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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피곤한 자여, 예수를 생각하라! (히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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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한 자여, 예수를 생각하라! (히 12:1-3)


현대인의 하루 일과는 마치 전쟁과 같습니다.  시간을 따지지 않고 분초를 따질 정도로 시간에 쫓기면서 허덕입니다.  많은 약속들이 있고, 스케줄은 쉴새 없이 이어지고, 업무량은 갈수록 태산입니다.  하루 종일 스트레스의 융단 폭격을 당하다 보면 무력감에 빠지게 되고 이러다가 직장이나 사회에서 도태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렇게 피로가 계속 쌓이다 보면 신경이 예민해져서 별것 아닌 일에도 쉽게 상처를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피곤이 육체적인 것이라면 그렇게 문제될 것도 없습니다.  충분히 쉬고 나면 다 풀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하루 종일 논을 매거나 뗄 감을 구하기 위해 온 산을 헤매고 다니는 중노동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프리카의 여인들처럼 물을 구하기 위해 3시간을 걸어갔다가 양동이에 물을 이고 또 다시 3시간을 되돌아와야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중노동에서 이미 자유함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이렇게 피곤에 지쳐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피곤이 정신적이고 영적인 피곤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드필드라는 심리학자는 [힘의 심리]라고 하는 책에서 현대인의 피곤을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피로는 대부분 정신적 원인에서 온 것이다.  순수하게 육체적인 원인에서 오는 피로는 지극히 드물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이 말에 동의를 하든 하지 않든 간에 오늘 현대인들이 느끼는 피곤은 대부분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피곤을 전적으로 나쁜 것이라거나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피곤은 좋은 것이 아니지만 나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매우 한정된 힘을 가지고 있고, 또 육신이라고 하는 연약한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정된 육체에 과부화가 걸리면 피곤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 남겨 놓으신 자연의 원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인생은 원래부터 피곤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피곤은 인생의 숙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3천년 전에 살았던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다"(전 1:8)  그는 하늘의 달과 별도 피곤하고, 수목도 피곤하고, 모든 동물과 물고기들도 피곤하다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피곤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이 만물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 피곤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3천년 전 사람도 말로 다 할 수 없는 피곤을 절감하며 살았다고 한다면 숨 쉴 틈 없이 돌아가는 현대 문명 속에서 밀려다니는 우리 인생이야 오죽하겠습니까?  피곤한 것이 정상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피곤을 그저 운명이겠거니 하고 방치해 둘 수는 없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그렇습니다.  피곤을 그대로 쌓아 두면 무기력증에 걸리게 됩니다.  무기력증에 걸리면 쉽게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만사가 귀찮아지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마치 험한 파도와 싸우던 선원이 지친 나머지 배를 버리고 바다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런 상황이 오래 계속되다 보면 결국 자살이라는 막다른 길로 내닫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피곤이 정상적인 것이긴 하지만 절대 그대로 내버려두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피곤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에게 기가 막힌 처방전을 주셨습니다.  "피곤한 자여, 예수를 생각하라!"  참으로 동문서답과 같은 처방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피곤하면 환경을 개선해 보라든지,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을 택하라든지, 아니면 이 약을 먹고 활력을 되찾으라는 식의 그럴싸한 처방을 주셔야 할 것 같은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전혀 뜻밖의 처방전을 주시고 계십니다.
"예수를 생각하라."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말씀으로 우리를 속이시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려운 상황이나 특별한 순간에 처하면 누군가를 생각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마음이 슬퍼질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피곤에 지쳐 있을 때마다 떠올리게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를 생각하기만 해도 위로가 되고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월스리트 저널]이라고 하는 유명한 경제 전문지에서 보았던 광고 한 편이 생각납니다.  '유나이티드 테크놀러지'(United Technology)라는 회사의 광고였는데, 어떤 사람의 사진과 함께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낙심해 있다면 이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학력은 초등학교를 중퇴했고, 시골에서 구멍가게를 열었지만 그나마 파산하였습니다.  남으로부터 빌린 돈을 갚는데 15년이 걸렸습니다.  장가를 갔지만 악처를 만나 가정생활이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상원의원에 두 번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였고, 하원의원 선거에도 두 번씩이나 고배를 마셨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유명한 연설을 했지만 그 당시의 청중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신문은 연일 그를 비난했고 나라의 절반에서는 그를 벌레처럼 싫어했습니다.  그럼에도 전세계 곳곳에서 이 사람 때문에 용기를 얻게 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죽은지 백 년이 훨씬 지났음에도 그의 존재는 더욱 새롭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는 에이브라함 링컨입니다."

