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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자인가, 빈자인가 (약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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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인가, 빈자인가 (약 1:9-11)

9.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지금은 어느 시대보다 부의 불균형으로 인한 양극화의 문제가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경제적 변화에 따라 자본주의화 되어가는 시대 속에서 결국은 부가 어떻게 균형을 이룰 것인가, 양극화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는 곧 분배와 공존의 문제로 압축됩니다. 오늘 우리는 부가 무엇인가, 가난함은 어떤 문제인가를 전부 다루기는 어렵지만, 본문에 부자와 빈자에 대한 야고보의 권면에 집중해서 말씀을 다루고자 합니다.

야고보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자본주의가 번성한 오늘뿐 아니라 2천 년 전에도 돈 문제는 중대한 주제였습니다. 돈은 가난한 자와 부한 자를 나누어 놓습니다. 우리의 강남과 강북의 차이, 미국의 베버리힐스와 다운타운의 차이는 어떤 면에서 사회적 신분의 차이로까지 이어집니다. 노동자와 기업가의 갈등, 부의 분배 문제는 쉽게 답이 나지 않는 첨예한 사회 이슈입니다. 돈이 있는 곳에는 갈등이 일어나고, 심하면 투쟁이 일어나고, 더 심하면 혁명이 일어납니다. 

또한, 돈에 의한 비교는 상대적인 행불행을 느끼게 만듭니다. 생존이 보장되지 않은 절대적 가난, 절대적 빈곤도 문제이지만, 오늘 우리 시대에는 상대적 빈곤이 더 힘이 듭니다. 돈을 가지지 않아 불행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너무 많이 가진 것 때문에 힘들고 행복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비교에 의한 상대적 절망감이나 박탈감은 범죄로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돈을 가졌느냐, 가지지 않았느냐에 따라 우리 삶과 사회의 구조, 국가의 문제를 재편하는 이 어려운 시대 속에서 신자들은 어떻습니까? 물질이 주는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가요? 세상이 만들어 놓은 물질중심의 문화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세계를 유지하면서 물질주의에 영향을 받지 않고 믿음을 유지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실, 가능하면 강단에서 물질 문제를 다루지 않는 것이 좋다는 생각들이 있지만, 물질의 문제는 다루어져야 합니다. 영적인 문제와 물질 문제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물질 문제로부터 영적 자유를 확보하지 못하면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신자임에도 물질에 있어 세속적인 관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돈 문제에 대한 신앙적 정리를 해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야고보는 신앙의 성숙을 위해 돈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9절의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가리켜 낮은 형제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왜 낮은 형제라고 했을까요?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를 낮게 생각하는 경향을 가집니다. “나는 별 볼일이 없어, 나는 무능해, 나는 못난 사람이야.”라는 좌절감과 절망감, 피해의식으로 자신을 실패자로 생각하고 낙심하고 자기를 낮추어버리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가난에 짓눌려 살다 보면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경향을 띱니다. 

요즘 우리 사회 안에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서 자신의 삶을 비관하여 우울증에 빠지고, 자살하는 일이 굉장히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부자들도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가난한 사람들의 비율이 훨씬 높은 것이 사실입니다. 가난은 삶의 근본적인 것을 흔들어놓습니다. 삶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다른 모든 의욕을 빼앗아 갑니다. 

특히 자본주의적 세상에서 경쟁에서 밀리면 절대적 빈곤상태에도 빠질 수 있고, 생존을 유지할 수 없는 지경까지도 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편지를 받는 1세기경의 그리스도인들은 더 심각한 환경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절대적 소수인 상황에서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일자리를 잃어버리고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경제적인 압박을 받았습니다. 신앙을 선택한다는 것은 경제적인 위기와 고립을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선생이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라”고 하는 것은 당시의 환경에서 해석한다면, 낮은 형제는 돈이 없어서 가난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기로 선택한 것으로 인해 스스로 가난한 삶을 살기로 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야고보는 단호하게 명령합니다. 돈이 없는 것 때문에 기죽지 말고 자랑스럽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가난함 자체보다 더 경계해야 하는 것은 자존감의 상실입니다. 물질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우리가 잘 정리하지 않으면 가난 자체보다 가난으로부터 오는 정신적 열등감과 자신감의 상실이 훨씬 더 큰 고통을 줄 수 있습니다. 자기를 무시하고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며 현재의 가난이 자기의 무능력 탓이라고 여깁니다. 

이런 열등감에 빠지면 교회에서도 돈이 있어야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이런 마음의 상태는 결국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고 신앙의 손실을 입게 됩니다. 이런 경우 자기 자신만을 비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가진 자에 대한 분노와 증오심, 비난하는 태도로 발전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가난한 자에게 찾아올 수 있는 심리적 약점입니다. 자칫하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너무 좁아지고, 가슴에 응어리가 생기고 한이 맺힙니다. 가진 자에 대해서 용납하는 마음보다는 부정적인 감정이 지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부자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 자꾸 일어나고 질투심이 생긴다면 정리를 잘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자에 대해 욕을 하거나 질투심이 있다는 것은 내 안에도 돈에 대한 욕망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누구보다 돈에 대한 욕망을 가진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낮은 형제가 자기의 높음을 자랑할 수 있을까요? 


