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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의 종의 동역자를 세우는 공동체 (행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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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종의 동역자를 세우는 공동체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우리 가운데는 교회만 생각하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힘든 일을 만나도 교회 때문에 여전히 신이 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은 분명 크게 은혜받은 성도들이고 성령 충만한 제자들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움직이는 열쇠요 방향이요 정신입니다. 교회가 타락하면 세상이 타락하지만 반대로 교회가 살아 있으면 세상은 희망에 넘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경험합니다. 목사의 설교를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함께 하는 성도들을 통해 예수님의 심장을 느낍니다.

성경적이고 이상적이고 건강한 교회의 모델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보여준 바로 그 교회! 

이 교회는 성령 충만한 공동체이고, 예수님의 삶을 사는 소그룹 공동체입니다. 이 교회는 표적과 기사가 계속되는 공동체이고, 고난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이며, 거룩과 정직과 순결을 추구하는 공동체입니다.

사도행전적 교회의 여섯 번째 특징은 평신도 리더들을 세워 주의 종과 동역하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초대교회의 일꾼 세우는 모습을 살펴보고,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를 찾아보겠습니다. 그리고 헌신적인 일꾼을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해보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1. 초대교회의 일꾼 세우기

사도행전 교회의 여섯 번째 특징은 평신도들 중에서 사도들의 동역자들을 세워 사도들의 사역을 돕도록 했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 ‘동역자’(fellow worker)란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고(요삼 1:8),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골 4:11).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이 임하고 부흥이 되면서 급격히 대형교회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많아지면서 문제도 생겨났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현지 출신인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외지에서 온 헬라파 유대인들로 구성이 되어 있었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들은 두 파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집사 일곱을 뽑았습니다. 집사들은 성도들을 돌아보아 구제 사역이 골고루 이루어지도록 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교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사도들의 목회 사역을 돕기 위해 새로운 은사, 즉 평신도 사역이 도입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3,4절).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라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교회의 직분자는 목회자를 돕게 하기 위해서 세웠다는 의미입니다. 직분자는 목사를 돕는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직분자가 목사를 견제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은 비성경적이요 마귀의 속임수임을 알아야 합니다.  

목회자는 양떼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하나님 나라의 꿈을 갖게 하는 존재입니다. 이를 위해 목회자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전무해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의 손발은 누가 맡을 것입니까? 교회가 수행해야 하는 예배 전도 봉사 양육 친교 관리의 구체적인 사역을 누가 해야 합니까? 헌신된 평신도들입니다. 

목회자는 감독이나 코치와 같습니다. 선수들을 훈련시키고 전략을 세우고 선수를 선발해서 임무를 주고 경기에 임하게 하는 것이 감독의 직무입니다. 선수들의 움직임이 답답하다고 경기장에 뛰어드는 감독은 없습니다. 

평신도들은 현장에서 뛰는 운동선수와 같습니다. 감독에게 훈련받은 대로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하며, 감독이 지시한 전략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역은 평신도들입니다. 그들은 매일 세상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평신도가 변하면 세상이 변합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행전적인 교회는 적절한 일꾼들을 세워 사역을 맡기는 공동체입니다. 세움 받는 일꾼은 반드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며 칭찬받는 사람” 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반드시 주의 종의 동역자들이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의 교회에서는 사도들이 성령 충만한 평신도들과 환상적인 팀워크를 이루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집사들은 성령으로 충만해야 했습니다. 혈기만 앞세우던 자들이 비둘기같이 온유해졌고, 불같은 성령충만으로 열정적인 봉사를 감당했고, 강한 바람같은 성령충만으로 힘있게 사역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일꾼들은 지혜가 충만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말씀으로 충만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믿음이 충만했고, 주위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직분자에게 필요한 것은 초대교회 일곱 집사처럼 담대한 믿음이고, 주위 사람들과의 성숙한 인격적 관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는 평신도들 가운데서 사도들의 동역자를 세워 교회의 많은 일들을 감당하게 했습니다. 사도행전적인 교회를 꿈꾸는 우리 교회는 주의 종의 동역자를 계속하여 배출해내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

초대교회는 120문도로 출발했습니다. 사도행전 6장의 시점은 새로이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가 많은 발전을 이뤄가고 있는 시기입니다. 본문의 일곱 집사는 장로, 안수집사, 권사 서리집사 등의 일꾼 개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어느 시대의 직분자들에게나 필요한 매뉴얼과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에서 직분자를 세운 것은 일을 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자신의 충실한 동역자인 두기고를 보내면서 그를 소개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엡 6:21). 

