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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그네 인생 (벧전 2: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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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인생 (벧전 2:11-12) 
 
  
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오늘은 민족의 대명절 추석입니다. 금번 추석에도 부모형제를 찾아 고향을 찾는 귀성객들로 민족대이동의 행렬이 장관을 이룰 것입니다. 추석하면 대표적인 관습이 바로 차례와 성묘입니다. 차례와 성묘는 모두 조상들과 관련된 풍속들입니다. 그리고 조상들 하면 떨쳐버릴 수 없는 교훈이 하나 있는데, 인생은 나그네라는 사실입니다. 

한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잠자리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동네에는 대궐처럼 큰 집이 있는지라 주인을 불러 “저는 길가는 나그네입니다. 하루 밤만 귀댁에서 묵고 가게 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더니, 집주인이 말하기를 “이 집은 여관방이 아니니, 저 건너 객주 집으로나 가보시오.” 하면서 거절을 했습니다. 그 때에 나그네가 “그러면 주인장 하나 물어 보겠는데, 이 큰 집에서 몇 대나 살아오시는 것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주인은 “예, 나까지 16대가 살아왔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나그네는 “그러면 그 16대가 다 생존해 계신가요?” 하고 물었습니다. 주인은 “그야 다 세상을 떠났지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나그네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 집이 여관방이나 같지를 않습니까? 대대로 자고 가고 자고 가고 하기를 16대가 했지 않습니까? 그러니 나도 하룻밤 자고 갑시다.”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어떻게 더 이상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나그네로 하여금 하룻밤 자고 가는 것을 허락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2002년에 안식년 여행을 하면서 아주 실감나게 느낀 것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곧 인생이 나그네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이 나라 이 민박집, 내일은 저 도시 저 여관에 머물면서, 자신이 나그네임을 실감했는가 하면, 어떤 민박집에서 짧게는 하루 이틀 혹은 삼사일, 길어야 한 일주일 정도 머물다 떠나는 여행객들을 보면서, 그리고 수많은 기차역에서 잠시 머물다 떠나는 열차들을 보면서, 나그네 인생이라는 말이 그렇게 실감이 날 수가 없었습니다. 

월파 김상용 시인은 “오고 가고 나그네 길이오. 그대와는 잠시 동행이 되고”라고 노래했고, 유행 가수 최희준은 “인생은 나그네 길/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정이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고 노래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우리 성도들을 향하여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말합니다. 벧전 1:1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라고 했으며, 벧전 1:17에서도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했습니다. 인생은 모두가 나그네와 같습니다. 미국으로, 캐나다로,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야만 나그네인 것이 아닙니다. 한국에 살고, 고향에 살아도 나그네인 것입니다.

성경은 실로 여러 곳에서 인생을 가리켜 나그네라고 말씀합니다. 레 25:23에 보면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했고, 시 39:12에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고 했으며, 시119:54에 “나의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가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과 같은 믿음의 족장들은 모두 자신들을 이 세상에서 외국인이요, 나그네라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다.”고 했고, 성군 다윗 또한 자신을 나그네로 여겼습니다. 다윗은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없이 나그네와 우거하는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고 했는데, 그는 왕궁에 안주하면서도 ‘나의 나그네 된 집’이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진실로 인생은 나그네요 지나가는 행인입니다. 나이 많은 노인들이 자신을 가리켜 70객 80객이라고 하는 것은, 나그네로 70년, 80년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특히 족장 야곱이 애굽의 바로 앞에서 고백한 말은 유명합니다. 창47:9에 보면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자신의 삶을 한 마디로 압축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생애와 그 조상들의 생애를 모두 ‘나그네길’로 묘사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스펄죤 목사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그네라고 하면 

1. 세상에서 잘 알려지지 못하고 오해와 박해도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몇 해 전 대만에 갔을 때 손문 기념관에서 일본인에 의한 ‘남경대학살’ 장면을 담은 사진전을 관람하고 있는데, 한 젊은 중국인 남자가 우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침을 뱉으며 욕을 해댔습니다. 우리를 일본인으로 오해하고 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본인이 아니고 한국 사람이라고 했더니, 몹시 미안해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바클레이’에 의하면 초대교회 때에 이교도들이 교회를 고의로 비방한 몇 가지 실례를 들고 있습니다. 