1.물질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질 유무와 인간의 가치는 별개입니다. 자본주의는 사람을 돈으로 계산합니다. 연봉에 따라 사람의 가치를 논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세속적 관점의 평가에 우리를 내맡기면 안 됩니다. 성경적 관점은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사랑 받은 자녀로서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치 있는 존재요, 우리의 가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충분히 입증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경은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합니다. 높음을 자랑해야 할 이유는 물질의 유무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 때문입니다.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사회적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약자의 모습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광스러운 신분을 잃어버리지 말고,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사실 외적인 조건들은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부자냐 가난한 자냐 하는 것은 어느 때의 상태를 말하고, 그 상태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신분은 변함이 없고, 영구합니다. 

그러므로 돈의 유무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존귀한 신분이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돈의 유무에 따라 신앙을 평가할 수도 없습니다. 청교도 목사 새뮤얼 윌러드는 “부자가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아니듯이 가난도 그의 진노나 미움의 증거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특히 야고보가 강조하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가난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은 자신을 폄하하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무시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자신의 높은 위치를 당당하게 자랑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대에 신앙 때문에, 믿음을 따라 살려고 하다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가난은 정말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일이고, 그것으로 자신을 무시하거나 낮추어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2. 물질적인 가난 때문에 영적으로는 더 풍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함이 주는 유익이 의외로 많습니다. 일부러 가난하려고 애를 쓸 필요는 없지만, 어쩔 수 없이 가난한 삶을 산다면 생각을 바꾸어 보십시오. 물질의 어려움으로 인해 마음이 낮아질 때 오는 영적 풍요로움이 분명히 있습니다. 나에게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영적인 축복의 순간이 됩니다. 최고의 부자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물질을 생각하지만, 진짜 부자는 천국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우리 마음이 낮아져 있을 때 하나님을 사모하고 천국을 소유하는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상태에서 만족하는 삶을 훈련하면, 욕망은 힘을 잃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보면 무엇인가 채우려고 합니다. 이것에 익숙해지면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상태에서 만족한다면 이 세상과 다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지금 물질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그때 악해지지도 말고, 약해지지도 말아야 합니다. 부한 사람에 대해서 “그래, 잘났다. 억울해. 창피해서 못살겠어. 돈만 있으면 다냐!” 

그러지 말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마음을 높이지 마십시오. 앞선 믿음의 사람들은 자발적 가난을 선택했고, 물질의 가난을 통해 주시는 독특한 은혜를 누리면서 살았습니다. 물질은 없지만 마음의 부요함으로 세상의 어떤 것도 부럽지 않은 영혼의 충만함을 경험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기도를 배우고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아무것도 없을 때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뇌성마비로 고통 속에서도 주옥같은 시를 지은 송명희 시인은 “나 가진 재물 없으나 /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 나 남에게 없는 것 있으니 /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 공평하신 하나님이 /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 공평하신 하나님이 /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흔들리는 것을 기준으로 삼고 흔들리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살면 그 인생은 날마다 흔들립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초점이 흐려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궁핍함은 하나님께만 집중하기에 아주 좋은 환경입니다. 돈이 없다고 비굴해지거나 궁색하거나 천박하거나 믿음의 깊이를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만약 돈이 없다는 것 때문에 자존감이 떨어진다면 내 삶을 붙들고 있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돈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돈은 많지 않지만,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드는 영적 깊음과 권위를 잃지 않는 삶을 사십시오. 그것은 영적인 부요함에서 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저희 것임이요」라는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이루어질 때 물질주의의 세상 안에서도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존감을 유지하면서 당당하고 멋있게 살 수 있을 줄 믿습니다. 

본문 10절에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세상의 악은 돈과 연루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성경에도 부한 자들에 대한 경고가 많은 것은 부함으로 인해서 오는 위험성 때문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돈에 대해서 너무 소극적인 태도를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부에 대해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태도를 가진다면 세상의 사람들에게 경제를 다 맡겨야 할지도 모릅니다. 신자들 가운데도 좋은 기업가들이 나와야 합니다. 돈 자체는 나쁘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 중성입니다. 

성경에도 아브라함, 욥, 솔로몬도 부자였습니다. 존 웨슬리는 “가능한 많이 돈을 벌어라 가능한 많이 저축을 하라. 가능한 많이 나누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벌고 저축하는 것은 나누기 위함인 것입니다. 

문제는 돈의 파워입니다. 돈은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과 돈이 연결될 때 문제가 심각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비하여 섬길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돈은 하나님과 견줄만한 신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소유하면 돈을 다스리고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닙니다. 돈이 사람을 지배합니다. 

돈은 사람들의 영혼을 흔들어 놓는 신으로 변합니다. 부가 주는 위험 요소가 많지만 먼저 영적인 부분의 유혹에 대해서 주목해야 합니다. 물질적 풍요는 사람들의 마음과 인격을 한순간에 장악해버립니다. 그래서 내가 가진 부를 지키고, 더 많이 늘리고, 더 많이 향유하고자 합니다. 결국, 물질적인 집착이나 물질적 풍요로운 삶은 자신도 모르게 영적인 나태를 가져오고, 하나님보다 물질에 더 몰두하게 만듭니다. 영적인 관심을 약화시키고 물질적인 일에 더 민감해지도록 만듭니다. 배가 부르면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적어지기 쉽습니다. 