여기 ‘진실한 일꾼’ 이라고 한 것은 교회에 공을 세웠으니까, 또는 나이 들었으니까 논공행상에서 덤으로 직분을 땄다는 식의 개념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직분자는 일을 하기 위하여 부름받았습니다.

교회에서 일을 하되 어떻게 할 것입니까? 성경은 ‘봉사의 일’이라고 단정짓듯 말합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2).  

‘봉사의 일’은 곧 댓가 없는 일을 말합니다. 교회의 일에는 댓가가 없습니다. 교회는 오히려 헌금을 바치게 하고 시간을 드리게 하고 재능도 바치게 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댓가는 없습니다. 

즉 직분자는 교회를 섬기되 댓가없는 봉사로 섬겨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땅에서는 댓가가 없는 대신 하늘의 상급이 있을 뿐입니다. 계시록 2:10을 보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직분자는 그저 죽도록 주님의 몸된 교회에 충성할 따름입니다. 죽기까지 충성함으로 생명의 면류관을 받습니다. 이 생명의 면류관은 구원의 면류관이자 상급의 면류관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믿음으로 받되, 상급은 일함으로 받는 것입니다. 

직분은 봉사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직분을 겸손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겸허하게 들으십시오. 

눅 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이와같이 댓가를 바라지 않는 봉사의 자세가 주님께서 기뻐 받으실만한 직분자의 자세입니다.  

직분을 받았습니까? 그러면 묵묵히 감당하십시오. 그리고 누군가가 칭찬을 하면 ‘나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라고 말할 줄 아는 겸양을 갖추시기를 바랍니다. 초대교회 일곱 집사처럼 아름다운 봉사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직분자는 자신이 ‘무익한 종’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롬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빌 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골 1:7=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직분자는 주님의 종입니다. 종은 어떤 존재입니까? 종은 노예입니다. 노예는 아무런 소유나 권리가 없고, 그저 일만 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신 바 된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시키신 일을 종처럼 묵묵히 일할 따름입니다. 

노예는 ‘내가 이리 가겠습니다 저리 가겠습니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이리 가라 해야 이리 갈 수 있고, 저리 가라 해야 저리 갈 수 있습니다. 노예란 소모품과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많은 요구를 하며 살아갑니까? 우리는 자신의 입술로 주님의 종이라고 늘 되뇌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진정 주님의 종이라고 믿습니까?

성도 여러분! 본문의 ‘집사’의 원어는 ‘디아코노스’(diakonos)로서, 봉사, 일꾼, 종, 배 밑에서 노 젓는 사람 등을 의미합니다.  

‘노 젓는 사람’은 영화 벤허를 생각하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배 밑에 죄수들을 양쪽으로 수십명씩 앉히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사슬로 묶어놓습니다. 중안의 조정수가 북을 치며 리드를 하는데, 죄수들은 북소리에 맞춰 노를 젓습니다. 평소 항해할 때는 천천히, 그러나 전쟁시 적 함대를 향해 돌진할 때는 빠른 북소리에 맞춰 죽을 힘을 다해 노를 저어야 합니다.

여기 직분자는 노젓는 자이고 북치는 자는 교회의 목회자로 비유됩니다. 직분자는 주님이 세워놓으신 북치는 자에게 순종하여 동역하는 일꾼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원리입니다.  

