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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느 2: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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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느 2:11-18)


'선구자'라는 제목의 유명한 가곡이 있습니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라는 가사의 노래입니다. 
  
여기에서의 '선구자'란 바로 일제 치하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싸우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이어지는 2절에 나오는 "이역 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라는 가사와, 마지막 3절에서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라고 더욱 명백히 밝혀 주는 가사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처음에 이 노래를 알게 되었을 때에는 다른 좋은 호칭도 많은데 '독립투사'를 가리켜 왜 하필이면 '선구자'라고 칭했는지 좀 의아스러웠습니다. 
  
'선구자'라는 단어는 조국을 되찾기 위해 자기 생명을 내걸고 싸우는 '독립투사'에게는 무언가 좀 부족하고 어울리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선구자'란 이름이 '독립투사'에게 참 의미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독립투사'는 꼭 해야 할 일이기는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선뜻 나서서 하기 어려워하는 일을 앞장서서 이끌어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사제국에서 고위관직을 가지고 편안히 살 수 있는 생활을 포기하고 그 대신에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위해 전 인생을 다 바쳤던 느헤미야 역시 바로 그런 정신을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일국의 수도가 재건되는 그 엄청난 대과업이 단 한 사람의 선구자적인 헌신을 통하여 시작되었고 결국 성취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오늘날 역시 과연 어떤 신자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인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는 영적 선구자가 될 수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선구자적인 신자는 꼭 필요한 하나님의 일을 앞장서서 찾아낼 줄 아는 사람입니다. 

2장 11절과 12절에 "11내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거한 지 삼일에 12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화하사 예루살렘을 위하여 행하게 하신 일을 내가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 두어 사람과 함께 나갈새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심으로써 그가 모시고 있던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특별휴가와 지원까지 받게 되자 그는 지체하지 않고 곧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일단 "삼일" 동안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이것은 먼 여행길 직후 따르는 피로를 풀기 위한 휴식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자동차나 비행기 따위는 물론 없었던 그 당시 바사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적어도 3개월 이상 걸리는 먼 여행길이었으니 한 삼일은 쉬어야 어느 정도 여독이 풀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물론 쉬더라도 방안에서 그냥 뒹굴기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여태까지 인도해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본격적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기도하면서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짰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휴식이 끝나자마자 느헤미야가 했던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곧 예루살렘 성벽의 파손 상태를 살펴보려고 현장답사를 나간 일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을 감동시켜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투신하게 하신 일에 대하여서는 아직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방백들이나 백성들을 불러 모아 놓고 "내가 바로 바사제국 임금의 술 관원이라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이토록 어려운 걸음을 해서 이곳에 찾아왔다."라는 식으로 떠벌리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그는 남몰래 "밤에 일어나" 그저 자기를 보좌하는 "두어 사람과 함께" 예루살렘 성벽 상태가 어떤지 몸소 현장을 살피러 나갔습니다. 
느헤미야는 그저 말로만 나서지 않고 구체적으로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그것을 찾아나서는 것부터 제일 먼저 행동으로 옮겼던 것이었습니다. 

이어지는 13절 이하 15절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13그 밤에 골짜기 문으로 나가서 용정으로 분문에 이르는 동안에 보니 예루살렘 성벽이 다 무너졌고 성문은 소화되었더라 14앞으로 행하여 샘문과 왕의 못에 이르러는 탄 짐승이 지나갈 곳이 없는지라 15그 밤에 시내를 좇아 올라가서 성벽을 살펴 본 후에 돌이켜 골짜기 문으로 들어와서 돌아 왔으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느헤미야가 그날 밤에 어떠한 경로를 거쳐서 예루살렘 성벽을 답사했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성벽 답사를 시작했던 출발지인 "골짜기 문"은 예루살렘 남서편의 힌놈 골짜기에 위치한 것으로서 성벽 남쪽 문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문이었습니다. 
그 문으로 나가서 "용정" 즉, '용의 우물'이란 곳을 지나갔다고 했는데, 그것은 그 '골짜기 문' 근처에 위치한 우물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그 다음에 지나간 곳은 "분문"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것은 '배설물의 문'이라는 뜻으로서 예루살렘의 모든 쓰레기와 오물이 바로 이 문을 통하여 힌놈 골짜기에 버려졌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 "분문"은 남쪽 성벽의 거의 한가운데, 즉 "골짜기 문"에서 동남쪽으로 약 450미터 되는 지점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돌면서 답사하고 있는 방향은 서울로 치자면 '서소문'으로 나와서 '남대문'을 거쳐서 '동대문' 쪽으로 돌아 올라가는 방향인 셈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성벽 답사를 진행하다가 "샘문과 왕의 못에 이르러는 탄 짐승이 지나갈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샘문" 즉 샘터가 있는 문은 예루살렘 동남쪽에 있는 문이며, "왕의 못"은 그 샘문 부근에 있는 것인데 우리에게는 '실로암 못'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연못입니다. 
거기서부터는 느헤미야가 타고 있던 짐승이 지나갈 곳이 없을 정도로 예루살렘 성벽이 극심하게 파괴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길이 막히자 느헤미야는 "시내를 좇아 올라가서 성벽을 살펴 본 후에 돌이켜 골짜기 문으로 들어와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여기 "시내"란 바로 예루살렘 성 동편에 있는 기드론 계곡을 따라 흐르는 기드론 시내를 가리킵니다. 
성벽 밑으로 돌아가는 길이 막히자 느헤미야는 그 기드론 계곡의 높은 지대를 따라 우회하여 올라가면서 계속 동쪽 성벽의 상태를 조사했던 것입니다. 
  
