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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 (눅 12: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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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 (눅 12:13-21) 

 
사람은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갖고 살아갑니다. 똑같은 사안을 놓고서도 다양한 견해가 표출되는 것은 사람들이 가진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갑’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을’이 무시하는 것은 둘의 가치관이 다르다는 증거입니다. 자유 민주국가에서 사람은 저마다 법과 질서를 어기지 않는 한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릇된 가치관을 가지고 살면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타인에게도 불행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어린이 성폭력 사건이 연이어 발생해서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 합니다. 왜 성폭행범들은 가책도 없이 그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일까요? 가치관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가치관에 의하면 그 같은 비열한 행위가 가치 있게 평가되는 것이지요. 

왜 우리 사회에 살인과 폭력과 인신매매와 같은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것일까요? 그것은 인명을 경시하는 가치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가치관은 우리의 생각과 언동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올바른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어떤 경우에 놓일지라도 악하게 살지 않고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올바른 가치관이란 그 본질이 어떠한 것일까요? 우리는 그 답을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한번은 한 사람이 주님께 나아와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랍비에게 가서 조언을 구했는데, 아마 이 사람은 예수님의 중재로 그의 곤란한 문제를 해결받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신 다음, 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시고, 이 같은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주님의 이 말씀은 오늘날처럼 세속화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참된 가치관이 무엇인지 깨우쳐 줍니다.

첫 번째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 16:26)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온 천하를 다 얻은들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일단, 목숨을 보전한 다음에 재물이든 명예든 의미가 있지, 내가 죽고 나면 그 모든 것이 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 같은 이치를 알지 못하고 제 목숨을 해치면서 까지도 재물을 얻으려고 애씁니다.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육신의 생명이든, 영적인 생명이든 생명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생명을 북돋아주지 아니하고 위축시키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마약이나 술, 담배가 나쁜 것은 그것이 사람의 생명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음주 운전이 나쁜 것은 그것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무슨 법이나 제도나 종교나 예술이나 심지어는 음식조차도 그것이 생명을 해치는 역할을 한다면 나쁜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온 이 사람은 재물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신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하였습니다(골 3:5).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 우상숭배인데, 탐심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탐심은 자기 자신을 끔찍이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생명을 해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상숭배에 빠지는 이유는, 남보다 더 많은 복을 받겠다는 욕심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상숭배자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탐욕이 나쁜 것은 자연 이치를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샘은 그 물을 자꾸 퍼내야만 늘 맑고 시원한 생수를 낼 수 있지, 물을 퍼내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면 오래잖아 물 근원이 막히고 썩고 맙니다. 사람도 마찬가집니다. 남에게 사랑을 베풀기를 즐겨하는 사람은 일평생 그같이 아름다운 삶을 지속하지만, 받기만 하고 베풀 줄 모르는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성경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생명의 이치는 주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과목은 그 자신이 자랄 뿐 아니라, 맛난 실과를 사람들에게 제공합니다. 하지만 죽은 과목은 아무 것도 나눌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이 거듭난 사람은 그 자신이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될뿐 아니라, 남에게 사랑을 베풀고, 불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저들도 생명을 얻게 하는데 힘씁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 영이 죽어있기 때문에 아무런 선한 열매도 맺히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의 재물 나누는 일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그 대신, 사람들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생명 얻는 길을 알려주는 데 관심을 두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생애 동안에 주님께서는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셨고, 배고픈 자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장 관심을 갖고 추구하신 것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생명을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생명이란 곧 영적 생명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생명과 영적 생명, 이 둘 다가 소중하지만, 우열을 가린다면 영적 생명이 훨씬 더 귀한 것입니다. 

육신의 생명은 길어야 백 년을 넘지 못하지만, 영적 생명을 가진 사람은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 16:26) 하신 말씀은, 곧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서 영적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이 무슨 유익이 되겠느냐? 사람이 무엇을 주고 영생을 바꾸겠느냐?”는 말씀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영생을 얻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종류의 탐욕을 내버리고 영생을 주신 데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질만능주의의 가치관이 잘못되었음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대단히 큰 부자입니다. 부자들은 돈벌이를 잘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경제 환경이 부자에게 유리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이 부자는 그 해 농사를 지었더니 대풍이었습니다. 드넓은 들판에서 거둔 알곡을 쌓아둘 창고가 협소했습니다. 그는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마음속으로 궁리하던 중에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습니다. 

“그렇지, 내가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요즘도 그렇지만 농사를 지어서 수지를 맞추려면 저장을 잘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비좁은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둘 계획을 세웠으니, 사업 수완이 탁월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부자의 이 같은 계획을 보고 어리석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지혜롭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 부자를 어리석다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이 부자는 그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부자가 한 말을 살펴보십시오. 그는 말할 때마다 “내”자(字)를 붙입니다. “내 곡간” “내 곡식” “내 물건” “내 영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열거한 것 가운데 어느 것 하나 본디부터 그의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남의 것을 가지고 내 것이라고 하는 사람은 도둑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부자는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7절에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비단 이 부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중에 본래부터 우리의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하나라도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우리의 생명부터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요, 우리가 지금 누리는 모든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올 때에 빈 손 들고 나오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욥은 이 사실을 알았기에 불시에 재앙을 만나 모든 재산과 열 자녀를 잃었으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고 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에게 있는 모든 것이 원래부터 여러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잠시 맡겨주신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달란트 비유에 나오듯이,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종 된 우리에게 각자의 역량에 따라서 달란트를 맡겨주신 것입니다. 주인이 한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 또 한 종에게는 두 달란트, 또 한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만큼 재능을 주셨습니다. 

