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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돈키호테의 제자 ‘산초’ (막 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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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의 제자 ‘산초’ (막 11:1-11)

세계 근대 문학의 새 지평을 연 소설이 있습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입니다. ‘돈키호테’ 소설의 주인공 돈키호테는 본래 시골 마을의 한 귀족이었습니다. 에스파냐의 귀족인 그는 요즘 아이들이 게임에 빠지듯 모험에 빠져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기사가 아님에도 스스로를 기사라고 생각하고 녹슨 갑옷을 구합니다. 말을 구할 때에도 꼭 무너질 것 같은 아주 볼품없는 말을 구해서 탑니다. 

돈키호테는 이웃 농부의 딸이 자기가 목숨을 바쳐서 지켜야할 공주로 착각하고 그 공주를 지키기 위해서 길을 떠납니다. 가던 길에 성같이 생긴 여관을 본 돈키호테는 그 여관을 성으로 생각하고 거기서 난동을 부립니다. 여관주인을 성주로 생각하고 대적한 것입니다. 

보다 못한 여관주인은 그를 정상적으로 대하다보면 이상한 사람이 될 것 같고, 그러면 해결이 나지 않겠다 싶어 돈키호테에게 기사 작위를 부여합니다. 여관 주인에게 기사 작위를 받은 돈키호테는 어수룩한 농부 ‘산초 판자’ 라는 사람을 수행자로 데리고 다니면서 온갖 바보노릇을 하게 됩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보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 하나는 당시 문학적으로 아무도 인정하지 아니하는 이러한 방식의 문학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내용적으로 생각할 것은 더 많습니다. 

요즘 세상은 모두 다 똑똑합니다. 자기는 안 똑똑하다고 말하는 사람들까지도 다 똑똑하고 잘났습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을 보아도 옛날에 공부했던 사람들은 요즘 아이들이 공부하는 것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도 고3까지 여러 과목의 과외를 다했지만 요즘이라면 어림도 없을 것 같습니다. 중학교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도 다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심지어 초등학생들이 공부하는 것을 보아도 어렵습니다. 이런 공부를 하는 우리 아이들이 계속해서 이렇게 공부하다가는 머리가 이상해지겠다 싶을 정도로 겁이 납니다. 그러니 아이들도 말도 잘 하고 참 똑똑합니다. 

TV 프로그램 가운데 아이들을 소재로 하여 이벤트처럼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제가 아이들을 그렇게 좋아하는데도 그 프로그램을 보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너무 똑똑하여 영악할 정도입니다. 아이들은 아이 티가 나야하는데 어른보다 더 똑똑하고 너무 잘나 아이 티가 나지 않습니다. 

이런 시대가 되다보니 때로는 돈키호테 같은 사람이 그리워집니다. 상대방이 좀 여유가 있고 실수를 해야지 내가 실수하는 것이 용납될 텐데, 아무도 실수하지 않아 반들반들합니다. 말을 조금만 잘못해도 실수가 드러나고 사람이 우습게 보입니다.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돈키호테 같은 사람이 그리워집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돈키호테처럼 살아보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께서 마치 돈키호테 같습니다. 세상을 구하시겠다고, 죄인을 구원하시겠다고 예수님께서 일어서셨습니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드디어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 입구에 도착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돈키호테가 탄 것과 같은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것도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 얼마나 우스꽝스럽겠습니까? 우리나라에는 요즘 나귀가 없지만 에티오피아에는 나귀가 참 많습니다. 에티오피아에서 나귀가 짐을 싣고 가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물론 그렇게 무거운 짐은 아니지만 나귀 부피의 한 세 배정도까지 되는 짐을 싣고 가는데 꼭 무너질 것 같습니다. 나귀 자체만으로도 참 왜소하고 초라한데 그렇게 짐을 싣고 가니 더 안쓰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나귀 중에서도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수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참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제자들은 이런 스승의 깊으신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이 나서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타실 나귀 새끼 등에 자기네들 겉옷을 벗어 얹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겉옷을 벗으면 우리 식으로 말하면 자루같이 생긴 내복이 나옵니다. 다른 옷은 하나도 없이 그 하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지금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저 신이 나서 그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신이 나서 예수님 가시는 길에 겉옷을 벗어서 깔고, 나뭇가지를 베어서 깔아주면서 좋아서 환호하면서 노래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리라(8-10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환호했습니다. 

