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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옥합을 깨뜨리는 헌신 (막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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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합을 깨뜨리는 헌신 (막 14:3-9)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은 마, 막, 눅, 요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마, 막, 요의 기록은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비해, 눅의 기록은 다른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 막, 요의 기록은 예수님의 공생애가 끝날 시점에 베다니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비해, 눅의 기록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가버나움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기록 모두 마리아라는 이름의 여인이 향유를 부었지만, 하나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이고, 다른 하나는 막달라 마리아라고 추정되는 여인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는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던 사건이 두 차례 있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도유사건은 눅에 기록된 것으로 공생애 초기에 갈릴리 지역에서 막달라 마리아로 추정되는 여인에 의해 행해졌고, 두 번째 도유사건은 마, 막, 요에 기록된 것으로 공생애 후기에 유대 예루살렘 지역에서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에 의해 행해졌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 두 번째 도유사건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 사건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때는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기 직전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있는 시몬이라는 나병환자의 집에서 식사하고 계셨습니다. 아마도 시몬이라는 사람이 과거 나병환자였는데 예수님께서 고쳐주셨고, 감사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대접하는 자리였을 것입니다.

이 때 한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이 여인은 손에 값비싼 나드 향유 옥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여인이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너무도 갑작스런 행동에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다 놀랐습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입을 열었습니다. 심지어 화를 내며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왜 이토록 값비싼 향유를 허비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산이 빠른 사람들은 이 향유가 삼백 데나리온 이상 가는데, 이것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그러시면서 이 여인이 행한 일은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축복하시기를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일도 전해 저서 이 여인을 기억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아주 특별한 헌신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영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또한 영적인 도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감사로 드린 헌신

우선 이 여인이 왜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여인은 마와 막에서는 익명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을 보면 이 여인이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리아가 왜 예수님을 찾아왔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요 1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질병으로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나사로는 마르다와 마리아 두 누이와 함께 살던 오라비였습니다. 그러니까 마르다와 마리아는 나사로를 의지하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다 갑자기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이 때 이 마리아의 슬픔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어서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의 무덤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 나사로가 다시 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직접 무덤에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 말씀 그대로 죽었던 나사로가 무덤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됐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예수님을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갈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시급하게 산헤드린 공회를 열어서 예수님을 체포하여 살해할 음모를 꾸미게 됐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사실을 아시게 됐습니다. 아직 십자가를 지실 때가 아니시기 때문에 그대로 끌려가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함께 급히 에브라임 지역으로 피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죽은 오라비를 살려주셨기에 너무도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늘 예수님께 많은 은혜를 입고 있는데, 죽은 오라비까지 살려주셨으니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감사를 표할 겨를도 없이 예수님께서 길을 재촉하셔서 떠나셨습니다. 감사를 표하지 못한 안타까운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 1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때가 되셔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려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기 위해 베다니에 오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보면,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머무시며 식사를 드시고 계셨습니다. 이제 이 소식을 마리아가 듣게 됩니다.

그렇게도 기다리던 예수님께서 드디어 자기 마을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도 기다리던 감사를 표할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다시 만나면 어떻게 감사를 표할까 아마도 많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서 준비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것은 결코 돌발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른 행동이 아닙니다. 오래 생각하고 오래 준비하여 표현했던 감사의 표시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의 옥합을 깨뜨린 헌신은 감사로 드린 헌신이었습니다. 오라비를 살려주신 것에 대한 감사를 표현한 것입니다. 오라비의 생명을 살려주셨는데 무엇이 아까워 드리지 못하겠습니까? 

얼마 전 중국 이병태 전도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우리가 돕고 있는 네 곳의 신학교와 네 성의 양회 지도자로부터 연락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입당이 가까웠을 텐데 자기들이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물어왔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분들이 우리교회를 위해 계속 기도해 왔습니다. 우리교회가 건축을 준비할 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 왔습니다. 그러다 입당이 가까웠음을 알게 됐던 것입니다. 그래서 넌지시 물어 온 것입니다.

부담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이분들이 성의를 표할 수 있게 해 드리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놓고 오래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분들을 방문할 때마다 신학교나 기독교협회 사무실에 멋진 족자가 붙어있는 것을 보았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래서 축하의 글을 써달라고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연락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각 성의 특징을 담아 멋진 글과 그림을 보내왔습니다. 각 성에서 2-3점씩 축하의 작품을 보내왔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지하 4층과 지하 2층 엘리베이터 입구에 표구해서 걸어 놓았습니다.

저는 이 작품들을 볼 때마다 중국의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분들이 마음 깊은 곳에 우리를 향한 감사를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분들을 향한 깊은 정을 느끼게 되었고, 그동안의 선교사역의 보람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마 우리 주님의 마음도 같았을 것입니다. 옥합을 깨는 헌신 속에 담긴 마음 깊은 감사를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헌신을 소중하게 받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헌신에 마음 깊은 감사가 담겨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의 그 크신 은혜에 대한 마음 깊은 감사가 담겨야 하겠습니다.

