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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석] 베띠 이야기 (렘 1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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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띠 이야기 (예레미야 13:1-11)

9월의 마지막 날이면서 주일이며, 추석이기도 한 오늘, 하나님께 예배하시는 교우님들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평강이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특이한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띠를 사서 허리에 띠라고 하셨습니다. 1-2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베띠를 사서 네 허리에 띠고 물에 적시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띠를 사서 내 허리에 띠니라>  

그런데 얼마 후 하나님께서는 그 베띠를 멀리 있는 유브라데 강가에 묻으라고 하셨습니다. 3-4절을 보면 <너는 사서 네 허리에 띤 띠를 가지고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거기서 그것을 바위 틈에 감추라 하시기로 내가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가서 그것을 유브라데 물 가에 감추니라>고 하셨지요. 

그리고 얼마 후에는 다시 가서 베띠를 파내라고 하셨습니다.  6절을 보면 <여러 날 후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내가 네게 명령하여 거기 감추게 한 띠를 가져오라 하시기로>라고 했고, 예레미야는 그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파낸 베띠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내가 유브라데로 가서 그 감추었던 곳을 파고 띠를 가져오니 띠가 썩어서 쓸 수 없게 되었더라> 베띠는 썩어서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게 오늘 본문에서 발견하는 한 토막 이야기입니다. 이 짤막한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우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매우 소중한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세마포>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여기서 베띠는 제사장들의 에봇 위에 두르는 허리띠와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제사장이 하나님께 제사하러 갈 때 입는 의복 위에 동여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띠는 매우 거룩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여기서 베띠는 우리들을 가리키고,  베띠가 소중하듯이 우리도 소중한 존재입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최고의 작품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사람만이 하나님을 인식하고 경외하고 찬송합니다.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응답합니다. 우리에게는 고귀한 영혼이 있어 하나님과 교통합니다. 여러분, 부부가 같이 사는데, 한 사람이 담벼락 같다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마음을 통하며 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과 통하며 살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고, 손을 내미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모세를 부르시고,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길거리의 돌멩이처럼 보지 않으시고, 당신의 파트너로 부르십니다. 주님은 우리 곁을 스쳐지나가지 않으시고, 멈추어 서십니다. 여리고성 입구에서 멈추어 서셔서 시각 장애인을 불러 눈을 뜨게 하시듯이 우리 인생 곁에 멈추어 서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아브라함에게 하셨듯이 하나님의 벗이 되고, 바울이 표현한 대로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늘 보살피십니다. 시편 8편 4절은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먹이고 입히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시듯, 반석에서 마실 물을 주시듯,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오늘 여기까지 우리를 먹이고 입히셨습니다. 앞으로도 천국에 이르기까지 이끌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는 버리거나 포기해도 좋을 잃은 양 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주님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며, 찾아야할 양입니다. 모두가 사랑스런 당신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결코 포기란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을 천대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우리는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둘째로, 오늘의 이야기는 이토록 귀한 존재도 있어야 할 자기 자리를 떠나면 추해지고 비참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베띠를 유브라데 강가에 묻었다가 다시 파냈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썩어서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베띠는 사람의 허리에 있어야 행복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허리춤을 떠나는 그 순간 베띠의 존귀함은 사라지고 맙니다. 아무리 소중해도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으면 추하게 됩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머물러야 할 곳, 소속되어야 할 곳에 있지 않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홀로 떨어져 방황하고 있습니다. 

한 남자가 철망 담장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는 학교 교사고, 그가 매달려 있는 철망 담장은 학교에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 영화의 주인공인 <바르트> 선생이 다가서서 인사를 합니다. 그랬더니 감격하면서 묻습니다. <선생은 내가 보입니까? 내가 정말 보인단 말이지요.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뛰어 갑니다. 무슨 말일까요? 지금까지 그는 늘 거기 담장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고, 아는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무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부터 잊혀진 투명인간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극도의 외로움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집에 퇴근해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해도 아내는 텔레비전을 보느라고 눈길도 안 줍니다. 아들도 자기 일에만 몰두하고 인사도 안합니다. 그는 버려진 존재와 같았습니다. 