1)기독교는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과 증오의 대상인 유대교 및 유대인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었으므로 비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2)그리스도인들이 사람 고기를 먹는다는 비방이었습니다. 이는 최후의 만찬 때 이것은 “나의 몸이다.” 라고 하신 말씀과, “이 잔은 새 언약의 피이다.”라고 하신 말씀에 대한 왜곡에서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3)그리스도인들은 부도덕한 행위, 심지어 근친상간을 한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인사할 때 입을 맞추는 등, 사랑의 교제를 하는 것에 대한 억측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해진 이 같은 중상과 비방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바른 평가와 판단을 기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2. 방심할 수 없고 늘 조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유럽의 어느 나라 어느 도시를 막론하고, 소매치기가 들끓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도 결국 소매치기를 한번 당하고 나서 그 때부터 복대를 차고 얼마나 돈을 소중하게 간수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깨닫기를 만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여행을 할 때에, 여권이나 돈을 소매치기 당하지 않기 위해서 애쓰듯이, 그렇게 믿음을 소중하게 간수하고 지키려고 한다면, 얼마나 귀한 일이 되겠는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벧전 5:8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사냥꾼이 총으로 산토끼를 쏘았는데 한 마리는 명중해서 그 자리에서 죽고 다른 한 마리는 부상을 당한 채 도망을 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사냥꾼이라면 두 마리의 토끼 중 어느 것을 먼저 잡으려고 하겠습니까? 도망치는 토끼라고요? 그야 물론 당근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마귀도 이미 자기의 밥이 된 세상 사람들보다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삼키려고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으니, 믿음을 빼앗기고 영혼을 약탈당하지 않도록 근신하고 깨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3)외국과 같은 세상에서 적은 혜택이라도 감사히 여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집을 나서면 고생이라는 말이 있지요? 해마다 여름이 되면 가슴 설레며 떠나는 피서 여행이지만, 집 나서면 고생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더구나 언어가 다르고 음식이 다른 외국에서는 말할 것도 없겠지요? 그러한 외국에서 적은 혜택이라도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여섯 명이 자야 하는 좁은 민박집에서 아직 학생들이 몰려오지 않아 저희 부부만 자도록 배려해 주었을 때 참 고마웠습니다. 

스위스로 가기 전 파리의 민박집에 ‘김치 호텔’이라고 선전해 놓은 홍보물을 보고, 스위스에 도착하여 잔뜩 기대를 갖고 김치 호텔을 찾았는데, 웬걸요 현지에서는 김치 호텔이라는 말은 간데없고 그냥 ‘TOURLIST HOTEL’이라고 간판을 달아 놓았어요. 그래도 다른 나라의 민박집에까지 김치 호텔이라고 선전해 놓았으니, 한국의 맛있는 김치가 나오려니 기대를 하면서 아침 식사를 하러 갔더니, 투숙객들 대부분이 서양 사람들이고, 메뉴도 거의 그들의 입맛에 맞는 음식들이었어요. 