허비로 비쳐진 헌신

안타까운 것은 마리아의 옥합을 깨는 헌신이 허비라고 비난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4절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사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마리아의 옥합을 깨는 이 행동은 허비로 보입니다. 이 향유가 워낙 고가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 향유는 순전한 나드입니다. 이 나드 향은 멀리 히말라야 산맥이나 인도 지방에서만 나는 향입니다. 그래서 이 향은 당시 수입산입니다. 게다가 순도 100%입니다. 게다가 옥합에 이 향을 담았습니다. 

본문을 연구하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 옥합은 원어를 보니까 ‘알라바스트론’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알라바스타’라는 특수한 대리석으로 만든 향유병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이 강대상 십자가 뒤편의 이 돌이 바로 알라바스트 돌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돌로 향유병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얼마나 귀했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니 이 향유의 값이 삼백 데나리온은 더 나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오늘 노동자 하루 품값을 10만원으로 계산해 본다면, 3000만원 정도의 가치를 가진 값비싼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이렇게 비싼 향유를 예수님 몸에 부었습니다. 한 번 부어버린 향유는 다시 쓸 수 없기에 이 비싼 향유를 한 순간에 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허비처럼 보인 것입니다.
어떤 제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이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으면 얼마나 좋았을 것이냐는 것입니다. 보다 더 가치 있는 일에 썼다면 얼마나 좋았을 것이냐는 것입니다.

물론 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물질적 가치로 따지면 옳습니다. 그리고 인본주의적 가치로 따져도 옳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신을 과연 물질적 가치로만 따질 수 있을까요? 인본주의적 가치로만 따질 수 있을까요?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 앞에 온전한 헌신을 드린 사람들은 모두가 다 허비로 비쳐진 헌신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아들을 제물로 바칠 수 있었겠습니까?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미친 짓입니다. 솔로몬은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한 마리 소를 드려도 되는데 소 천 마리를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물질적 관점에서 보면 분명히 허비입니다. 바나바는 자기 땅을 팔아 교회에 바쳤습니다. 베드로나 바울은 자기의 생애 전체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낭비’를 했던 사람들입니다. 세속주의적 가치관과 인본주의적 가치관을 내려놓았습니다. 오직 영적 가치관으로 하나님 앞에 거룩한 낭비로 온전한 헌신을 보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는 바보가 될 줄 알아야 합니다. 지나치게 따지고 계산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 헌신을 기쁘시게 받으십니다. 계산된 헌신, 인색한 헌신은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함량 미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안 하니만 못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주께 열납된 헌신

옥합을 깬 마리아의 이 헌신을 보신 주님의 반응이 뜻밖입니다. 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한 마디로 말하면 마리아의 헌신이 결코 허비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좋은 일이라고 규정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좋은 일인 이유에 대해서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그러니까 마리아가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이 앞으로 있게 될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일이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바로 돌아가실 것이라는 생각을 추호도 해 본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다는 생각은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일을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일로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의 옥합을 깨는 이 헌신이 주님께 열납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헌신을 기뻐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헌신이 주님의 손에 들려지니까 놀랍게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아니 이 헌신을 주님께서 놀랍게 사용하신 것입니다.

요 6장을 보면 오병이어의 표적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오천 명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모여들었습니다. 이제 식사시간이 지나 저들이 시장했습니다. 그런데 저들을 먹일 방법이 없습니다. 저들을 먹이고자 해도 돈이 없습니다. 설령 돈이 있다고 해도 어디서 5000명분의 식사를 사 올 것입니까?

마침 안드레가 한 아이가 자기 먹을 음식을 가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그 오병이어를 주님께 내어놓았습니다. 자기가 먹을 것을 내어놓은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는 옥합을 깨는 것과 같은 헌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헌신이 주님의 손에 들려지자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오천 명이 먹고도 12 바구니에 차는 이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아이는 자기가 주님께 드린 오병이어가 이렇게 쓰임을 받을 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만 자기가 먹을 음식을 주님께 드렸을 뿐입니다. 이 작은 헌신이 주님의 손에 붙잡히니까 놀라운 열매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작은 헌신이 때로는 주님께서 귀히 쓰시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본문 말미에 주님께서 소중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임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한 마디로 말하면 이 마리아의 옥합을 깨는 헌신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알려지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헌신의 모델’로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리아에게는 더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자신이 오고오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종의 헌신의 모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서구 문화권에서는 부러움의 대상을 ‘워너비’(wannabe)라고 합니다. ‘want to be’를 소리 나는 대로 말한 것입니다. 대체로 대중스타에 대한 동경을 표현할 때 주로 쓰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로 ‘롤 모델’(role model)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본받고 싶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워너비와 조금은 다른데 모범이 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의 옥합을 깨는 헌신은 주님께 열납되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부러움의 대상으로 워너비가 되어야 합니다. 그 뿐 아니라 그를 기억하게 하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볼 때 우리가 꼭 본받아야 할 롤 모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가 영적인 측면에서 우리의 영적 후배들에게 워너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뿐 아니라 롤 모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감사한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난 헌신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비록 사람들에게 허비라고 비난을 받을 지라도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헌신이 주님께 열납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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