이들이 이처럼 신이 난 까닭은 9절 말씀을 보면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9절을 보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노래하는데, 이것은 정복자의 노래인 시편 118편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노래가 정복자를 노래한 것이라는 것을 다 알았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시는 예수님은 정복자라는 것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 지금까지 우리를 수탈하던 로마를 다 쫓아내고, 우리를 힘들게 하던 부패권력층을 다 뒤집어엎으셔서 드디어 우리 시대가 올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광경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확인할 것은 ‘과연 예수님도 그들처럼 신이 났을까?’ 입니다.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도 정복자의 심정으로 사람들에게 환호 받고 수많은 사람들이 기뻐하는 정치를 하시려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까?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그런 분위기는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타고 가신 나귀새끼를 보면 너무도 분명합니다. 

고대 세계에 왕들은 말을 탔습니다. 정복자들도 말을 탔습니다. 그들이 탄 말은 말 중에서도 최고로 멋진 말이었습니.다. 말을 가까이서 보신 분들은 느끼셨겠지만 보기만 해도 주눅이 들 정도로 얼마나 힘 있고 멋진지 모릅니다. 거기다 위엄을 부리기 위해서 장식까지 하니 그 말만 보면 사람들이 다 무릎을 꿇을 정도입니다. 여기에 비해 예수님께서 타신 나귀새끼는 너무 대조적으로 초라하고 볼품없었습니다. 

여기서 성경은 우리 기독교가 따르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어떤 분이신가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이셨습니다. 좀 시원찮은 분이셨고 멋진 모습이 없었습니다. 그럴듯하게 꾸미지도 않았고 큰소리도 치지 못하는 분이었습니다. 주님의 그 모습을 주님 오시기 500년 전에 아주 정확하게 묘사한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2절에서 메시야를 예언한 장면에서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사53:2)’ 라고 말씀하십니다. 뿌리가 푹신한 땅에서 나오면 힘이 있지만 마른 땅에서 나오면 정말로 볼품이 없고 힘도 없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말씀하십니다. 또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사53:2)’라고 우리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제가 한 30년 전에 한 화가에게 부탁하여 예수님 그림을 받았습니다. 한 20년 동안 제 집의 가장 중심에 걸었습니다. 이사를 가도 맨 처음 그 사진부터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면서 계속되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예수님의 모습은 그런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제가 받은 그림은 통상 그림 집에서 볼 수 있는 아주 멋있는 예수님의 그림입니다. 아주 귀한 그림이라 오랫동안 벽에 걸어두고 보았지만 한 십년 전쯤 큰 결심을 하고 그 그림을 더 이상 걸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그림이라 버리지는 못하고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그런 멋진 모습이 아닌 것 같고, 도무지 그런 감이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초라하십니다. 이사야 53장 3절은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라고 말씀하십니다. 고생을 많이 하셔서 얼굴이 형편없는 예수님입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얼굴을 묘사한 것이 없지만 이사야서에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을 생각할 때, 만약 오늘날 예수님께서 교회 강대상에 서시게 된다면, 그 교회에 담임으로 우리 주님께서 사역하신다면 사람들이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멋진 목사님, 잘난 목사님, 대단하고 유명한 목사님을 나의 담임 목사님으로 모시기 원하고, 그런 목사님들을 자랑하기 원하는데 예수님은 그런 분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도리어 사람들 눈에 바보처럼 보였습니다. 많이 못난 사람처럼 보였고 무엇을 연출할 줄도 모르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해봐야 아주 천한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그 누구도 세상 사람들의 눈길을 끄지 못하는 어부들이 주류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모아놓고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 잡혀가시기 바로 직전까지 그 당시 제자들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빵을 가지고 오셔서 찢으시면서 ‘이것은 내 몸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인류의 그렇게 소중한 진리의 말씀, 신비의 말씀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까닭도 알지 못했고, 무슨 말인지도 몰랐습니다. 그저 오늘 좀 이상한 말씀을 하신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오늘 기독교인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예배시간에 우리 교회는 성찬을 하는데 지난 1월 1일 이후 처음으로 낮 예배시간에 성찬을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성찬을 하지만 새벽에 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교회들이 성찬을 점점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성찬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점점 밀려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잡으러 오려고 하는 그 시간에 빵을 찢으시면서 ‘내 몸이다’ 라고 말씀하셨고, 포도주를 부으시면서 ‘이것은 내 피다’ 라고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고 우리의 스승이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우리의 선생님이라 생각하고 따라가고 있습니다. 