저는 이제까지 이보다 더 인상적인 광고를 본 적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실패로 낙담해 있는 사람에게 링컨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피곤한 자에게 "예수를 생각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를 생각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생각해 봅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가 당하는 피곤을 똑같이 체험하신 경험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가난과 씨름하셨습니다.  하루 종일 쉴 틈을 얻지 못하고 중노동을 해야 하는 생활도 해 보셨습니다.  그리고 숱한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지도 몸소 겪어 보셨습니다.  그것이 본문 3절의 말씀입니다.  본문 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예수님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 중에는 선한 사람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대부분은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비판하고 대적했습니다.  예수님의 언행에서 꼬투리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하루 종일 시달린다고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피곤하게 하기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말귀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엉뚱한 소리를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팔 배반자도 끼어 있었습니다.  이런 형편없는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예수님의 심신이 얼마나 피곤하셨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동병상련"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같은 병을 앓아본 사람만이 상대방의 처지를 진심으로 동정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피곤에 지쳐 낙심해 있을 때 의기양양한 사람을 만난다거나 만사형통한 사람을 만나면 더 상심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살아온 삶의 경험이 말해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피곤과 낙심과 고통을 몸소 체험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피곤할 때 그분을 생각하면 평안과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삶이 힘들고 피곤할 때 그분, 예수를 생각하십시오.

여기서 '생각하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비교해 보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묵상해 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고통을 당하거나 피곤하여 지쳐 쓰러질 때 스스로를 예수님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아, 내가 당하는 고통과 피곤을 예수님도 다 당해 보셨구나! 내가 짊어지고 있는 인생의 피곤을 예수님도 짊어지셨구나."  우리와 똑같이 피곤을 경험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깊이 생각하므로 마음에 위안을 찾고 평안을 누리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돕는 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모든 것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그 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사야 40장 28절 이하의 말씀과 같이 그는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 새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도와주실 능력이 있는 분이시며 항상 우리를 도와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때를 따라 필요한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주십니다.  피곤할 때는 피곤할 때의 은혜를 준비해 주십니다.  고통 당할 때는 고통 당할 때의 은혜를 준비해 주십니다.  낙심 될 때는 낙심된 자를 위한 은혜를 준비해 주십니다.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이 말씀을 믿는 여러분에게 각자의 삶에 합당한 주님의 위로와 은혜가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주님은 분명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 예수님은 피곤한 자에게 쉼을 줄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피곤하여 낙심 될 때 예수를 생각해야 합니다.  힘이 드십니까?  피곤하십니까?  그럴 때 예수를 생각하십시오.  그분은 피곤한 자에게 독수리와 같은 새 힘을 주십니다.  어리석은 자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약한 자에게 강함을 주십니다.

