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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순교하는 공동체 (행 7:5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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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하는 공동체 (행 7:55-60)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도행전의 상징적인 인물은 베드로와 바울뿐 아니라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입니다. 그 중에서도 집사 빌립과 스데반은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빌립은 전도자의 상징이요 스데반은 순교자의 상징입니다.  

사도행전의 심장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한다면 모진 핍박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구령의 열정과 순교의 정신’입니다. 특별히 순교는 사도행전의 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보여주는 바로 그 교회’의 또 다른 특징은 순교하는 공동체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초대교회의 순교 신앙의 모습을 살펴보고, 성경과 교회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어떻게 하면 순교 신앙으로 무장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초대교회의 ‘순교 신앙’의 모습

사도행전적 교회의 일곱 번째 특징은 순교하는 공동체입니다.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는 뜻밖에도 새로이 세워진 일곱 집사 중에서 나왔습니다.  

집사 스데반은 예수님을 위해 스스로 순교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기독교회의 첫 순교자로서, 그의 삶은 이후 수많은 전도자와 순교자들, 특히 바울 사도에게 영감을 불어넣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교회는 순교하는 공동체입니다. 복음을 위해 순교할 각오로 박해자들을 향해 의연히 맞서고 있는 집사 스데반의 모습을 보십시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55절).

원수들 앞에 서서 담대히 복음을 외치던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의 영광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성경에서 승천하신 예수님은 보좌에 앉아 계신다고 기록되어 있는데(마 26:64, 엡 1:20, 골 3:1, 히 1:3), 서 계신다고 기록된 곳은 이곳뿐입니다. 

예수님이 ‘서 계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義)를 드러내고 믿음으로 순교의 자리에 서 있는 스데반을 격려하고 환영한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영안(靈眼)이 열린 스데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힘을 받았겠습니까!  

또한 ‘서 계신다’는 것은 스데반이 믿음의 순교자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증언해 주는 증인의 의미를 전달합니다. 순교자는 결코 혼자 억울하게 죽는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은 결코 홀로 쓸쓸히 죽어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한 영광을 누리시는 예수님께서 스데반의 믿음을 인정하고 증인으로 보고 계시는 가운데 순교의 제물이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영예로운 죽음입니까? 그의 승리의 외침을 들어보십시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56절).

성도 여러분! 스데반은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누린 삶의 승리자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스데반의 순교의 열정을 그대로 이어받아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해내었습니다. 그들은 사나 죽으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삶을 헌신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순교적 신앙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한 평생을 순교적인 믿음으로 살았던 바울 사도는 결국 AD 67년경 로마에서 목 잘려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기둥이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이처럼 순교적인 신앙으로 살다가 주님을 위해 생명을 바쳤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고, 그의 동생 안드레는 그리스에서 전도하다가 X자형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아그립바 왕에게 목베임을 당했고, 그의 동생 요한은 에베소에서 끓는 가마에 던져졌다가 튀어 나오게 되자 저들이 놀라서 밧모 섬으로 정배시켰습니다. 요한은 그곳에서 계시록의 환상을 체험하고 기록했습니다. 

빌립은 브리기아에서 전도하다가 기둥에 매달려 순교했고, 바돌로매는 아르메니아에서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 도마는 멀리 인도 남부에서 전도하다가 창에 맞아 죽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태복음을 남긴 사도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전도하다가 목 베임을 당했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뜨려져 순교했고, 유다는 파사에서 활촉에 맞아 죽었습니다.
 
시몬은 애굽에서 전도하다가 유대에 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최후의 사도 맛디아는 에디오피아에서 돌에 맞아 장렬히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는 순교하는 교회였습니다. 고난 없이 복음은 전해지지 않고, 순교 없이 교회는 세워지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의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 목숨을 걸고 산 사람들이었고, 우리 또한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2. 신구약 성경과 교회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

순교는 신약성경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열방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제사장 나라로 세우시고 열방을 구원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주의 종들을 부르셔서 여호와의 구원을 선포케 하셨습니다. 주의 종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고난받기도 하고 때로는 순교의 제물이 되기도 했습니다. 

남방 유다 왕국의 말기에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불러내어 패역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이사야는 성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8절). 

자신의 소명을 깨달은 선지자는 보내심을 받은대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했고, 결국 악한 자들에 의해 톱에 쓸려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사야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순교적인 신앙을 가진 성도를 찾으십니다. 유다왕국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 이주했던 시절의 사람 다니엘과 세 친구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그들은 아직 청소년이었을 때부터 제사 음식을 거부하면서 목숨을 걸었고, 느부갓네살 왕의 금신상 앞에서 절하기를 거부하면서 풀무불에 던져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절대절명의 죽음의 자리에서 그들을 기적적으로 건져내셨습니다. 

