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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배반을 당하신 예수님 (막 14: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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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을 당하신 예수님 (막 14:10-11)

막14:10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막14:11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때는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과 무교절을 이틀 앞둔 날이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에서 공회가 열렸습니다. 그 날 그들은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한 사람 곧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유익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예수님을 잡아 죽일만한 혐의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했습니다. 단지 민란이 일어날까봐, 그들은 명절에는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명절이 끝난 후에, 그들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과는 달리, 예수님은 명절인 유월절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는 성전에서 유월절 양들이 죽임을 당하는 시각인 오후 세 시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유월절 양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대속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루살렘의 공회는 명절이 끝난 후에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던 바와는 달리, 예수님은 명절인 유월절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본래 그들이 계획했던 것보다 실행이 앞당겨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바로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공회가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일이 급물살을 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계획이 앞당겨졌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가룟 유다도 또한 공회도 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쓰임을 받았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베다니의 마리아는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이와는 달리 그들은 나쁘고도 악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각자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십니다. 단지 하나님은 그들이 행한 모든 악을 합하여 선을 이루시며, 그들의 행위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는 단 한 순간이라도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을 배반하는 자리에 이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베다니의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가룟 유다의 배반입니다.  

막14:10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여기에 가룟 유다가 등장합니다. 앞에 나오는 가룟은 그의 출신지를 뜻합니다. 본래의 뜻은 “그리욧 사람”입니다. 그리욧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삼사십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동네의 이름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명의 유다가 나옵니다. 그들 가운데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를 구분해서 가룟 유다라고 부릅니다. 이는 같은 이름을 가진 마리아를 구별하기 위해, 이름 앞에 지명을 붙여 막달라 마리아나 베다니 마리아라고 부르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가운데 유독 가룟 유다 한 사람만이 남방 유대 출신이었습니다. 그 외는 모두 북방 갈릴리 출신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가룟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하기는 했지만, 완전히 동화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대로, 가룟 유다는 열둘 중의 하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을 그가 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지난 삼년 동안 예수님과 늘 함께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들었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이 행하신 권능도 직접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모든 병마가 물러나고, 귀신들도 떨며 내쫓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바람과 바다가 잔잔하여 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이 여러 명의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책잡기 위하여 잇따라 시험했지만, 단 한 번도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지 못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제자들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할 때 그 자리에 함께 있었습니다. 

이처럼 그는 지난 삼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가장 빛난 곳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결국 그는 멸망의 자식이 되어, 가장 어두운 곳인 지옥에 영원토록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삶은 너무도 비극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불러서 자신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세우셨습니까?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며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임을 모르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요6:64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반하며 팔아넘길 것임을 처음부터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가룟 유다를 자신의 제자로 불러 세우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13:18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이 때 예수님은 시41:9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반할 것임을 처음부터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응하게 하시기 위해서 그를 자신의 제자로 택하셨습니다. 요17:12에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이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다시금 오늘 본문으로 되돌아옵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갔습니다.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간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겨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며칠 전 베다니에서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에게 부었습니다. 그 때 가룟 유다는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고 허비했다고 말하면서 마리아를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를 옹호하시며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좋은 일을 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가 살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살 길은 대제사장들 편에 서서, 그들에게 협력하는 길밖에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을 찾아가서, 그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10:28 말씀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 편에 서지 아니하고, 대제사장들 편에 섰습니다. 그는 그것이 살 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 영원한 멸망의 길이었을 뿐입니다. 

언제나 예수님 편에 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항상 돌보시고, 우리를 친히 거느리실 것입니다. 풍파 중에도 예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평안히 인도하실 것입니다. 천국에 가는 그 길도 예수님이 우리를 거느리실 것입니다. 


둘째로, 가룟 유다가 받은 대가입니다. 

막14:11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마26: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을 찾아 갔습니다.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겨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해의 대제사장은 가야바였습니다. 그러니까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으로 찾아간 것입니다. 때마침 그 때 그 곳에는 공회가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다함께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찰나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가룟 유다가 제 발로 그 곳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더니 가룟 유다는 그들에게 뜻밖의 말을 했습니다.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마26:15 말씀입니다.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겠느냐.” 그 때 그들은 어려운 문제가 순식간에 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그들은 가룟 유다의 말을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들은 은 삼십을 제안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그들의 제안을 받아 들였습니다. 드디어 거래가 성사되어, 가룟 유다는 그들이 달아주는 은 삼십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 때 이루어진 거래로 인해서, 공회가 예수님을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했던 계획이 앞당겨지게 되었습니다. 본래는 명절이 끝난 후에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명절과 상관없이 신속하게 자신들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물질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었습니다. 요12:6 말씀과 같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가운데서 돈 궤를 맡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상 도둑이었습니다. 돈 궤에 들어 있는 돈을 훔쳐 가곤 했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베다니의 마리아가 자신의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것을 팔면 삼백 데나리온 이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만일 그 돈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기 위해 돈 궤에 넣는 다면, 그 돈은 몽땅 가룟 유다의 것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곧 예수님은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동시에 제자들은 모두가 뿔뿔이 흩어질 것입니다. 그 때를 틈타서 가룟 유다도 슬그머니 사라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가 맡은 돈 궤는 자연히 그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리는 바람에,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많은 돈이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화를 내며 마리아를 책망했습니다. 자기가 그 돈을 다 차지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해서 마리아에게 심통을 부린 것입니다. 

