에서도 자녀의 신앙교육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교회교육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는 부모가 되십시오. 교회학교를 위하여 기도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부지런히 그리고 반복하여 가르치는 또 다른 구체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이번에 주목하려는 말씀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입니다. 이것은 집안에서 쉬기 위하여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언제든지’입니다.


4. 어느 때에든지 가르쳐야 합니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모든 남자는 쉐마 구절을 이용하여 하루 두 번씩 신앙고백을 해야 했습니다. 어린이가 말을 처음 하여 교육이 시작될 때 외우게 하는 것이 쉐마 본문입니다. 그리고 죽음이 다가올 때 마지막으로 외우는 것이 또한 쉐마 구절입니다. 

그런데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라는 구절에 대한 해석이 학파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문자적인 해석에 더 집중했던 샴마이 학파는 쉐마를 암송하려면 저녁에 실제로 누운 자세로 해야 하고, 아침에는 실제로 일어나서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문자적인 해석에 덜 묶여 있었던 힐렐 학파는 쉐마를 외우는 것이 특정한 자세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상황 가운데서 아침과 저녁 시간에 쉐마를 암송하도록 가르칩니다. 양측의 차이가 있지만 어떤 경우이든지 하루 두 번씩 외우도록 하였다는 것은 같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나 자녀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럼으로 어느 때나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5월 25일, 감리회 원로장로회전국연합회가 ‘제1회 신앙의 명문가상’ 시상식을 열었습니다. 감리교인으로 대를 이어 신앙을 지켜온 가정들 중에서 21 가정을 선정한 것입니다. 그 자리에는 정영민장로님도 계셨습니다. 아버지 정학진장로가 김제 청하 신창교회를 섬기셨고, 정영민장로 자신이 우리교회 장로로, 그리고 아들 정승룡목사가 대구교회를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손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3대가 장로로 목사로 섬기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닙니다. 한 가문에서 5, 6대가 대대로 기독교 신앙으로 살아왔다는 것은 ‘대대로 기독교 집안’이라고 말해도 좋은 것입니다. 

원로장로회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신앙 명문가를 위해 캠페인을 벌인다고 합니다. 이를 위하여 △온가족 주일 지키기 △매일 가정예배 드리기 △성경 읽고 묵상하기 △정직하고 바르게 사는 법 배우기 등등을 실천하기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을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자손들에게로 이어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것을 신앙의 전승, 또는 영적 계대(繼代)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지엄한 명령입니다. 

우리교회의 모든 가정들이 모두 신앙의 명문 가정을 이루시는 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