그 계곡의 높은 지대는 지형상 예루살렘 북동쪽 모퉁이와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느헤미야는 계곡을 따라 계속해서 예루살렘 북쪽 그리고 서쪽 일부 지역까지도 갈 수 있는 데까지 더 나아가서 가능한 한 성벽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보고서 다시 되돌아왔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의 어떤 부분이 어느 정도 파괴되었는지, 어떤 부분에 어떤 공사가 필요한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되새겨야 할 것은, 그날 밤에 느헤미야가 살펴보았던 그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진 지 이미 백 수십 년이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다가 1차 및 2차로 귀환했던 유다인들이 한때 성벽 재건 사업을 시도했다가 중도에서 포기하고 내버려 둔 이후로도 또 몇 십 년의 세월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즉 그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느헤미야보다 먼저 보았던 사람들이 몇 만 명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그 성벽을 재건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 무너진 성을 하루하루 무심하게 지나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그저 '아, 저 성벽이야 원래 무너져 있었던 거지 뭐. 백 수십 년 동안을 그냥 저렇게 무너진 채로 있어 왔는걸. 언젠가 한번 재건해 보려고도 했었나본데 역시 안 되는 일이었었지. 그러니 나라고 무얼 어떻게 하겠나?'라고만 생각했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그 무너진 성벽을 보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어떤 문제점으로 인식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것이 반드시 시급히 해 내어야 할 하나님의 일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그처럼 무너져 있는 상태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실인 것처럼 여겼던 것이었습니다. 

오직 느헤미야의 눈에만 그 성벽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사실상 육안에 비치는 성벽의 모습은 느헤미야나 다른 예루살렘 성민들에게나 똑같았겠지만, 그것을 보고난 후에 자신의 마음에 인식된 영상은 전혀 달랐던 것이었습니다. 
그 몇 만의 유다인들이 매일같이 보고 있으면서도 무심하게 넘기고 있던 사실이 결코 그냥 넘길 일이 아니라 반드시 완수해내야만 할 하나님의 일인 것을 오직 느헤미야만 느낄 줄 알았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평생을 보아오면서도 아무 자극도 받지 못하고 있던 일을 느헤미야라는 단 한 사람의 선구자는 바로 그날 하룻밤 사이에 자신에게 주어진 일생 최대의 사명으로 확신했던 것이었습니다. 

교인들 중에도 그 유다인들처럼 '성벽이 무너져 있는 것이 그저 당연한 상태인 줄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쩌다 한번 전도를 해 보았는데 도저히 씨도 먹히지 않으면 당장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역시 전도란 안 되는 것이야. 사람들이란 원래 전도를 잘 안 받기 마련이지. 그러니 내가 무얼 할 수 있겠나.'라고 간단히 포기하고 맙니다. 
그러고는 몇 개월 몇 년을 전도 한번 하지 않고 그냥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바로 자기 주변에서 많은 불신친구와 이웃들을 보면서도, 한 지붕 밑의 가족 가운데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는 혈육을 매일같이 보면서도, 바로 그들이 전도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내가 지금 당장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사명이라는 사실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무심하게 사는 것입니다. 
눈으로는 보면서도 마음으로는 전혀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경향교회를 통하여 '지금 당장 해야 할 시급한, 반드시 성취해야 할 중요한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낼 줄 아는 선구자적인 자세를 익혀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별들의 운동'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신학교 지원자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 우리나라 전체 신학교의 조류입니다. 
실로 마지막 때에 추수일꾼은 점점 더 모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현실에 대하여 대부분의 목사나 신학교장들은 '그게 요즘 추세인 것을 어떡하나?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붙들어 와서 강제로 목사 시킬 수도 없으니 무슨 별 수가 있겠나?' 하고 끝나고 맙니다. 
하지만 '다른 교회에서 신학생 지원자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바로 우리 경향교회 안에서 신학생을 더 많이 키워야 할 것이 아닌가?'라는 사고의 전환이, 이 '별들의 운동'이라는 참으로 멋있는, 그러면서도 너무나도 요긴하고 필요한 또 하나의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게 만든 것입니다. 