이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판 대가로 은 삼십을 받았습니다. 은 삼십은 백 이십 데나리온 정도가 됩니다. 그러니까 가룟 유다는 베다니에서 훔치지 못했던 돈 삼백 데나리온의 삼분의 일 정도를 예수님을 팔아서 대신 챙긴 셈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돈을 한 푼도 쓰지를 못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무죄한 피를 팔았다는 자책감에 사로잡혀, 자기가 받은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에게 도로 돌려주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도로 받으려고 하지 않자, 가룟 유다는 그 돈을 성소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마27:5 말씀처럼, 그는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그 때 그의 목을 맨 끈이 풀렸든지, 아니면 목을 맸던 나뭇가지가 부러졌을 것입니다. 그 결과 행1:18 말씀과 같이, 그의 몸이 아래로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왔습니다. 

결국 가룟 유다는 은 삼십으로 예수님을 판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팔고 말았습니다. 그는 은 삼십, 곧 네 달치 품삯에 해당하는 일백 이십 데나리온으로 자기의 영혼을 팔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판 대가로 사망을, 지옥의 영원한 고통을 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막14:21에서 예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슥11:12 말씀을 보면, 메시야는 은 삼십에 팔리도록 예언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은 삼십에 팔리셨습니다. 그리함으로 예수님은 성경을 응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는 자기의 행위로 인해 화를 당해야만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룟 유다는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때문에 너무도 큰 대가를 치르고 말았습니다. 행여 우리도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기 위해서 예수님을 파는 행위를 서슴없이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다 지나갑니다. 그런 것들은 잠시 잠깐일 뿐입니다. 또한 그것들은 우리에게 화를 안겨줍니다. 그러므로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의 것을 생각합시다. 그리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공중의 새를 기르시며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돌보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늘 바르게 행하며, 항상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힘써 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기회를 찾는 가룟 유다입니다. 

막14:11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눅22:6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그 대가로 은 삼십을 이미 받았습니다. 따라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겨야만 했습니다. 이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어떻게 그들에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가룟 유다는 과연 어떤 기회를 찾았습니까?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눅22:6 말씀과 같이, 그는 무리가 없을 때에 예수님을 넘겨 줄 기회를 찾았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마찬가지로 가룟 유다도 무리가 민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리를 너무 과대평가했습니다. 실상 무리는 변덕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였습니다. 무리는 열렬하게 환호하며 예수님을 뜨겁게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습니다. 그들은 곧 성난 모습으로 돌변했습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실 때였습니다. 그 곳에 모인 무리는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놓아 주지 말고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이렇듯 무리는 변덕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 때 대제사장들과 가룟 유다만 무리를 과대평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탄, 곧 마귀도 역시 무리를 과대평가했습니다. 사탄은 무리를 이용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막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눅22:3 말씀과 같이, 사탄은 가룟 유다에게 들어갔습니다. 

흔히들 사탄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사실은 그 정반대입니다. 사탄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방해하려고 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죄인들의 구원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계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임을 당하시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말하자면 그 때 사탄은 베드로를 이용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막으려 했던 것입니다. 

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탄이 가룟 유다에게 들어갔습니다. 사탄은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을 배반하고, 대제사장들을 찾아가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그들에게 팔아넘기게 했습니다. 이를 통해 사탄이 꾀한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공회는 계획을 앞당겨 예수님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그러면 명절에 모인 무리가 민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무리는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바라던 바였습니다. 사탄도 무리를 과대평가했던 것입니다. 

사탄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사탄이 욥을 칠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라, 욥의 생명은 해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렇듯 사탄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범위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따라서 사탄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결코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대속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리함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이상 긴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요3:16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 죄악에 빠졌던 우리까지 사랑하니 참 사랑 아닌가.” 우리도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기 바랍니다. 

아울러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시55:12 말씀입니다.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계속해서 13∼14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때로는 우리도 가까운 사람에게서 배반을 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제자로부터 배반을 당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배반당했을 때의 아픔을 아십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발을 씻으셨습니다. 우리도 우리를 배반한 자를 용서하며 사랑합시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로하시며, 우리에게 영생으로 보응하실 것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마음을 품기 바랍니다. 그리해서 이번 한 주간도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삽시다. 이것이 가장 큰 계명이며, 예수님이 우리 모두에게 바라시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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