다니엘은 자신을 시기하는 악한 자들의 모략을 알고도 목숨을 걸고 예배자의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아니했고, 이때 하나님은 다니엘을 사자의 입에서 지켜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때로는 순교를 허용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죽음의 자리에서 건져내시기도 하십니다. 문제는 주님의 계명과 말씀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아까워하지 않는 성도의 마음가짐입니다.

수산궁의 왕후 에스더를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각한 위기에 처하자 하나님은 숨겨뒀던 인물 에스더를 찾으십니다. 먼저 왕후였던 와스디의 뒤를 이어 유대인 출신의 그녀가 왕후가 된 것은 이때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에스더 앞에 백성과 민족의 운명이 놓이게 되면서 에스더는 큰 부담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에스더는 자신의 위치가 바로 이때를 위한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결코 안전하지 않은 길을 ‘죽으면 죽으리라’는 필사의 각오로 가게 됩니다. 

신약 히브리서 기자는 주의 종들의 믿음의 행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히 11:33-35=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 그뿐 아닙니다.

히 11:35-38=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성경 번역사에 있어 가장 큰 공헌을 한 윌리엄 틴데일은 당시 라틴어와 헬라어로 되어 있어 사제들만 읽을 수 있었던 신구약 성경을 성도들도 읽을 수 있도록 영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다가 영국 왕 헨리 8세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2년의 옥고를 치른 틴데일은 높은 장대에 매달렸다가 다시 화형을 당하는 끔찍한 형벌을 받아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마지막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여! 영국 왕의 눈을 열어주소서.” 

그 후 1611년에 영국 왕 제임스는 자신이 명령하여 번역하게 한 영역본 성경을 내놓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직도 가장 전통 있고 권위 있는 성경으로 정평이 나 있는 흠정역 성경(King James Version)입니다. 

1943년, 조국 독일에서 포악한 히틀러 정권과 맞서 자유와 평화를 외치다 게슈타포에게 체포된 본 회퍼 목사님은 2년 후 프로센부르크 강제수용소에서 처형당했습니다. 1945년 4월 9일, 그는 동료 죄수들과 지상에서의 마지막 예배를 드리면서 다음과 같이 격려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광명과 소망의 세계가 있습니다.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예배 후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본 회퍼 목사님은 고개를 돌려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새 생명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의 절정은 순교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어느 나라든지 복음이 처음 전파될 때 많은 순교의 피를 흘려왔습니다.  

한국교회의 경우에 영국에서 온 20대의 젊은 선교사 토마스가 대동강에서 무참하게 관료의 칼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그가 죽으면서 우리나라에 전한 한권의 성경책과 그가 흘린 순교의 피는 이 땅을 축복의 땅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일제강점기에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감옥에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제암리 교회 성도들은 예배드리다가 일본 경찰들이 출입문을 잠그고 불을 지른 관계로 불 속의 제물이 되었고, 살아남은 성도들은 총으로 사살당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순교자들의 거룩한 피 위에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동해 천곡감리교회의 순교자 최인규 권사님을 아십니까?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절하다가 잡혀간 그에게 일본경찰은 망신을 주려고 인분통을 지게하고 “내가 신사참배를 거부한 최인규입니다” 라고 소리치며 동네를 돌게 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몸짓으로 망신당하는 것을 오히려 은혜로 여기고 소리치자 사람들이 더 감동했습니다.  

동방요배를 반대하다가 다시 들어간 감옥에서도 찬송하며 전도하자 고문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함께 수감된 어떤 분이 안쓰러워 “그냥 한다고 하고 나가십시오” 라고 하자 눈을 크게 뜨고 똑바로 쳐다보면서, “나는 신앙 양심으로 사는 사람이므로 거기에 대해서는 다른 말 마시오”라고 소리쳤습니다. 양심의 소리가 순교자를 만든 것입니다. 

여수의 손양원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정신적 표지요 위대한 목회자입니다. 주님의 제단에 바쳐진 한 송이 백합화와 같은 순결한 생애는 듣는 이의 눈시울을 젖게 합니다.  

우리는 손목사님에게서 오직 예수를 위한 순교 신앙을 봅니다. 일제시대 이 땅의 대부분의 정치인, 지식인, 문화예술인, 심지어는 주님의 교회를 맡은 성직자들마저도 친일에 앞장서고 신사참배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했습니다. 담당 검사가 “감옥에서 풀어줄 테니까 신사참배를 반대하지 말고 덴꼬(전향)를 하라”고 몇 번을 회유하고 협박을 했지만 목사님은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켰습니다.

“나는 어디나 예수님과 함께 산다. 감옥에서도 바깥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산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덴꼬를 하겠는가? 당신은 덴꼬가 문제이지만 나는 신꼬(信仰)가 문제이다.”

