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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서 씻었더니 (요 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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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씻었더니 (요 9:1-12)


어느 목사와 이발사가 시카고의 빈민거리를 나란히 걷게 되었는데.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그 주변은 몹시 지저분하여 악취마저 풍기고 있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계시고 그분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세상에 어찌 저렇게 처참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신단 말입니까.”라고 회의론자인 이발사가 말했습니다. 그때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오고 너덜거리는 옷을 입은 청년 하나가 지나가는 것을 본 목사는 “저 친구를 보십니까? 저 친구는 수염도 깎지 않고 머리는 어찌나 긴지 어깨를 완전히 덮어버렸군요. 

어찌 당신같이 훌륭한 이발사가 젊은이들이 저렇게 이발도 하지 않고 거리를 활보하도록 내버려두십니까?”라고 이발사에게 물었습니다. 이발사는 “그야 저 친구가 이발해달라고 이발소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죠. 이발해 달라고 들어오기만 한다면이야 아주 미남자를 만들어줄 텐데 말입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는 조용히 입을 열어 “하나님께서도 당신과 마찬가지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인간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와 하나님께 기회를 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으실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인간은 타성에 젖어 있기 때문에 더러운 죄악 중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훌훌 털고 주께로 나오려는 용기를 가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밭에 콩도 심지 않은채 콩이 나지 않는다고 하지 말고, 콩부터 심어야 하나님께서 싹트게 하시고 길러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불행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행복하다면 어느 정도로 행복하며, 불행하다면 어느 정도로 불행합니까? 또한 여러분은 스스로를 쓸모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전혀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용인에 있는 에버랜드는 지금은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 공간이지만 과거에는 자연농원이었습니다. 
과수원과 돼지 농장, 놀이동산이 함께 공존했습니다. 
대부분의 수익이 창출되는 놀이 동산은 봄이나 여름철에는 어린이들이 몰렸으나, 겨울철에는 내방객의 발길이 끊겼습니다. 

자연농원은 따뜻할 때 벌어서 추울 때는 돈을 쓰는 악순환이 반복되었습니다. 
사원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겨울에 눈이 내리면 산비탈에 눈썰매장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서울 도심에 사는 어린아이들이 겨울 방학에는 마땅히 놀이거리가 없었던 터에 눈썰매장을 만들면 아이들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 이 아이디어는 대히트를 쳐서 눈썰매장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겨울철에도 관객이 몰리자 자연농원은 흑자로 바뀌었고 이후에 에버랜드로 이름을 바꾸어서 테마파크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유사한 일이 일본에도 있었습니다. 
일본 훗카이도에 있는 아시히야마 동물원은 갈수록 줄어드는 관람객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습니다. 
이 와중에 사육사의 창조성으로 돌파구를 찾았습니다. 
사육사 15명은 자기가 담당하는 동물들을 관람객들이 어떻게 하면 더 가까이에서 생생하게 볼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봤습니다. 
갖가지 기발한 상상력이 도화지를 통해 나타났고 동물원은 이것들을 현실로 만들어 갔습니다. 
예컨대 북극곰 우리 한 가운데에 볼록한 투명 캡슐을 만들어 그 안에 관람객 서너 명이 들어가 북극곰을 볼 수 있게 했습니다. 