셋째로, 예수님에게는 낙심할 이유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흉악무도한 죄인에게나 어울리는 수치스럽고 비참한 죽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본문 2절을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 그렇게 모욕적인 죽음을 거절하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십자가 앞에서 절망하지 않고 수치와 고통을 감내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십자가 너머에 있는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이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부활하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장차 이 세상을 심판하여 모든 인류의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놓으시고 인생의 한숨과 원한을 풀어주실 그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낙심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사람들인 우리는 아골골짜기를 걸어가도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막 가운데 거할지라도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에게는 가난을 몇만 배 보상하고도 남는 부요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직장이나 친구와의 경쟁 대열에서 뒤쳐지고 있습니까?  물론 사람이니까 그것 때문에 마음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나보다 별 볼일 없었던 친구가 나보다 훨씬 앞서 나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불편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가지고 낙망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준비하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면 우리가 세상에서 얼마나 성공했느냐 못했느냐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일이기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꿈에서 본 듯 다 잊어버리고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영광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마음에 안 듭니까?  자녀들이 애를 먹입니까?  하는 일이 소원대로 잘 풀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생각하면 낙심이 될 만한 그 일 때문에 오히려 찬송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길이 힘들고 어려울 때, 삶의 여정이 피곤할 때 주저하지 말고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이해하시고 사랑하시는 그분 예수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힘을 내십시오.  다시 일어서십시오.  주님과 함께 할 영광의 그날을 바라보며 넉넉한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현재의 가난이나 고통은 장차 주님이 주실 영광과 비교하면 새 발의 피도 안됩니다.  인간관계로 인해 시달리고, 뜻대로 안 되는 가족 때문에 당하는 고통도 우리를 위해 준비해 두신 그 영광에 비하면 꿈에 본 듯 잊을 만큼 별 것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엄청난 핍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친족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이리저리 쫓겨다녀야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 때문에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더러는 붙잡혀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기 위해서 전부를 희생했고,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그들을 핍박하는 자들을 한순간에 멸해버리시고 그들을 핍박에서 건져주시는 것만이 위로요, 기쁨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해 주겠노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아무리 핍박을 당해도 주님이 준비한 영광을 맛보는 그 날에는 핍박당했던 그 모든 일을 두 번 다시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은혜가 쏟아지기 때문에 핍박당하는 성도들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마다 환난 중에서도 기뻐하는 특별한 은혜를 체험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생각하기 위해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가을의 문턱에서 저는 두 가지 아이디어를 여러분에게 제안하고 싶습니다.
첫째로는, 하루 일과로 씨름하는 동안 피곤하여 지칠 때마다 잠시라도 예수님을 떠올려 보자는 것입니다.  5초도 좋고, 10초도 좋습니다.  잠깐 동안이라도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한 번 노력해  보십시오.  마음이 답답해지면 잠깐 동안이라도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 예수님도 이 모든 고통을 다 경험해 보셨다고 그랬지?  얼마든지 나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이라고 그랬지?  예수 안에는 낙심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그랬지?"

'잠깐'이라고 하니까 쉬운 것 같아도 사실은 참 어렵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답답하거나 스트레스로 인해 피곤해지면 "푸 ― 후 ―"하면서 담배를 연신 피워대지 않습니까?  그들로서는 담배가 도망가는 방법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후 ―" 하고 스트레스를 뿜어내 본들 맥없이 사라지는 연기 밖에 더 보입니까?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그럴 때 잠깐이라도 예수님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문득문득 예수님을 생각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께 기도를 드리게 되고, 그 기도 때문에 마음속에 놀라운 평안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두 시간 정도를 확보해서 예수님과 단둘이 있는 시간을 가지자는 것입니다.  한 주중 어느 날이라도 좋습니다.  밤이든, 새벽이든, 낮이든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시간을 구별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 구별한 한두 시간 동안 여러분이 예수님과 단둘이 있을 수 있는 환경을 찾으십시오.  그곳에는 핸드폰을 가지고 가서도 안됩니다.  부인이나 남편이 따라와도 안됩니다.  모든 것을 다 끊어버리고 한두 시간 동안이라도 홀로 있을 수 있는 그런 기회를 만들어 보십시오.

철학자 파스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을 조용히 있는 시간을 마련하지 못해서 놓치고 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혼자 조용히 예수님을 생각해보는 한두 시간만큼은 확보하자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내가 기도한다"는 식의 능동적인 자세를 취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을 설득해 보겠다는 자세도 금물입니다.  "하나님, 이러이러한 기도에 꼭 응답해 주셔야 합니다."하고 소리쳐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당장 하늘 문을 열고 우리의 구하는 것을 그 자리에서 주실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런 자세로 기도하는 것은 피곤을 더하게 할뿐입니다.  피곤에 지쳐 마음이 무거운 때일수록 수동적인 입장에 서야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지시를 기다리며 조용히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모든 주도권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 시간만큼은 가만히 있어보십시오.