모름지기 영적 선구자는 바로 이런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마땅히 해야 할 지극히 당연한 일들이 눈앞에 산적되어 있는데도 마치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처럼 생각하는 무사안일주의를 떨쳐 버리고, 지금 당장 절실히 요구되는 시급한 하나님의 일을 부단히 찾아내는 영안이 밝게 뜨인 영적 선구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선구자적인 신자는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자고 다른 성도를 격려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본문 16절과 17절에 "16방백들은 내가 어디 갔었으며 무엇을 하였는지 알지 못하였고 나도 그 일을 유다 사람들에게나 제사장들에게나 귀인들에게나 방백들에게나 그 외에 일하는 자들에게 고하지 아니하다가 17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우리의 당한 곤경은 너희도 목도하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 하고"라고 기록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야밤의 성벽 답사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한동안 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했습니다. 
그가 그 답사를 마치고 17절에 "후에"라고 한 때까지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하여튼 그가 대사를 시작함에 있어서 얼마나 신중한 사람이었는지를 여기서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특히 목사와 같은 지도자는 무슨 일을 시작할 때 그처럼 오랫동안 계획하고 준비한 후에 말을 꺼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일단 목사가 당회 앞에 그 일을 발표하게 되면 그 다음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목사가 깊이 생각하고 기도하지도 않고 불쑥불쑥 생각나는 대로 당회나 교회 앞에서 말을 남발하면, 그런 일들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을 것은 물론이요 그 자신의 지도력 부재와 무능을 드러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그런 신중한 준비 기간을 충분히 거친 후에 드디어 예루살렘 백성들을 불러 놓고 이 대사를 제안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의 당한 곤경은 너희도 목도하는 바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 성이 당한 일이 '우리의 당한 곤경'이라고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불러다 놓고 "너희들, 이게 무슨 부끄러운 모습이냐? 너희들이 오래 전에 예루살렘에 먼저 돌아와서 살고 있었으니 너희들이 알아서 일찌감치 했어야 할 일 아니냐?"라고 책망할 수도 있는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대신에 '우리의 당한 곤경'이라고 즉 '너희의 일'임과 동시에 또한 '나의 일'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교회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들을 생각할 때 그것들을 항상 '남의 일'로만 여기는 교인들도 많지 않습니까? 
"교인이라면 당연히 성전건축에 참여하고 신자라면 당연히 선교후원을 해야지요."라고 말은 하면서도, '하지만 헌당헌금이나 특별선교헌금은 돈 많은 장로님들이나 할 일이지 내 일은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늘 기도에 힘써야지요."라고 하면서도, '우리야 사노라고 먹노라고 바빠서 매일 기도할 수 없으니 교역자들이 우리 기도까지 대신 다 해 주어야지.'라고 생각하는 교인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일은 저 사람의 일이지, 저 일은 누구 다른 사람이 알아서 하겠지.'라고만 하다가는 결국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의 일은 바로 '너와 나의 일'이며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해당되는 일'이라고 피차 격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느헤미야는 "우리의 당한 곤경은 너희도 목도하는 바가 아니냐"라고 말하면서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아, 날이면 날마다 이 불타서 무너져 있는 예루살렘 성벽을 목도하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부끄럽지도 않느냐?'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이방인의 손에 파괴되어 버린 그 자체도 수치였지만, 이제 해방을 받아 조국으로 돌아왔다는 백성들이 그것을 보고도 가만히 내버려 두고 있다는 것은 더욱 수치스러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신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에 주일마다 출석했던 어떤 미국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대부분의 미국 교회당들이 그렇듯이 바닥이 카펫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오래 되었던지 사람들의 발이 자주 닿는 곳은 이미 닳을 대로 닳아빠져서 속이 허옇게 드러나 있었습니다. 
아무리 검소한 미국 사람이라 해도 그게 자기 집 카펫이었다면 그런 것을 보고 가만 둘 수 있었겠습니까?
정말 동네가 창피해서 빚을 내어서라도 당장 갈아치웠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네들이 매 주일 예배드리는 예배당의 카펫이 그 모양 그 꼴인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끄럽게 생각할 줄 모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낯이 두꺼워서는 안 됩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일을 내버려 두고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실로 자신에게 수치스러운 일인 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무심하게 수수방관하고 있는 것은 실로 불명예스럽기 짝이 없는 일인 것을 깨달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18절 말씀에 "18또 저희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고하였더니 저희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라고 기록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처럼 예루살렘이 처하고 있는 곤경과 수치스러움을 백성들에게 먼저 일깨워 준 후에 당장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자고 백성들을 고무시켰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선한 손이 자기를 도와주신 일" 그래서 바사왕 아닥사스다가 승낙하고 협조까지 약속해 주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자기네들의 불충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깨닫게 해 준 후에 이어서 약간의 격려만 덧붙이니까 그 예루살렘 성벽재건의 열기는 마치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것처럼 순식간에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의 말이 끝나자마자 온 백성들이 "일어나 건축하자"하면서 일순간에 함께 감전된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서 성벽 재건 공사에 일로매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참 얼마나 멋있는 장면이었습니까?