또 바다 표범관 곳곳에는 큰 유리 기둥을 만들어 관람객들이 아주 가까이에서 바다표범을 볼 수 있게 했습니다. 
그 결과 관람객 수는 과거 전성기 때를 크게 웃돌며 훗카이도의 명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호랑이를 끄집어내라”라는 책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아이디어를 춤추게 하라고 합니다. 
아이디어는 바이러스와 같다는 것입니다. 
창조적 아이디어가 세상을 바꿉니다. 
출현할 위대한 사업, 다음에 흥행할 영화, 우리 사회를 뒤흔들 또 다른 흐름과 사회 혁명은 창조적 아이디어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그 누구도 추종할 수 없는 창조적 아이디어를 가지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1세기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음은 세상을 정복했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는 창조적 변화를 시도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인생의 주님으로 모시면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어느 불행한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아무리 불행해도 이 사람 만큼 불행할 수 없고, 아무리 자기를 쓸모없다고 생각해도 이 사람 만큼 철저하게 쓸모없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소경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다보니 아름다운 것과는 처음부터 거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아름답게 생겼다고 한들 두 눈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누가 아름답다고 하겠습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살아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더 슬플 수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지금이야 앞을 보지 못해도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지만 예수님 당시는 기껏해야 구걸 외에는 살아갈 방도가 없었습니다. 세상이 아름답다고 해도 이 사람은 그 아름다움을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잘 생겼는지 얼마나 추한지도 알지 못합니다. 한번도 보지를 못했으니 자기를 가꾸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겨우 살아갈 방도를 찾은 것이 남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40년 동안을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거지로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책임이 누구한테 있습니까? 누구를 탓해야 합니까? 적어도 본인의 잘못은 아닙니다.
스스로는 아무런 책임도 없고 아무런 잘못도 없지만 평생토록 이 고생을 해야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지, 왜 나만 장님이어야 하고 나만 고생하고 나만 불행해야 하는지, 도무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희망도 없습니다. 그저 죽지 못해 사는 것일뿐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무얼 가지고 못가지고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잘 살고 출세하는 것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돈 많이 벌고 출세도 하고 하는 등등의 꿈도 이 사람에게는 사치입니다. 그저 이 사람의 관심은 오직 하나 누군가가 던져주고 가는 동전 한닢, 그 선행 뿐입니다.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게 마련입니다. 더욱 살아야 할 이유가 있으면 무슨 수로든지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기만의 고통도 아닙니다. 나이 먹어가며 겨우 동냥을 얻어 살아가는 아들을 지켜보는 부모 역시 고통스럽습니다. 그나마 동냥은 주지 못할망정 쪽박은 깨지 말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에게 아픔을 주는 그런 사람들 역시 얼마나 많은지요.
과거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앞날도 그렇습니다. 그냥 이렇게 살다가 세상을 떠나게 될 턴데 어찌 보면 세상을 떠나는 그 때가 가장 행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고통의 날이 더 이상 그를 어쩔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사람은 마음이 죽은 사람입니다. 앞으로 나는 이런 삶을 살아보리라는 기대조차 할 수 없는 몸이기 때문입니다.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없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하루하루의 삶에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보람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철저하게 무의미한 나날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저 죽지 못해 살아가는 인생이요 철저하게 불행하고, 철저하게 무가치한 사람이 여기에 있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이 사람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소경을 고통 당하는 사람들의 표본으로 여겼습니다. 여러 가지 장애가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힘들게 하는 것이지만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은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닙니다. 이는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정신 내지는 영적인 재앙으로 여겨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얼마나 죄가 많았으면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일까 하는 생각이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살다가 사고로 실명했다면 몰라도 선천적으로 소경이라면 그 부모의 죄 혹은 조상의 죄까지 들먹거리게 됩니다. 아울러서 본인의 죄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반적인 통념에 따라서 제자들도 주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교통사고가 나면 우선 다친 사람을 살리고 치료하는 일을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데, 사고의 원인과 결과만 따지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어느 가정에 불행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도울 방도를 찾아야지, 누구의 죄 때문이다 라고 하는 인과응보만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집니다. 나면서 소경 된 사람을 보았으면 그의 미래를 보면서 어떻게 빛을 보게 할 수 있는가를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과거를 따지면서 부모의 죄냐 자신의 죄냐를 따지는 태도가 너무나도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런 일상적인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과거나 현재의 모습보다 미래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나면서 소경 된 사람을 보고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과거나 현재만을 보신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의 앞으로 되어질 일 즉 미래를 보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생각입니까? 세상에 문제가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마다 가정문제, 자녀문제, 질병문제, 경제문제, 국가문제, 사회문제, 교회문제, 생활문제 등 갖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크던 적던 여러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그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저주나 재앙으로 보느냐 아니면 오히려 문제를 전화위복의 복으로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최소한 내가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이 불행이 앞으로 나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요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면서부터 소경 된 사람은 그 사람 자신이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고. 또 그 사람의 부모가 죄를 범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까? 그 누구의 죄도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놀라운 패러다임 즉 해석의 전환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다 누군가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 불행이 그에게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들도 흔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에게 빛을 주는 일입니다.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일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소경의 눈을 뜨게 해서 밝은 세상을 보게 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동정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신학적인 논쟁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이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며 어떻게 우리가 도울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이 다만 추상적인 토론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내셨을까? 이 사람이 무엇 때문에 태어났을까? 이렇게 된 불행의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이런 문제로 시비를 벌이다가 겨우 한다는 소리가 “전생에 죄가 많았나보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질병관은 죄 때문에 병이 생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두고 그 죄가 누구의 죄인가? 부모의 죄인가, 본인, 혹은 사회의 죄인가를 따졌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람이 안 그래도 괴로워 죽겠는데 남들이 내 불행을 놓고 이러쿵 저러쿵 추상적인 논쟁이나 벌이고 있으니 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모욕입니까? 누구 죄 때문이냐고요? 부모 죄냐, 본인 죄냐? 이러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이 이 사람한테는 얼마나 큰 고통이었겠습니까?
만약 입을 열어 말한다면 그에게도 할 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 당신들은 조상이 깨끗해서 눈 뜨고 나왔소?’ ‘당신들이 나보다 의로운 게 도대체 뭐요?’ 
그러나 소경은 한마디 할 법도 한데 전혀 아무 말이 없습니다. 왜입니까? 억울한 소리를 워낙 많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칭찬을 하든 흉을 보든, 자기 손에 떨어지는 동전 몇닢 밖에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비참한 사람입니다.
이 불행한 사람 앞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 누군가가 말했어야 합니다. ‘누구 죄냐?’를 따지기 전에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면 이런 말입니다.