왜 주신 것일까요? 그것 가지고 열심히 장사해서 많은 이문을 남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저는 미스 코리아와 같은 미인 선발대회를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얼굴이 잘생기고 몸매가 고운 것은 타고난 것이므로 자기가 잘났다고 자랑할 것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좋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좋은 두뇌를 주신 것이므로 자기 머리가 좋다고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남보다 뛰어난 점이 없다고 낙심할 것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가 받은 재능을 가지고 선한 일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에 나오는 부자는 많은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많은 선한 일을 해야 될 의무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의 생각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과 건강과 두뇌와 재물을 가지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성공하고 업적을 많이 쌓았더라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자기의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둔 악하고 게으른 종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 부자는 자기 일밖에는 안중에 없었습니다. 그는 매우 부지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밤이 늦도록 사업 구상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다 자기중심적이요 이기적인 행위에 불과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의 모습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는 가능한 모든 것을 저축해서 가능한 그 모든 것을 남에게 주는 것을 생활신조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가 옥스퍼드에 있을 때 한 해 수입이 30파운드였는데, 그는 28파운드로 생활하고 남은 2파운드는 남에게 베푸는데 사용했습니다. 그 후에 그의 수입이 60파운드, 90파운드, 120파운드로 증가했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28파운드로 생활하면서 나머지 돈을 남에게 베푸는데 사용했습니다. 로마 격언에 “돈은 바닷물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바닷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심해지듯이 돈에 집착하면 할수록 더 많이 소유하고 싶은 욕망은 끝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열심히 일해서 많은 돈을 버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돈의 노예가 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물질의 복을 주시거든 그것 가지고 거룩하고 선한 일을 위하여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성도님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라는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부자가 어리석은 둘째 이유는, 그가 물질로써 영혼의 양식과 위안을 삼으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부자는 크게 지을 창고에 곡식과 물건을 가득 채울 것을 생각하면서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는 재물로써 영혼의 욕구를 채울 수 있는 줄로 착각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많습니다. 며칠 전에 뉴스에 보니, 하루 저녁 술값으로 수백만 원 이상을 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왜 사람들이 그런 곳을 찾을까요? 단순히 자기를 과시하기 위한 것일까요? 아니면 젊은 여자들의 시중을 받는 것이 좋아서일까요? 아마 그런 이유도 없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살펴보면, 그들은 술과 향락으로 마음의 공허함을 채우려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잠언 31장 6절에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기쁘고 평안한 사람은 술에 취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주님 안에서 참 만족을 누린다면 육신의 향락에 탐닉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풍요로운 물질문명을 자랑하지만, 역사상 오늘처럼 영적, 정신적으로 빈곤에 허덕였던 시대는 달리 없을 것입니다. 어른이건 아이건 다 마음이 지치고 곤비한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원인을 물질의 결핍에서 찾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내가 불행한 것은 수입이 적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좀 더 많이 벌면 행복해 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현대인들은 이 부자와 본질상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풍요가 영혼의 갈급함을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육은 육이고 영은 영입니다.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세상 지혜로 영적인 세계를 알 수 없습니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는 경건한 바리새인이요 성경을 가르치는 랍비였고, 유대의 최고 종교재판소인  산헤드린의 의원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적으로 심히 곤비했습니다. 그래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주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이르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영적 상태를 아셨습니다. 외관상으로 볼 때에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사람이었지만, 영적으로 볼 때에는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라고  반문했습니다.

그에게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니고데모가 대답하기를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하였습니다.

현대는 물질만능시대요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으리만치 풍요로운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 물질적인 풍요가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을 영적인 데서 멀어지게 하고 육신의 일에 집착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어리석은 부자처럼 물질로써 영혼의 욕구를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11)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13)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암 8:11-13)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이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딱 들어맞았습니다. 이 시대는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우나 영적으로는 심한 기근과 기갈에 고통 하는 때입니다. 믿는 자들도 자칫 잘못하면 이 시대의 풍조에 마음 빼앗기고 도매금으로 흘려가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도님들께서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셔서 예배의 자리에 부지런히 나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눔으로 영혼의 만족을 누리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참 된 가치관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 나왔던 이 사람은 예수님을 그들의 시시비비를 가려주는 재판관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 사람처럼 잘못된 의도를 가지고 주님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한 때 교회를 다녔으나 지금은 옛 생활로 돌아간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들 중에는 육신이 약해서 시험에 든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하니까 교회에 따라 나왔다가 기대했던 대로 되지 않자 실망해서 떨어져나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바른 목적을 알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는 일차적인 목적은 영혼의 구원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 것이 예수 믿는 최고의 목적입니다. 그 외에 여러 가지 복들은 이를테면 덤으로 주시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세상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주님께 나오면 안 됩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인생들의 영원한 구주시며 영생이 되시기 때문에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마워” 자원하는 심정으로 주님을 섬기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부자가 밤늦도록 많은 계획을 세우고 또한 창고에 가득 곡식과 물건을 쌓아두었으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자기 영혼에게 말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에 이르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불러 가시니 이튿날 아침, 부자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론을 내리시기를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으십니까? 만약에 이 부자처럼 삶의 목적이 재물을 쌓는데 있다면, 가진 재물이 많든 적든 간에, 이 사회에서 성공하든 실패하든 간에 본질상 이 어리석은 부자와 다를 바가 없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입니다. 그러나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간다면, 경제적인 형편이 부요하든 가난하든, 이 사회에서 성공했건 실패했건 상관없이 여러분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로서 인정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 세상의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마시고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시고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시든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심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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