또한 해방 이후 6·25전쟁이 발발하여 교인들이 피신하라고 하였지만 끝까지 교회를 지키다가 공산군에게 체포되었을 때에도, 예수 복음을 전하다가 개머리판으로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온 몸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오직 예수를 외치며 기도하다가 총에 맞아 숨을 거두셨습니다. 

손목사님은 오매불망 주님 오시기를 기다렸던 재림신앙의 소유자이십니다. 그는 소록도 애양원에서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이 오시는가, 노래하며 주님의 재림을 고대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교인들은 너무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좋은 집에서 편하게 살다보니까 주님을 사모하는 재림신앙을 잃어갑니다. 한국 초대교회 당시만 해도 성도들은 아무리 배고프고 힘들어도 주님 고대가를 부르며 행복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까!
 

3. 순교하는 교회 되려면?

고난 없이 복음은 전해지지 않고 순교 없이 교회는 세워지지 않습니다. 스데반뿐 아니라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람들은 순교의 영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사도행전의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도 순교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교회가 사도행전에서 보여주는 바로 그 순교하는 교회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먼저는 우리 모두 주님이 스데반의 순교 장면에서 벌떡 일어나셔서 스데반을 영접하신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순교적 신앙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성도들에게 집중됩니다.

주님을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평소에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연습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 16:24-25=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잃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어떤 삶을 말하는 것입니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세계관, 가치관에 있어서의 혁명적인 변화입니다. 세상 나라의 가치관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의 변화입니다.

우리의 기도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기도를 한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주문(呪文)을 외우는 것같은 기도를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일방적인 요구 자세를 버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정욕을 위하여 구하지 않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고백하십시오.

주인공의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조연의 역할에 만족하십시오. 말구유에 탄생하신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아 낮아지고 또 낮아지십시오. 감투를 초월하여 주님의 일에 매진하십시오. 한국교회를 싸구려로 만들고 있는 가짜 경력, 가짜 박사학위 따위를 허용하지 마십시오. 

총신대부설 교회문제연구소에서 전국 24개 신학대학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조사내용에는 교회 세속화의 첫째 원인으로 물량제일주의(38.3%)를, 둘째로 신앙과 생활의 별개화(31.3%)를 꼽았습니다. 우리의 순교적 신앙의 방향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게 하면 우리교회를 더욱 순교하는 공동체로 만들 수 있을까요? 열심히 전도하십시오.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우리를 고난의 현장, 십자가를 지는 순교의 현장으로 안내합니다.  

이단과 사이비 집단과의 맞섬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어둠의 세력들은 진리를 수호하는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 온갖 불화살을 쏘아대지만 결국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사회의 부정과 불의에 주저하지 말고 입을 열어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하십시오. 정권이 부패할 때 과감히 그들에게 맞서 저항의 몸짓을 보여야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주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증거하다가 뺨을 맛고 우물에 빠뜨려지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습니다. 종국에는 애굽까지 질질 끌려가면서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 가운데서도 선지자의 사명을 다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이 시대의 예레미야가 급히 필요합니다!

종북주의자들이 우리 사회를 어지럽힐 때 침묵을 깨고 교회의 연합된 목소리를 드높여야 합니다. 종교편향의 부조리를 바로잡기 위하여 개교회주의의 담을 헐고 연합의 광장으로 나와 손을 맞잡아야 합니다. 알량한 교권과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 온갖 부도덕과 비윤리적 행동에도 눈감아버리는 비겁한 무리들을 향해 사자후를 토해낼 이 시대의 세례요한이 시급히 필요합니다!  

지금은 소외된 이웃을 향해 기도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직접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투자하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행여 나눔의 천사가 되는 일을 몇몇 은사받은 사람들에게만 맡겨도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시대 강도 만난 자들을 외면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되지 마십시오. 비운의 땅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 땅을 도망다니고 있는 30만 탈북난민들을 나몰라라 하는 태만의 죄를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무언가는 해야 합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며, 개인에게 어떤 불이익이 돌아오더라도, 저 비인도적이고 잔인한 북한 김정은 공산 정권과 중국 공산당 정부를 예수님 이름으로 하나님께 고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종말에 전세계적으로 임할 대환란의 차가운 계절을 준비해야 합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불어왔던 핍박의 바람 앞에 용감히 맞섰던 스데반의 용기를 키워야 합니다. 

네로황제이후 한 세기 이상 계속되었던 엄청난 박해속에서 불굴의 마라나타 신앙을 지키며 맹수의 밥이 되어갔던 수많은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할 사람을 부르시며 찾고 계십니다. 이 땅에 숨겨뒀던 하나님의 사람들을 말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주님을 위하여 나설 일꾼은 ‘구령의 열정과 순교적 정신’을 가진 사람입니다. 계시록 11장의 ‘두 증인’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이 바로 그런 사람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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