이처럼 망가진 상태에 있기는 주인공 바르트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는 매우 뛰어난 선생님이지만, 어느 학교에 정식으로 근무하지 않고, 기간제 교사로 여러 학교를 전전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과 정이 들어 친밀한 관계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머니가 약물 과다 복용으로 죽었다는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거리의 여자로 사는 어린 여자를 데려다 보살펴 주기도 하고, 방황하는 학생들에게 희망의 빛을 비춰 주기도 하지만, 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습니다.  

이 영화는 2011년에 만들어져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에 출품되었던 <디태치먼트, Detachment>라는 영화입니다. <디태치먼트, Detachment>라는 말은 <무심함, 거리를 둠>이란 뜻입니다. 누구에게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고, 남이 가까이 오는 것도 싫어합니다. 영화 속의 모든 사람들은 함께 있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으로부터 떨어져 있습니다. 이러는 동안 인격이 황폐하게 되고, 삶이 망가집니다. 

사람이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로 산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많은 병자들과 고아들을 돌보아 노벨 평화상을 받았던 <마더 테레사> 수녀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재앙은 나병이나 결핵이 아니라 소속되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명절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정든 이들을 찾아 떠났습니다. 그 불편한 교통 여건에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 떠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과거에 <속해 있었던 곳>을 찾아감으로써 현재도 <여전히 거기 속해 있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과거엔 속해 있었는데, 지금은 더 이상 속해 있지 못하다면 그의 삶은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이 그 곳의 일원임을 발견하게 될 때 기뻐하고 안심합니다. 이건 사람의 본능 같은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속해 있는 곳에 있을 때 평안합니다. 가정에 있을 때 평안합니다. 예배를 드려도 자신이 속한 교회에서 예배할 때 마음이 평안합니다. 아무리 해외여행이 좋고, 호텔이 편리해도 자기 집 아랫목만한 곳은 없습니다. 외국으로 다니다가 인천 공항이나 김해 공항에 내리면 벌써 마음이 평안합니다. 자신이 속한 곳에 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속해 있어야 가장 근원적인 곳, 우리에게 최고의 행복을 가져다 줄 곳은 어디입니까? 그 곳은 다름 아닌 아버지 하나님의 품입니다. 아버지의 품, 아버지의 허리춤에서 벗어나는 순간, 진정한 행복은 끝입니다. 

예레미야가 말씀을 선포하던 당시의 남 왕국 유다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우상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 순간 그들은 썩은 베띠처럼 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삶은 고단했고, 나라는 약해졌고, 바벨론에게 멸망하는 길을 걸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들에게서 행복은 사라졌습니다. 

유브라데는 예레미야의 고향인 아나돗에서 북동쪽으로 250마일이나 떨어진 먼 곳입니다. 그 먼 곳까지 가서 베띠를 묻게 하시고, 다시 파내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얼마 지나지 않으면 유다는 유브라데 강가에 세워진 바벨론에게 멸망하여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올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그들의 다가온 불행한 미래를 암시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하나님께 속해 계십니까? 하나님의 품에 계십니까? 이건 우리의 존재와 행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신이 하나님께 속해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명절을 맞아 고향에 가는 마음을 생각해 보세요. 아들은 아무리 멀어도 늙은 부모님 집에 가고 싶어 합니다. 계획을 세우고 선물을 준비하고, 용돈을 준비합니다. 벌써 마음이 부모님 집으로 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만든 옛날 음식, 세련되지 못한 그 빈대떡과 송편과 걸쭉한 국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습니다. 예전 자신이 자라던 방에 큰 대자로 누우면 너무도 행복하고 편안합니다. 

그러나 명절이 되면 오히려 마음이 더 불편한 사람이 있지요? 누굴까요? 며느리입니다. 며느리는 시댁보다 친정에 가고 싶어 합니다. 벌써 며칠 전부터 들떠 있는 남편이 밉습니다. 어쩔 수 없이 따라가기는 하지만, 다음에는 반드시 친정부터 가겠다고 다짐합니다. 며느리는 시댁에 가도 불편하여 어서 빨리 떠났으면 합니다. 잠도 깊이 안 오고, 불편합니다. 