그리고 한쪽의 조그만 솥에 밥이 담겨져 있고, 그 옆에 간장과 김치가 있는데, 아침에 얼버무린 완전한 생김치예요. 익은 김치는 냄새 때문에 염두도 못 내고, 그날그날 얼버무린 김치를 아침에만 내놓는 것이지요. 한국에서 같으면 상대도 하지 않을 생김치지만 그러나 어떻게 합니까? 그것도 감지덕지하고 먹었지요. 낮과 저녁에는 빵이나 햄버거로 때우다가, 어느 날 아침에 남은 그 밥 좀 줄 수 없겠느냐고 했더니, 한국인 지배인이 쾌히 승낙을 해서 저녁마다 밥을 얻어다 먹었습니다. 슈퍼마켓에서 피망이나 오이를 사다가, 집에서 가져 간 고추장을 찍어 밥을 먹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기왕이면 김치도 좀 달라고 했더니, 그 얼버무린 김치를 주면서 냄새가 새어 나가면 큰일 나니까, 랩을 주며 방문 틈을 다 바르고 먹으라고 그래요. 그래서 랩으로 복도 쪽의 문틈을 막고, 바깥쪽으로 향한 창문은 활짝 열어 놓고서 감지덕지 하고 먹었습니다. 이게 무슨 얘기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외국과 같은 이 세상에 살면서 적은 혜택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4. 하루 빨리 고국인 하늘나라로 가기를 소원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1980년 봄 프랑스의 부르세 병원에서 사르트르가 입원했습니다. 병명은 폐수종이었습니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 철학자로서 프랑스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런 사르트르였습니다만 병원에 한 달 가까이 있는 동안, 소리를 지르고 발악을 하고 미치광이처럼 고함을 쳐 댔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습니다.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지를 곁에 있는 아내에게마저 차마 묻지를 못했다고 합니다. 한 세계를 풍미하며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던 사르트르는 그렇게 소리 지르고 발악을 하다가 1980년 4월 16일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프랑스 언론들이 떠들어댑니다. “사르트르가 왜 그렇게 죽어야 하는가?” “자유를 그렇게도 외치던 그의 마지막이 그토록 비참한 이유가 무엇인가?” 어떤 독자가 신문사에 투고를 해서 이런 기사가 실렸다고 합니다. “사르트르의 말로가 그렇게 비참했던 이유는 그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가 사르트르를 자랑했다면 독일에는 ‘본훼퍼’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사르트르보다 앞서서 세계 대전 중 독일 수용소에서 나치에 항거하다가 죽었습니다. 어느 날 간수가 그의 감방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직감적으로 마지막 순간이 왔음을 알고, 함께 있던 감방 동료들에게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서 “형제 여러분! 나에게 죽음이 찾아 왔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 일은 마지막이 아닙니다. 시작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신 집으로 갑니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감방을 나갔습니다. 그 모습을 본 모든 사람들은 그를 뒤덮고 있는 기쁨과 평안을 보았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르트르와 본훼퍼의 차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무신론자와 유신론자의 차이일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과,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의 차이일 것입니다. 돌아갈 고향이 없는 사람과, 돌아갈 고향을 준비한 사람의 차이일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5. 가져 갈 수 있는 영적인 보화들만 준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그네는 짐을 가볍게 하려고 애씁니다. 짐이 무거우면 여행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하늘의 신령한 나그네임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것에 그토록 집착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 것을 많이 소유한다는 것은, 천국을 향해 가는 순례 길을 더욱 힘들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날 때와 죽을 때를 보면 귀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날 때에는 두 주먹을 꽉 쥡니다. 의욕과 야심의 표시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사는 동안 열심히 일하며 힘써 돈을 벌고, 지식을 얻고, 권세를 얻습니다. 그런데 떠날 때에는 모두 두 손을 쭉 폅니다.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공수래공수거인 것입니다. 땅 위에 쌓아 놓는 것을 결코 하늘로 가지고 갈 수가 없습니다. 하늘나라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1. 돈 갖고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힘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2. 벼슬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지식 갖고 못 가요 하나님 나라 3. 어여뻐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맘 착해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후렴-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는 오직 믿음으로만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머무는 동안 믿음의 준비를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6. 길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그네에게는 산도 설고 물도 설고 길도 설고, 모든 것이 낯설게 됩니다. 특히 나그네는 길을 잃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저는 사람의 이름은 잘 기억하는 편이지만 얼굴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고, 제 아내는 사람의 얼굴은 잘 기억하는데 반해 이름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입니다. 여자들은 지리에 밝지 못하고 방향 감각이 좀 무디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인 것 같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길을 찾는 것은 거의 다 제몫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어쩌다가 아내에게 아까 우리가 어느 길로 왔지? 하고 물으면, 완전히 반대 방향 쪽을 가리킨 적이 많아서, 나중에는 아예 물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때로 불신자들에게 전도하다가 보면, 목적지는 하나인데 길만 다를 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유교를 믿건, 불교를 믿건, 기독교를 믿건, 마지막에는 모두 천국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절대로 그런 말에 속아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목포 가는 기차를 탔으면 목포에 가는 것이고, 서울 가는 기차를 탔으면 서울에 도착하는 것이지, 목포 가는 기차를 타거나 부산 가는 기차를 타거나 모두 서울에 도착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말씀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나그네 인생길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리면, 영원한 우주의 미아가 되고 만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 어떠한 경우에도 길 되시는 예수님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7. 