“예수님,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본문에는 그 말이 없습니다. 왜 이 말이 없습니까? 
“주님께서 이 사람 눈을 뜨게 해주실 수 없을까요?” 아니면 “이처럼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하면 좋겠습니까? 어떻게 도와주면 좋겠습니까?”라고 한 마디 할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좋은 말은 한 마디도 없이 엉뚱한 시비를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일을 합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에도 쉴 틈도 없이 땀 흘리며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주로 했습니까? 사람에게 빛을 주는 일을 했습니까?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일을 했습니까? 사람을 살리는 일을 했습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도 했느냐는 말씀입니다. 그저 오로지 자신만 생각하면서 자신과 자식들이 먹고사는 일에만 급급했다면 좀 부끄러운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빛과 희망을 주고 살리는 일은커녕,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절망하게 하고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어 죽이는 일을 했다면 이는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삶의 태도를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온다.” 이 말씀 중에 “낮”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말하고 “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수난 당하시는 때를 가리킵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시켜 보겠습니다. “낮”은 우리에게 아직 일할 수 있는 힘과 기회가 주어진 직분의 때요 선한 일을 할 때를 말합니다. 그러나 “밤”은 우리가 늙거나 병들어서 힘이 다하거나 아파서 일할 수 없을 때, 직분을 빼앗겨 직분의 때가 다하여 더 일하고 싶으나 일할 수 없을 때, 주님이 오셔서 심판을 시작해버린 때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왜 보내셨습니까? 우리들 모두를 그리고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라고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이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왜 보내셨습니까? 자식새끼나 낳고 오로지 자신과 자식들만을 위해서 일하라고 보내셨습니까? 육신을 위해서 밥이나 먹으며 그저 시간을 죽이다가 지옥에 가라고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까? 분명 그게 아닐 것입니다. 무엇인가 뜻 있고 보람 있는 일을 하라고 보내셨습니다. 심령의 눈이 어두운 사람에게 빛을 전해 주라고 보내셨습니다. 절망하고 있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라고 보내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을 살리라고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 온 목적입니다.