교회의 일꾼은 계급장을 어깨에 달고 과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묵묵히 배 밑에 노를 젓는 사람입니다. 북소리가 빠르면 빠르게 노를 젓고, 느리면 느리게 노를 젓고, 그저 묵묵히 노를 저을 따름입니다. 북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북소리에 맞춰 움직이는 것 --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인을 사랑하고 주인을 위해 충성하는 종의 모습은 출애굽기 21장에 나오는 귀뚫은 종의 이야기를 통해 감동적으로 다가옵니다. 안식년이 되어 자유를 찾은 종이 평생토록 주인을 섬기기를 원하면 송곳으로 귀에 구멍을 뚫습니다. 종의 귀에 구멍을 뚫는다는 것은 자원하여 종이 된다는 것이고,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께 고리가 끼워져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종은 종의 자리에 있어야 평안하고 행복합니다. 예수님에게 자리를 내어놓으십시오. 그리고 묵묵히 북소리에 맞추어 노를 저으십시오. 

교회의 직분자들은 북소리에 순종해야 하는 자들임을 명심하십시오. 힘들고 괴로울 때가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주님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원하여 갈보리로 가시지 않으셨습니까? 초대교회 일곱 집사처럼 아름다운 봉사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헌신적인 일꾼을 세우려면?

저는 우리 교회의 대표적 특징으로 헌신된 평신도들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의 초창기부터 온 몸을 다해 헌신하셨던 리더들은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변함없이 바나바나 갈렙처럼 조용하면서도 뜨겁게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평신도들 중에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가 되거나 선교사로 헌신한 사람이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에 브리스가와 아굴라 같은 아름다운 동역자들을 많이 세워주셨습니다. 저는 그분들을 생각하며 기도할 때마다 말할 수 없는 감동에 젖습니다. 때로 끝없이 계속되는 목회 사역에 눌려 힘들고 지칠 때마다 그분들의 전화 한 통화, 문자 메시지 한 줄, 또는 말없이 웃어주는 한 번의 미소가 신선한 청량제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브리스가 부부를 가리켜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다”(롬 16:3) 라고 증언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브리스가와 아굴라들은 오늘도 242구역에서, 여러 사역팀에서, 그리고 주일학교와 찬양대에서 헌신적으로 동역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헌신적인 일꾼을 더 잘 세울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온 성도들이 직분자의 자격과 직분자를 세우는 목적에 대하여 사도행전 교회가 가졌던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직분자에 대한 성경적 가치관을 온 회중이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우리 교회의 직분자의 자격은 성령 충만과 말씀 충만과 믿음 충만, 그리고 주위의 칭송을 받는 자에 한하여야 합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6절) 일곱을 선출해 내었던 초대교회처럼, 우리 교회도 이런 사람들을 중직자(장로, 집사, 권사)로 세워야 합니다. 

세워진 일꾼들에게는 직분자의 자세와 목적에 관한 지속적인 교육과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주의 종이 말씀과 기도에 전무할 수 있도록, 주의 종의 동역자의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영적, 정신적, 실제적 훈련이 계속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21세기 교회에 유행하는 집사의 등급 분류에 아래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1등급= 암소집사 -- 교회의 짐을 다 짊어지고 가며,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사람 

2등급= 양(羊)집사 -- 목회자가 이끄면 이끄는대로 순종하는 사람 

3등급= 막대기집사 -- 자기 할일은 다 알아서 하지만, 넘치는 충성은 하지 않는 사람 

4등급= 비행기집사 -- 띄워주고 칭찬하면 좋아하지만, 아니면 교회를 떠나려는 사람 

5등급= 미꾸라지집사 -- 요리조리 잘도 빠지는 사람, 핑계대는 사람 

6등급= 개구리집사 -- 아무데나 퐁당퐁당 끼여들고 간섭하고, 구설수를 만드는 사람 

7등급= 염소집사 -- 질투에 눈이 멀어 잡아당기며 갈라놓고 흩어놓고, 높은 곳에만 올라가려는 사람 

8등급= 서서잡사 -- 술도 잡수고, 담배도 잡수는 사람  


그런데 여러분 자신은 몇 등급이십니까? 지금 우리 교회의 일꾼들의 등급 분포는 어떻게 되어 있는 것 같습니까? 우리 교회가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바로 그 교회로 달려가기 위해서 최우선적인 부분이 바로 직분자의 준비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미국 폭스사가 신문에 판매직 사원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냈습니다.그런데 무려 1천 5백명의 지원자가 자기소개서를 보내왔습니다.폭스사는 그중에서 단 한명의 직원만을 채용했습니다.이 사람의 자기소개서는 간략했습니다.  