소설 ‘돈키호테’에 나오는 돈키호테의 수행자 산초를 생각해봅니다. 그는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돈키호테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돈키호테를 따라가기는 하지만 돈키호테와 전혀 닮지 않았습니다. 산초는 상당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리석으면 욕심이 별로 없을 것 같은데 희한하게도 그는 아주 현실적이라 욕심이 많습니다. 재산, 부귀영화에 대해서 욕심이 많고 탐욕도 있습니다. 

이 산초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생각납니다. 마가복음 10장에 그 모습이 나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예루살렘 들어가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죽으로 간다.’ 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어떤 모습을 연출하는지 보십시오. 

열 두 제자 중 두 사람 야고보와 요한이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막10:35)' 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막10:3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10:37).. 주님께서 영광 받으시게 되면 좌청룡, 우백호 즉 하나는 오른쪽에 또 하나는 왼쪽에 앉혀주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열두 명 중 나머지 열 명이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냈습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를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그 고뇌 중에 계신데 제자들은 이런 모습인 것이었습니다. 산초가 그러했습니다. 

이것은 2,000년 전 예수님의 제자들, 돈키호테를 따라다니던 산초 그리고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하는 기독교 신자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지만 우리는 좋은 말을 타기 원합니다. 멋진 모습이 연출되기 원합니다. 잘난 체 하기 원합니다. 잘난 체 하지 않는 듯 하면서 잘난 사람으로 보이기 원합니다. 드러내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드러나는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무언가 다른 사람과 좀 특별한 사람 되기 원합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호령하기 좋아하고 큰소리치기 원합니다. 옛날에 조금이라도 뭐 좀 한 일이 있으면 ‘내가 어떤 사람인데, 내가 누군데’ 라는 말을 속으로 수없이 말하는 것이 현대 사람들이고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돈키호테를 따라다니는 산초는 돈키호테를 따라가면서도 돈키호테와 달라 돈키호테가 생각하는 것을 많이 반박하고 돈키호테가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하면 말립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베드로가 그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이제 십자가를 지러 간다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살아서 멋있는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나름대로는 상당히 선생님을 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돈키호테’ 소설 마지막으로 가면서 산초는 돈키호테를 점점 닮아가는 참으로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설이 끝날 무렵 돈키호테가 죽으려고 할 때 돈키호테는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합니다. 무언가 자기가 잘못된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돈키호테를 따라다니던 산초는 도리어 그때부터 현실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죽어가고 있는 돈키호테에게 ‘이렇게 그냥 계시면 어떻게 합니까? 빨리 일어서셔서 공주를 구해야합니다.’ 라고 막 조릅니다. 드디어 제자격인 산초가 돈키호테를 앞서기 시작합니다. 스승보다 한 걸음 더 나가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진짜 제자란 어떤 사람일까?’ 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제자라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하며, 어떤 모습을 가져야할까요? 
물론 처음에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제자라면, 선생님을 따라가지 않기로 했으면 괜찮겠지만 따라가기로 하고 진정으로 선생으로 모시기로 작정했으면, 점점 선생을 닮아가도록 되어있습니다. 나중에는 스승보다 더 스승을 닮은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진짜 제자입니다. 

스승은 모자라는데 나는 끝까지 잘난 사람이 되려고 하면 그 사람은 제자가 아닙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보아야합니다. 스승은 못난 사람인데 나는 잘난 사람이 되겠다고 하면 스승의 이름만 이용할 뿐 제자가 아닙니다. 정말로 스승으로 모시고 진정한 제자라면 스승이 바보 같다면 점점 바보가 되고, 스승이 못난 사람이라면 더 못난 사람이 되는 사람, 이런 사람이 진정한 제자입니다. 

우리 주님은 세상 사람들 눈에 많이 모자라는 분 같았습니다. 바보같이 당하기만 하셨습니다. 한 번 확 뒤집어엎어 대반전, 대역전을 일으킬 것 같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시는 것처럼 보이고 말았습니다. 끝내는 허무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바로 우리 기독교가 말하는 예수님입니다. 

이제 주님의 이름으로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예수님의 제자이십니까? 이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작정하고 기독교 신자가 되기로 하셨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어떤 모습을 보여야하며, 어떤 길로 가야할 것인지 자명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어떤 길로 가고 있는지, 어떤 모습을 보이기 원하고 계시는지 한 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받으시고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 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사람 정말 내 제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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