유럽의 교회들은 기독교가 국가적 종교이지만, 믿는 사람은 3%에 불과합니다. 그 세속화의 한가운데에 물질이 있습니다. 물질이 들어오면서 기독교가 급격하게 쇠락한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도 이 부분이 적지 않게 밀고 들어와 있습니다. 영적인 적극성이 나도 모르게 사라지는 것입니다. 신자의 생명은 영적인 목마름입니다. 이것은 신앙을 건강하게 만드는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런데 물질적 부요는 영적 목마름을 빼앗아 가기 쉽습니다. 마음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또 다른 시험은 물질적 부로 인해서 높아지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마음이 식어지는 것은 돈이 주는 안정감 때문입니다. 점점 기도생활이 어렵고, 기도를 한다고 해도 형식적으로 흐릅니다. 

시편 23편 1절이 “돈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로 바뀌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의 실체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 의존성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이제 우리 힘으로 살겠다”는 독립 선언과도 같습니다. 에덴동산의 인간은 모든 것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신적인 존재였습니다. 모든 권세를 인간에게 주셨지만 유일하게 선악과 하나만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따먹은 것은 하나님을 거부한 것입니다. 교만이 무서운 것은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하나님께서 교만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엄격하고 강력하게 다루십니다. 개인도, 국가도, 기업도 교만하면 끝나는 것을 역사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물질만능주의는 결국 하나님을 서서히 따돌리고 있습니다. 카네기는 “고난을 이겨내는 사람이 백 명이라면 번영을 이겨내는 사람은 한두 명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땀 흘리며 부를 쌓기 위해서는 노력을 했으나, 그 다음을 준비를 하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성취 이후에 주어지는 부와 성공에 짓눌려 망하는 것입니다. 

C.S루이스는 사탄의 시각에서 볼 때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곧 경쟁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경쟁심은 타락한 본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더 많이 가지지 않아 문제가 되기보다는 너무 많이 가져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선 줄로 아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나에게 힘이 있고 무엇인가 자랑할 만한 것이 있는 순간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경고해주는 것입니다. 

가끔 어떤 분은 돈을 많이 주신다면 하나님을 잘 섬기겠다는 다소 순진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 안에는 물질의 욕망이 교묘하게 숨어 있습니다. 돈이 있고 없고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나의 믿음의 순수한 태도입니다. 지금의 상태와 전혀 상관없이 최선을 다해서 순수함으로 주님을 온전히 섬기려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도 돈이 많은 사람들이 많으면 큰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메시지입니다.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우리가 모신 하나님은 돈의 위력에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고 바라보며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며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권한이 많아질수록 그 힘을 의존하지 않으려는 끊임없는 훈련을 스스로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하지만 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습니다. 정말 귀중한 것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사랑을, 존경심을, 인격을 살 수 없습니다. 집은 살 수 있지만 스위트 홈은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돈을 가지고 있을 때 겸손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고자 할 때도 부를 자랑하고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자존심을 훼손하지 않는 섬세함이 필요합니다. 내가 가진 돈을 내가 쓴다는 태도는 미성숙함을 말합니다. 엄밀히 따지면 내 돈은 내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우리는 청지기들입니다. 돈을 사용할 때 지혜로움과 영적인 민감성이 필요한데 이것이 성숙함입니다. 물질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기를 바랍니다. 10절에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절에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부의 유한성, 부의 생명이 짧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가난도 일시적이고 부도 일시적입니다. 특히 우리 시대에 필요한 말씀입니다. 물질은 풀의 꽃과 같아서 왔다 갔다 합니다. 누구든지 부자가 될 수 있고, 빈자가 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내 삶에 목을 매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부가 아닙니다. 부요함도 가난함도 우리의 삶의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없습니다. 물질이 없다고 너무 절망하지 마십시오. 돈만 좀 없을 뿐이지 그 외에 내가 가진 것이 얼마나 많은가를 확인해보십시오. 물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물질의 유혹에 시달리며 영적인 부요까지 놓치는 것만큼 억울한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가진 것으로 너무 자만하지 마십시오. 영원한 부는 없습니다. 주어진 것은 책임일 뿐입니다. 많이 가졌다는 것은 이웃에 대한 짐을 많이 진 것입니다. 물질의 풍요로 영적 빈곤의 위험성이 높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내가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인지 물질인지를 늘 확인해야 합니다. 

참된 부요란 하나님 안에서 자유 하는 삶, 하나님을 소유하는 자들에게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부요함이 세상이 주는 메시지로부터 자유하게 하고 흔들리지 않게 해서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자족하는 삶을 살게 할 것입니다. 물질이 있고 없고의 문제와 상관없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기쁨과 만족을 얻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물질의 문제로 영적 태도가 흔들리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기는 백성으로 고귀하고 기품 있는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규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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