“저는 현재 가구점에 근무하고 있습니다.어느 때라도 가구점을 한번 방문하시면 세일즈맨으로서의 능력을 금방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가구를 사는 척하고 한번 방문해 주십시오.제 머리는 빨간색이기 때문에 저를 알아보기가 쉽지만 저는 손님을 알아볼 수가 없어요.저는 단지 당신을 평상시의 손님처럼 맞을 것입니다.그리고 저의 판매실력과 손님에 대한 친절이 어느 정도인지를 금방 알게 될 것입니다.그것을 보고 저를 채용해 주십시오.”

기회는 항상 준비된 사람에게 찾아옵니다.세상의 법칙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교회의 일꾼의 자세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영국의 선교사이자 탐험가인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서 봉사 활동을 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리빙스턴의 친구 몇몇이 아프리카에서 고생하는 친구를 위해 그를 도울 사람 몇 명을 보내겠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 끝에는 “…음, 그러니까 그곳까지 가는 길을 알려주게” 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리빙스턴은 이런 답장을 보냈습니다.  

“이곳까지 오는 길이 있어야만 오겠다는 사람들이라면 나는 사양하겠네. 나는 길이 없어도 오겠다는 사람을 원해!” 

길이 없어도 가겠다는 사람, 그만큼 패기 있고 진실한 사람을 원한다는 뜻이겠지요. 혹 우리는 지금 너무 쉬운 길을 찾아 기웃거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미래가 보장된 안전한 길만 고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교회의 일꾼은 ‘길이 없어도 가겠다는’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찬송가 305장(나같은 죄인 살리신)을 지은 죤 뉴턴(John Newton)을 아십니까? 그는 한 때 노예 상인이었다가 회심하여 훌륭한 설교가이며 기독시인이 된 사람입니다. 그의 임종 때 젊은 목사가 그를 방문하여 하나님의 훌륭한 일군을 잃게 되었다고 아쉬워하였습니다. 그 때 뉴턴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먼저 가지만 그러나 언젠가 당신도 오게 될 것이오. 당신이 오면 분명 나를 찾을 것인데, 내가 어디에 있게 될는지 미리 말해 두겠소. 나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구원받은 강도의 발아래 앉아 있을 것이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직분자의 직분은 하나님이 친히 주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직분을 어떻게 감당했는가?’ 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다시 오시면 반드시 살아온 모든 삶에 대해 청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직분자 여러분! 직분은 영광스러운(롬 11:13) 의(義)의 직분입니다(고후 3:8-9). 직분 받은 사실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딤전 1:12). 

직분을 감당할 때에 마귀의 올무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마 16:23). 직분을 감당하지 못함으로 꾸짖음을 듣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느 13:11). 죽도록 충성하십시오. 그리하면 주님께서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계 2:10).

직분을 다한 자가 누리게 될 축복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위를 누리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고 아끼는 성경 구절을 소개합니다.  

딤전 3:13=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일하는 것에 대해 눈길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약속은 우리가 일한대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놀라운 것은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순교하는 모습을 주님이 지켜보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직분 감당함을 잊지 않으십니다. 이땅에서도 축복하시지만, 혹 그대로 숨질지라도 그 상급을 절대 잊지 않으시고 이후에 천국에서 우리가 일한대로 반드시 갚아 주십니다.   

이제 우리 모두 우리가 사랑하는 우리 교회를 이처럼 주의 종의 동역자를 세우는 공동체로 만들어가는 일에 몸과 마음을 모으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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