단 한 사람의 선구자적인 신자가 하나님의 일을 찾아내고 그 일을 하자고 백성들을 자극시키고 격려했을 때, 그것은 무려 몇 십 년 동안 무심하게 잠자고 있던 수만 명의 마음들을 하나 같이 일깨우고 그 수만 명의 몸들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에 원로목사님을 잘 아시는 다른 교단의 목사님을 한 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께서 우리 원로목사님께서 부산에서 목회하고 계실 적에 다른 목사님들이 붙여 준 별명을 제게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하고집이 목사'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하고 싶어서 못 견디는 목사'라는 뜻입니다. 
교회 일이든지 교단 일이든지 하여튼 무슨 하나님의 일이다 싶은 것은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면서 하시는 분이셨던 까닭에, 선배 목사님들께서 오히려 '하고집이 목사도 저런 하고집이 목사가 없다.'라고 혀를 내둘렀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하고집이 목사님'을 따라서 우리 경향교회가 지난 39년 동안 오직 '하자'는 말만 앞세우는 교회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교회는 '하지 말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스스로 도저히 발을 붙이지 못하는 교회가 된 것이었습니다. 
이 강서성전을 지을 때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장로와 교인들 중에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이 일은 도저히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이 강서성전 건축이 절대로 안 될 일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결국 우리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오로지 '하자'는 긍정적이고 선구자적인 사고방식에 이미 숙달되어 있던 대부분의 당회원들은 아무리 'IMF'고 뭐고 해도 이 경향학원에 교회당을 건축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절호의 기회라고 확신하면서 '자, 우리의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자,'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우리 경향인들 역시 그 말에 '일어나 건축하자'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에 일사불란하게 뛰어들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처럼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안 될 일이라고만 여겨졌던 성전건축은 끝내 완성되었고 입당과 헌당까지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이처럼 경향인들을 도우신 것을 저와 여러분이 목도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우리 경향교회에서는 오직 '하자'는 소리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꼭 해내어야 할 하나님의 일을 찾아내고 그 일은 너와 나의 일이라고, 그 일 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깨우쳐 주는 소리가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을 함께 합시다.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전에도 함께 하셨으니 이번에도 반드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라고 서로를 격려하는 소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일어나 함께 하자'는 소리가 항상 앞장섬으로써 '하나님의 선한 손이 전에도 함께 하신 것처럼 이번에도 함께 하시는' 가운데 이보다 더 큰 역사를 이루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저 '하나님의 뜻이 내 가정에, 이 경향교회에, 우리 조국에 이루어지게 해 주옵소서.'라고 기도만 하고 그 후에는 팔짱 끼고 가만히 앉아만 있다면, 우리 눈앞에서 하늘로부터 뭔가 뚝뚝 떨어지듯이 그 일들이 자동적으로 실현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 땅에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의 마음과 입을 기도의 도구로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손과 발을 그 응답의 도구로 또한 사용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전 인격과 생활이 함께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하여 온전히 쓰이는 성도와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님의 일을 부지런히 찾아내고 또한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 그것을 놓치지 않고 '하자'라고 시작해야 합니다. 

항상 부정적인 비관주의자는 '그것은 도저히 안 될 일이다.'라고만 생각하는 까닭에 아무 것도 시작조차 하지 못합니다. 
무사안일한 낙관주의자는 '그것은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라고 말하면서 자꾸 미루는 까닭에 매사에 한참 늦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선구자는 '그것은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고 내가 시작해야 할 일이다.'라고 깨닫고 실천에 옮김으로써 꼭 필요한 일을 꼭 필요한 때에 이루어내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남들은 무심하게 넘겨 지나가는 일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꼭 필요로 하시는 일을 찾아내는 선구자, 찾아낸 하나님의 일을 '나와 너' 우리 모두가 함께 해야 할 일이라고 서로 자극하고 격려할 줄 아는 선구자가 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 경향을 통하여 앞으로도 계속 행하실 '이 선한 일'에 항상 앞장서서 쓰임 받고 '예루살렘의 흥왕'을 통한 축복을 같이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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