본향에 많은 소득을 가지고 가도록 힘써 준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경제가 몹시 어려운 1960년 대 많은 간호사들과 광부들이 서독으로 갔습니다. 말이 광부이지 그 어려운 당시 대학을 나온 인텔리들이 많았습니다. 무엇 하러 많은 간호사들과 광부들이 서독으로 갔습니까? 물론 돈 벌기 위해 갔습니다. 심지어는 베트남 전쟁 때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걸고 자원하여 전쟁터로 갔습니다. 역시 돈을 벌기 위하여 그야말로 생사가 왔다 갔다 하는 전쟁터에까지 거침없이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중동 건설 붐이 한창일 때는, 많은 노동자들이 열사의 나라에서 피땀을 흘리며 돈을 벌었습니다. 그래서 집도 사고 논밭도 사고 가난을 면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돈을 벌겠다고 전쟁터에도 가고, 열사의 나라에도 갔다가, 주색잡기 질이나 하며 허랑방탕하고 살다가, 본국에 돌아올 때는 빈손으로 돌아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무슨 낯으로 부모 형제와 처자식의 얼굴을 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의 본향인 하나님 나라에 당도했을 때, 이와 같이 부끄러움 당할 성도들이 한 분도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 건강, 젊음, 물질 모두 자신만을 위해서 탕진해 버리고, 빈털터리로 주님 앞에 서는 부끄러운 성도들이 되지 마시고, 보물을 하늘에 쌓고, 전도 많이 하고, 주님의 일 많이 하시고, 그래서 큰상을 받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사도 베드로가 나그네와 행인 같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권하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는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들이 어떤 것들입니까? 벧전4:3에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부패하고 무절제한 세상이 되어서,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고, 육신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음란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75%의 한국 사람들이 술 담배를 하고, 청소년들의 70%가 음주 흡연을 한다고 합니다. 여대생들도 독실한 신앙인들이 아니고는 거의 다 맥주를 마시고, 못 마시면 도리어 바보 취급을 받는다고 합니다. 여자들이 신혼여행에서 포도주 한 잔 마시고 기분 내다가, 저능아를 낳고 평생 한탄하게 된다고도 합니다. 칼빈은 말하기를 “술이 모든 악덕의 근원이 된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마귀는 자기의 멸망할 때가 얼마 남지 못함을 알고, 육신의 쾌락으로 인간들을 타락시키며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그 결과 무절제하게 술을 마시므로 간암에 걸리고, 흡연으로 폐암에 걸리고, 음란하고 부도덕한 생활로 말미암아 AIDS에 걸려 사망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아졌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앞으로 절제하는 사람들만이 살아남는다.”고 했고, 또 “앞으로는 종교가 모든 사람을 지배하는 세상이 된다.”고 했습니다. 음란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는 언제 AIDS 병에 걸리고 암에 걸릴지 모르니까, 절제하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라도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육체의 정욕들을 제어해야 하는 까닭은, 그것들이 우리의 영혼을 거슬러 싸우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이 자라지 못하도록 하고, 우리의 영적인 삶이 부패해 버리도록 작용하는 것이 바로 육체의 정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절제하는 생활을 합니다. 금메달을 타고 챔피언이 되는 사람은 모두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고, 절제한 사람들입니다. 고전 9:25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면류관을 얻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절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의 신령한 나그네인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단순히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으로만 끝나도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일에 힘쓰는 삶을 사는 것이, 하늘나라의 신령한 나그네들이 힘써야 할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나그네는 그가 머물다 간 자리, 곧 삶의 흔적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여행을 할 때에 한국인 민박집에서는 화장실을 공동으로 사용해야 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는데, 어떤 사람은 바닥에 물을 마구 흘려 놓고 닦아 놓지를 않아 불편하기도 했고, 어떤 여학생은 긴 머리카락을 여기저기 빠트려 놓은 채 그대로 두어서 지저분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오스트리아 민박집에서는 제 가방을 뒤져 돈을 훔쳐 가기도 하고, 주인집의 카메라며 여러 사람의 물건들을 도적질하고, 여행 중에 꼬인 여학생과 동침하고 도망친 남학생도 있었습니다. 참으로 추한 흔적을 남기고 떠나간 어글리 코리언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이토록 아름답게 이 땅에 살다 간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 목포 C. C. C에서 남편과 함께 사역하던 중, 30대 중년의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영원한 고향으로 돌아간 고 김현주 간사에 대한 글들을 여기 소개합니다. 순 출판사에서 발행한 ‘투명한 영혼으로 만나는 예수 사랑의 순애보’라는 책에 실린 김현주 간사의 친구 및 제자들의 글들입니다. 제목만을 살펴보아도,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분’ ‘부드러운 카리스마’ ‘섬기신 모습을 흉내 내며 살게요’ ‘주님 향한 불타는 사랑으로’ ‘온 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사랑 향기 나는 여인’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 ‘분위기 메이커’ ‘내 인생의 청사진이었던 님이여’ ‘아 좋은 사람’ ‘당신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등등 그녀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웠는가를 짐작케 해줍니다. 