사람에게 빛을 주고 희망을 주어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언제 해야합니까? 지금 해야 합니다. 오늘 해야 합니다. 아직 낮일 때, 직분이 있을 때, 일 할 기회가 있을 때, 우리의 힘이 다 하기 전에, 아직은 건강할 때, 인생의 밤이 오기 전에 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심령에 일하라고 말씀하실 때에 해야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으로 계실 때에 해야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십니다. 

요 8:12에서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셨고 마 5:14~16에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사 49:6에서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빛이 비칠 때에 일할 수 있습니다. 일할 수 있는 기회에 일을 해야합니다. 어두워져 밤이 오면 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우리의 심령이 어두워지기 전에,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서 떠나시기 전에, 우리 인생의 밤이 오기 전에 사람을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순종하는 믿음이 하나님의 역사를 누리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나면서 소경 된 자를 가까이 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겼습니다. 진흙을 소경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그리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좀 절차가 복잡합니다. 다른 병자를 고치실 때는 말씀 한마디로 고쳐주셨는데 왜 이리도 복잡한 절차가 필요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주님의 오묘하신 뜻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침으로 이겨진 흙이 자신의 눈에 닿을 때 소경은 기분이 나빴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았습니다. 더욱 곤란한 것은 앞을 못 보는 소경보고 실로암 못에까지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우리가 바쁜 생활 속에서 왜 교회에 나와야 합니까? 왜 힘들게 새벽 제단을 쌓아야 합니까? 왜 아까운 돈을 예물로 봉헌해야 합니까? 왜 섬기는 일과 한 영혼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까? 여러분에게 값지고 귀한 은혜와 복을 주시기 위한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소경은 참 위대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침으로 흙을 이겨 눈에 바르는 데도 가만히 있습니다. 아마도 성미급한 사람 같았으면 소리라도 질렀을 것입니다. 
“여보시오, 장님이라고 무시하는 거요? 장님 눈은 눈도 아닌 줄로 아오? 흙이 눈이 들어가면 아프단 말이오.”

그러나 이 사람은 가만히 있습니다. 이 하나만으로도 그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께서는 이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십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니 남의 눈에 흙을 짓이겨 발라놓고 나서는 이제 멀리 실로암 못까지 가서 씻으라니요. 이게 무슨 장난도 아니고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보십시오. 이 사람은 이 말씀에 순종합니다. 어쩌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일 수도 있습니다. 실로암 못이 어디 있는지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눈에 흙을 바른 채 지팡이 하나를 의지하여 실로암 못까지 찾아가고 있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후속치료입니다. 지금 당장 치료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과정을 통하여 비로소 치료되는 것입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셨지만 만일에 ‘참 기분 더럽네' 하고 안 갔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마도 이 사람은 눈을 뜨지 못했을 것입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저의 손으로 물을 떠올려 눈을 씻는 그 과정까지의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야 있건 없건, 확신이야 있건 없건, 이유를 알건 모르건 상관없습니다. 오로지 순종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순종입니다. 이유야 물을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라고 했을 뿐이지 “그리하면 눈을 뜨리라”라는 말씀도 없습니다. “틀림없이 눈을 뜨게 되리라, 그래서 네가 볼 수 있게 되리라. 아멘.”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단지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라고만 하십니다.