여러분 중에는 속으로 이렇게 말하는 분이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이 바쁜 세상에 한 시간 내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러나 여러분, 몸이 피곤할 때 사우나에 가서 몇 시간이나 계십니까?  만사를 제쳐놓고 뛰어가서 최소한 한 시간 이상 땀을 빼지 않습니까?  또 어떤 분은 조금 몸이 찌뿌드드하다 싶으면 하고 싶은 운동을 하지 않습니까?  오가는 시간을 다 합하면 그것도 한 시간이 미니멈입니다.  또 안 믿는 사람들의 경우 "기분도 그렇지 않은데 술이나 마시자." 하고 술집에 앉으면 한 시간은 우습게 흘러가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예수님과 단둘이 있을 한 시간은 내기 어렵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만일 우리가 느끼는 피곤이 육신의 피곤에 불과한 것이라면 잠을 자거나 사우나를 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등산을 하면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피곤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피곤입니다.  영적인 피곤은 사우나나 운동, 등산과 같은 그런 방법 가지고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영적인 피곤은 성경적으로 풀어야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음미하며 예수를 생각해 보는 조용한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홀로 조용한 시간을 가질 때 한 가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막연하게 눈만 감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공상만 하다가 끝내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그 시간 동안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펴놓고 여기 저기를 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편다고 하나님의 말씀이 눈에 쏙쏙  들어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디를 읽어야 될지조차 모를 때도 많습니다.  

그럴 때는 설교를 들은 말씀 중에 한 부분을 택해서 조용히 읽으면서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아, 그 때 이런 말씀을 들었지.  아, 이 말씀은 이런 뜻이었지."  이렇게 묵상을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 이 말씀대로 나도 은혜를 좀 받고 싶습니다.  도와주세요."하고 기도가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묵상하고 싶어집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생각하는 방법입니다.

혹여 여러분 가운데 소를 먹여본 분은 잘 아시겠습니다만, 소는 처음 풀을 뜯을 때는 정신없이 뜯어먹습니다.  언제 씹는지 모르게 삼켜버립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저러다가 혹시 탈이라도 나지 않을까 하고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소는 절대 소화문제로 탈이 나는 법이 없습니다.  허겁지겁 삼켰던 것들을 되새김질을 통해서 되씹어 삼키기 때문입니다.  소가 풀만 먹고도 몸이 통통하게 살이 찌고, 풍부한 젖을 낼 수 있는 것은 되새김질을 충분히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설교를 듣는 시간은 소가 아침에 풀을 뜯어 삼키는 것과 비슷합니다.  목사도 삼십 분 동안 정신없이 말씀을 전하고, 여러분도 정신없이 듣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듣다보니 언제 씹을 틈이 있습니까?  그냥 닥치는 대로 삼켜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 나갈 때 생각해 보면 남는 게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단둘이 만나는 한 시간을 특별히 따로 떼어 그 시간에 주님과 만나는 사람은 다릅니다.  "아, 지난 주 히브리서 12장 3절 말씀이었지."하고는 그 말씀을 펴놓고 조용히 외우면서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되새김질합니다.   그러면 그 시간에 성령께서 특별히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목사인 제가 깨달았던 말씀보다 더 달콤한 말씀을 여러분이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 말씀을 깨닫고 영혼의 위에다 가득 채울 때에야 그 말씀은 영혼의 혈관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양분을 공급하고 우리에게 새 힘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피곤이 싹 가시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속에서 새 힘이 솟아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언제 이와 같이 예수님과 단 둘이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김질하면서 예수님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적어도 한시간 동안 그렇게 해 본 때가 언제였습니까?  지난달이었습니까?  아니면 봄이었습니까?  언제 그런 시간을 가져보셨습니까?  언제 가져 보았는지 생각이 잘 안 나십니까?  그러니까 피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항상 무거운 짐으로 짓눌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잠을 자고 나도 마음은 늘 찌뿌드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라"고 했는데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고 인생을 사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피곤하다. 피곤하다." 말만 하지 마시고 피곤하고 낙심될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우리가 예수를 생각하라고 하신 그 말씀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주님께서 우리 영혼과 정신의 피곤을 말끔히 풀어주시리라고 분명히 믿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생각하는 만큼 여러분의 얼굴은 훨씬 더 밝고 건강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훨씬 더 아름답고 윤기가 흐르게 될 것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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