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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안식 (마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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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안식 (마 11:28-30)
  

들어가는 말

지난 금요일(10월 5일) 감리교 신학대학교 대학원생 영성 지도 차 강화에 있는 ‘웨슬리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밤늦게 까지 대학원생들과 개인 상담을 했습니다.
상담 결과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학생들이 사역과 학업에 지쳐 있고, 미래에 대하여 불안해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어찌 신학대학생들만 이렇게 현실에 지쳐있고, 미래를 불안하게 여기겠습니까?

오늘 우리 주변의 청년들은 현실에 지쳐있고, 미래에 대하여 불안해하는 삶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국민 일보 10월 5일자 1면에 이런 토픽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50대 은퇴 후 재취업 아버지는 산재에 시달리고, 20대 청년 인턴으로 들어간 자식은 기간 끝나자 다시 백수’
기사 내용인즉 은퇴 후 재취업에 나선 고령자들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일자리에 내몰리면서 산업 재해에 노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례로 산재 사망자 55%가 50대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또 청년들이 인턴사원으로 채용되어 정규직으로 전환될 것을 기대하고 열심히 일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285개 공공기관에서 인턴으로 일한 청년들이 정규직을 전환된 경우는 10명중 1명에 불과했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이 땅의 사람들이 무거운 삶의 짐으로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삶이 피곤하다.”라고 말합니다.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1.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라는 표현은 노동자에 대한 이미지를 연상시킵니다. 
‘수고하고’라고 번역된 ‘코피온테스’라는 희랍어는 ‘육체적으로 곤하고 지치다.’(요4:6) ‘감정적으로 용기를 잃고 낙담하다.’라는 뜻입니다.
또 ‘무거운 짐 진 자들아’로 번역된 ‘페포르테스메노이’라는 말은 ‘누군가에 의해 무거운 짐이 지워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현대인의 삶도 갖가지 스트레스와 무거운 짐으로 지쳐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도처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평화나 안정이 아니라 불화와 다툼과 혼란의 아우성입니다. 
이전에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똑똑한 세기인 21세기에도 정치적인 소요와 경제적인 불안정은 여전합니다. 
오히려 점점 더 수렁에 빠져드는 느낌입니다. 
모든 상황이 불안정합니다. 
우리는 마치 성난 파도위에서 뒤집힐 듯 흔들리고 있는 일엽편주를 타고 있는 듯합니다.

계몽주의 시대에는 사람을 잘 계몽하면 선한 사람을 만들 수 있고, 좋은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에 뒹굴고 있습니다.
양심은 그 사실을 고발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늘 불편합니다.
쉼이 없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죄 된 인간의 근본적인 실존상황일지도 모릅니다.

창3:17-18절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그렇다면 어떻게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참 쉼을 얻을 수 있을까요?

2.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28절)

예수 그리스도만이 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당시에 가장 엄격한 율법 중에 하나는 ‘안식일 규례’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쉼을 준다.’는 이 안식일을 어김없이 지켰으나 진정한 쉼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쉼’을 줘야할 안식일이 그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지친 자들에게 ‘진정한 안식’과 ‘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 말씀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우리에게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문제의 유일한 해답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양심은 우리를 정죄하고 고발합니다. 
어떻게 그런 부끄러운 과거를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과거의 오점과 죄책과 죄들을 지워 버릴 수 있겠습니까? 
철학이 나를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도덕적인 노력이나 신비주의가 나를 도울 수 있을까요? 
그 어떤 것들도 그 문제들을 다루지 못합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감당하셨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구원은 100%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구원은 우리의 선행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악행으로 잃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갈보리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는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한 환경에서도 평강을 주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위대한 점입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울어야 할 때 울지 않습니다.
절망해야 할 때 절망하지 않습니다.
포기해야 할 때 포기하지 않습니다. 
죽음까지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이것은 환경과 상관없이 온전한 안식을 누린다는 말씀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있습니다. 
영국 북부 공원에 12그루의 나무를 심어놓고 예수님의 제자들의 이름을 붙여놓았답니다.
당연히 가룟유다 나무가 있겠지요?
오고가는 사람들이 ‘배신자’라고 나무를 향해 저주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나무가 말라 죽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식물이 저주를 받으면 죽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영적으로 무디어서 그렇지 영적으로 민감하다면 다 질식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피할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기독교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모든 메시지는 예수님께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이 예수님에 대하여 주장하는 것을 보면 엄청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세상을 구하실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천국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죽음의 의미, 영원한 삶에 대한 답이 오직 예수님께 있다고 주장합니다.
행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한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확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독단적이고, 독선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신약성경보다 독단적인 책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신약성경은 곁눈질 한번 주지 않고 확정적으로 선언합니다.
“여기에 인간들이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여기에 인간들이 죄의 짐으로부터 구원될 수 있은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여기에 인간들이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여기에 인간들이 유황불이 타오르는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 받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여기에 인간들의 얽히고설킨 삶의 문제를 푸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성경의 진술이고, 선언입니다.
추호도 주저함이 없습니다.
못 믿겠다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안 믿겠다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요3:36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3.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쉼을 얻게 되는가?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준다’는 말입니다. 
‘준다’라는 말씀이 어디 나와 있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반절에 나오는 ‘쉬게 하리라.’는 말은 ‘쉼을 준다.’는 뜻입니다. 
복음은 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유독 복음만이 줍니다. 
세상의 다른 모든 가르침들은 요구를 합니다. 
더 배우라고 요구하고, 더 지적이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더 많은 도덕적 노력을 기울이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은 ‘준다.’는 말에 집약되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성취하라는 요구를 받지 않습니다. 
단지 줄 테니 받으라는 요청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줄 테니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어거스틴의 생애를 읽어 보십시오. 
마틴 루터와 존 칼빈의 생애를 읽어 보십시오. 
존 웨슬리와 그의 형제 찰스의 인생에 대해서도 읽어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안식과 평안을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앞에 설 수 있을 만큼 선한 사람이 되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런데 선한 삶을 살려고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함 앞에 더욱 깊이 절망할 뿐이었습니다.

찾으면 찾을수록 그들의 어깨에는 더 무거운 짐들이 지어졌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들은 갑자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안식을 찾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찾고 있던 것이 그냥 받아서 누리면 되는 하나의 선물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그 선물을 받음으로써 영혼의 안식을 찾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저는 감히 하나님을 비판하는 오만을 부렸고, 마치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에 스스로 설 수 있는 듯이 교만했습니다. 저는 철저하게 죄인이며, 당연히 하나님의 진노와 정죄를 받아야 마땅한 자임을 인정합니다. 저는 성경에 나온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믿습니다. 저는 나사렛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과 예수님이 나의 죄를 지고 나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이고 참 쉼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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