소경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군소리 없이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소경이 지팡이로 더듬거리면서 실로암 못까지 찾아갔습니다. 어쩌면 이곳저곳에 부딪치며 엎어지고 넘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할렐루야! 밝은 빛을 보았습니다. 세상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눈을 뜨게 하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하늘나라를 보았습니다. 즉시 예수님께 달려왔습니다. 자신의 눈이 뜬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어두움에 다니다가 빛을 본 사람의 증거입니다. 아주 생동감이 넘치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의 고통과 다른 사람의 불행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습니까? 과거와 현재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모두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생각을 바꾸십시오. 안목을 바꾸십시오. 모든 일을 미래지향적으로 보십시오. 긍정적으로 희망이라는 안경을 끼고 현실을 봅시다. 뭐든지 사람을 살리는 쪽으로 생각하십시오. 어떻게 이런 생각이 가능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생각을 품으십시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빛으로 밝게 보면서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하십시오.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십시오. 빛 그리고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고통이 고통되는 까닭은 철저한 상실에 있습니다. 물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잃은 것이 아니요, 소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잃은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마음이 죽은 것입니다. 용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손해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떤 사건을 보시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먼저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십니다. 철저하게 쓸모없는 존재와도 같은 이 소경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할, 보이는 현상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일을 보신 것입니다. 

골 1:25에서 “내가 교회 일꾼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바울 사도가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으나 하나님의 일이 있고, 사람들 눈에는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나 하나님께는 쓸모가 있으며, 사람들의 판단으로는 실패한 것으로 여겨지나 하나님은 그 실패를 통하여 귀중한 일을 이루어가신다는 말씀입니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이 철저하게 불행한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 개별적으로 하나님이 뜻하신 바가 있다고 한다면 두 눈과 두 다리가 멀쩡한 우리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이 얼마나 더 많겠습니까? 그래도 불행합니까? 그래도 쓸모가 없습니까? 하나님의 차원에서 보면 이것은 불행이 아닙니다. 고통은 있겠습니다마는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일입니다. 이 불행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통해서, 오늘 우리가 당하는 현실을 통하여 큰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볼 때는 실패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성공입니다.

사람들은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을 놓고 그의 과거가 무엇이냐, 조상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 곧 미래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과거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십시다. 누구 때문이었는지, 무엇이 원인이었고, 무엇 때문에 불행해졌는지 아무리 두고두고 시비해보아야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습니다. 평생을 두고 파헤친들 하나님밖에 누가 알겠습니까? 예수님은 토론을 중지시키십니다. 그리고 이 고난을 새로운 창조의 기회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특별한 기회로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기회입니다. 위기가 바로 창조의 기회요, 실패가 새로운 기회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회는 성공의 모습이 아닌 실패로 변장해서 오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역경을 통하여 하나님만이 아시는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당하는 분을 보십니까?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스스로 고난당하고 있습니까?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특별한 기회가 온 것입니다.

물질이 넉넉하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물질적 풍요가 곧 삶의 풍요는 아닙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가난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한 기회입니까? 그것은 봉사의 기회요,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요, 진리를 전파할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진 것도 기회요 못 가진 것도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는 모든 형편, 모든 상황이 다 나름대로의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소경이었지만 이 소경이 예수님을 만나자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만난다고 하는 것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부터 새로운 창조의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만나는 순간, 주님께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이제 다시 생각해 보십시다. 소경으로 난 이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내 눈좀 고쳐주세요”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한 일도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지나가시다가 소경을 보고 대화를 하셨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붙드시어 눈에 진흙을 이겨 바르고 씻으라 하셨을 뿐입니다. 왜 예수께서 그렇게 하시는지 또 왜 자기 그 말대로 따라야 하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순종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저부터도 쉽게 순종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이 사람, 위대한 사람입니다.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순종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밑져야 본전이지 뭐. 믿고 따라 해보자’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렇게 하기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참으로 어렵습니다. 실로암 못까지 가서 손으로 물을 떠올려 씻는 동안 눈을 뜨게 되었다니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이 순종, 이 믿음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의심하거나 불순종 할 때에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있고 말씀이 주어질 때에 묵묵히 순종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드러나는 큰 역사가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만나시는 순간에 말씀하십니다. 
“순종함으로 너희 믿음을 보이라” 다시 말해서 믿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간에 하나님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도 나를 통해서 우리 가정을 통해서 우리 교회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그 일이 지금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낙심하고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실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말씀대로 가서 씻었더니 눈을 떠 보게 된 소경처럼 모두 주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우리의 삶의 닫혀졌던 모든 것이 열려지는 귀한 역사가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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