여러분, 아들과 며느리 중 늙은 부모에게 속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당연히 아들이지요, 며느리는 몸만 와 있지 마음은 시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판단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음이 편한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속한 곳에 오면 마음이 편하고 행복합니다. 당연히 있을 곳, 큰 대 자로 누워 잘 곳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예배당에 와 있는 마음이 어떠신지요? 편하고 행복하시면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몹시 불편하다면, 억지로 왔다면 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와서 앉으면 잠이 오는 분은 어떨까요? 아마 그 분은 엄마 집에 가서 자는 사람처럼 편한 사람 아닐까요? 편하지 않으면 잠이 안 옵니다. 남들이 다 보는데도 조금도 부끄러운 생각이 안 들고 매 예배 때마다 잘 수 있다면 그분은 교회를 부모님 집처럼 생각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는 아버지 집에서 하나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공급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집을 떠날 생각을 했습니다. 감사 대신 불만을 느꼈습니다. 이런 모습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 이래로 모든 사람 속에 있는 현상입니다. 에덴동산은 모든 것이 갖추어진 완벽한 곳이었지만, 그들은 무엇이 불만인지, 뭐가 부족한지 나무 열매를 향해 손을 내밀었던 것입니다. 그 후로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모든 사람들도 감사보다 불평을 하면서 손대지 말아야 할 곳에 손을 내밉니다. 하나님의 품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또 하나님의 품을 떠나는 이유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탕자는 아버지가 없어도 잘 살 수 있을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돼지와 함께 뒹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돼지 곁에 앉는 순간, 아버지 없어도 잘 살 수 있을 것으로 여겼던 그의 교만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유다 백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도 하나님 없어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고, 더 행복할 것 같았지만, 그들의 교만은 베띠처럼 썩어버렸습니다. 

또 여기서 <교만>으로 번역된 단어는 <탁월함>이라고도 번역됩니다. 뛰어난 재주, 능력,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과 재주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면 그 모든 탁월함도 다 썩게 됩니다. 

본문 9-10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따라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이 띠가 쓸 수 없음 같이 되리라> 아멘. 

목마른 사람은 샘으로 가야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목마른 사람이 메마른 광야를 향해 나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인생이 고단하고 목마르고 힘들어 지칠 때 우리가 찾아갈 곳은 하나님의 품입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은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11절을 보세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 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을 거꾸로 만들어야 합니다.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 같이 내가 땅끝교회의 온 교인들을 내게 속하게 하여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더니, 그들이 단 한 번도 나를 떠난 적이 없었고, 내 품에서 행복하고 귀하게 되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금번 명절을 찾아 정든 부모님 집을 찾는 마음으로, 영원한 아버지의 품을 찾으십시오. 그 품에 속하십시오. 절대로 떠나지 마십시오. 힘들고 지쳤을 때 더욱 그렇게 하십시오. 탕자가 다시 아버지 집에 속하기 위해 돌아오듯이 우리도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혹시 아직 하나님의 품에서 사는 삶이 익숙하지 않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조금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의 품에서 평안을 누릴 때가 올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시댁을 어려워하던 며느리도 세월이 지나 아이들을 낳고 키우다보면 시댁이 자기 집이 됩니다. 친정에서 보낸 시간보다 시댁에서 보낸 세월이 더 길어집니다. 나중에 죽으면 친정 식구가 아니라, 시댁 식구로 묻힙니다. 

우리 중에도 지금은 하나님의 품이 불편한 이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을 따르면 언젠가는 하나님의 품처럼 평안한 곳이 없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처럼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품에 있기 전까지는 참 평안을 알지 못하였나이다!> 
잠시 후에 우리는 다음 찬양을 부르고자 합니다. 

힘들고 지쳐 낙망하고 넘어져 일어날 힘 전혀 없을 때에 
조용히 다가와 손 잡아주시며  나에게 말씀하시네 
  
나에게 실망하며 내 자신 연약해 고통 속에 눈물 흘릴 때에 
못자국난 그 손길  눈물 닦아 주시며  나에게 말씀하시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너는 내 아들이라  나의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 
  
이번 명절에 이 찬양을 부르면서 우리가 영원히 속해 살아갈 보금자리가 되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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