송정중앙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며, 감사할 줄도 고마운 줄도 모르고, 불평불만만 일삼다가 떠나는 사람도 있을 수가 있고, 당이나 짓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나 도적질하고 살다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라기는 신령한 나그네로서 우리 모두 이 땅에 머물다가 간 자리가 아름답기를 바랍니다. 송정중앙 교회에 머물다간 흔적이 아름답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의 아름다운 삶의 흔적과 신앙의 발자취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돌려지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실로 인생은 나그네요, 인간의 연세는 그 나그네 길의 세월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하룻밤 장막에 머묾과 같고, 기차가 잠시 동안 정거장에 머묾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는 분명히 외국인과 나그네이므로, 우리의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를 사모하고 그리워하고 대망하면서 살고,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야곱은 그의 일백 삼십년 나그네 길이 험악한 세월이었다고 述懷했습니다. 환난과 슬픔을 너무도 많이 당했던 것입니다. 욥14:1에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라고 했고, 시90:10에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왜 이렇게 나그네 인생길에는 고통스런 일이 많을까요? 인간 세계에 죽음이 찾아오고, 고난이 찾아 온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죄의 결과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고난이 많은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만일 인생이 전혀 고통을 모르고, 그저 즐겁고 평안하고 행복하기만 한다면, 하늘나라를 사모하지도 아니하고, 여기 이 세상에서만 영원히 살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유럽 사람들이 생활은 풍족하지요, 사회 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으니까, 대부분 하나님을 떠나고 천국을 전혀 사모하지 않고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겠으니 하늘나라를 대망하며 살라고, 성도들에게도 많은 괴로움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송가 290장에 ♪괴로운 인생 길 가는 몸이 평안히 쉬일 곳 아주 없네, 걱정과 고생이 어디는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라고 한 것입니다. 

♪이 세상 나그네 길을/지나는 순례자/인생의 거친 들에서/하룻밤 머물 때/인생의 거친 들에서 하룻밤 머물 때/환난의 궂은 비바람/궂은 비바람/모질게 모질게 불어도/천국의 순례자 본향을 향하네./이 세상 지난 동안에/이 세상 지나는 동안에 괴로움이 심하나/괴로움이 심하나/그 괴롬 인하여 천국 보이고♪ 야곱처럼 인생의 거친 들에서, 모질게 부는 환난의 비바람에 시달리는 성도들에게 성령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괴롬 인하여 천국이 보이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나그네 인생 여정이 끝날 때, 주님의 은혜로 천국에 당도하여, 생명 강 맑은 시냇가에 백화 피고, 흰옷을 입은 천사 찬송가 부르고, 영광스런 면류관을 받아쓰게 될 때, 세상 고생 꿈에 본 듯이 잊어버리는 복을 다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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