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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경외(1) (신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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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외(1) (신 6:1-3) 

❚비교해 보세요

저는 우리 교회에 대한 자부심이 참 큽니다. 우리 교회 참 좋은 교회고 장점이 정말 많은 교회입니다. 목사는 교회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야 하고 성도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도 교회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야 하고 또 하나, 목회자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장점 중 하나가 성경공부를 잘 하는 교회라고 저는 자부합니다. 우리교회는 “말씀 위에 든든히 선 건강한 교회”라는 비전에 걸맞게 단계별로 잘 짜여진 성경공부 과정이 있습니다. 다 알고 계시지요? 초급, 중급, 고급과정, 그리고 BLTC라고 불리는 성경공부 지도자과정이 있습니다. 

초급과정에는 1년 동안 신구약 성경개론을 공부하고, 중급과정에는 1년 동안 장르별로 율법서, 복음서 식으로 성경을 공부합니다. 고급과정은 1년 동안 책별로 성경을 공부하고 마지막 대학원과정에 해당되는 지도자과정은 성경공부를 스스로 하는 방법과 소그룹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방법에 대해 배웁니다. 이런 단계별 성경공부 과정은 다른 어느 교회보다 체계적이고 또 내용도 충실합니다. 이번 학기에도 150명 가까운 많은 성도들이 이 네 단계 과정에서 각자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저는 성경공부를 인도할 때 단순히 성경을 잘 가르치고 풀어주는 것을 넘어서 성도들이 스스로 성경을 읽고 이해하고 은혜 받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인도하는 BLTC 성경공부지도자반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세계 여러 나라 말로 된 성경이 있고 또 우리나라 말로도 여러 가지 번역이 있는데, 성경공부를 잘 하려면 개역개정판뿐 아니라 다른 번역 성경, 즉 새번역성경, 쉬운 성경, 이런 성경도 참조하고, 또 할 수만 있다면 영어나 일본어나 중국어 등 다른 나라 말로 된 성경도 비교하며 볼 수 있다면 참 좋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 그렇게 해보기 바랍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여러 번역을 비교하는 중에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영어성경이 우리말 성경보다 훨씬 먼저 나왔고, 또 우리나라에 온 미국, 캐나다, 호주 선교사들이 다 영어를 썼으니까 우리나라 말로 성경을 번역할 때 자기네가 가져온 영어성경을 참조했을 텐데 어떨 때는 영어로 번역된 것보다 오히려 뒤늦게 우리말로 번역된 것이 훨씬 번역이 잘 된 것을 보게 됩니다. 

영어로는 살리기 힘든 뉘앙스나 느낌을 우리말은 오히려 더 잘 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오늘부터 살펴볼 주제인 ‘경외’입니다. 경외는 성경에서 가장 강조하는 말이고, 가장 많이 나오는 표현 중 하나입니다. 요즘 시중에서 손쉽게 성경 프로그램을 구할 수 있습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에 이 성경 프로그램을 깔고 잘 사용하면 참 도움이 됩니다. 유료도 있지만 무료 중에도 좋은 프로그램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 중 대부분이 이런 기능이 있습니다. 

‘경외’ 하고 쳐보면 성경 전체에서 ‘경외’라는 말이 들어있는 구절이 다 나옵니다. ‘기도’ 하고 낱말을 치면 ‘기도’라는 말이 들어있는 구절이 단번에 좍 나옵니다. 참 편한 세상입니다. 이런 편한 도구를 잘 사용하세요. 혹 이런 프로그램을 사용할 줄 아신다면 오늘 집에 가서 ‘경외’라고 쳐보세요. 적어도 신구약 전체에 170번이 넘는 ‘경외’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정도로 ‘경외’는 성경에 자주 나오는 아주 중요한 낱말입니다.

❚경외란 무엇인가?

그런데 바로 이렇게 중요한 ‘경외’라는 낱말을 앞서 말한 대로 한 번 다른 데서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지 알아봅시다. 한글성경은 어떤 종류든지 다 ‘경외’라고 번역합니다. 경외는 공경할 공(敬), 두려워 할 외(畏), 즉 공경하고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 해당되는 말을 영어성경에서 찾아보면 ‘fear’ 혹은 ‘awe’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두려움, 무서움’라는 뜻입니다. 어떤 대상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말의 히브리말 원뜻을 보면 ‘야레’라는 말로 단순한 두려움이나 공포가 아니라 ‘공경과 두려움’을 동시에 포함한 복합적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말 경외라는 번역이 딱 맞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경외’라는 말이 나온다면 그것은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공경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하나 들지요.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웃어른을 공경하는 것을 참 중시 했습니다. 그래서 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습니다. 

세상이 많이 달라지고 민주화 되었지만 어느 누구도 부모 이름이나 어른 이름을 친구처럼 함부로 부르지 않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우리와 달리 윗사람도 친해지면 이름을 부릅니다. Hi, Tom! Hi, 하준!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도 우리와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찌 감히 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가? 사람도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대신 ‘아도나이’ 즉 주(主)라는 이름으로 대신 불렀던 것입니다.

이게 참 의미가 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아바’(아람어로 아빠라는 뜻, 우리말 아빠와 발음이 참 비슷하지요?)라고 친근하게 부를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우리의 참 좋으신 아빠입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고 나와 가깝게 친근하게 지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하나님과의 친밀감’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관계는 순서가 있습니다. 경외심 다음이 친밀감입니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여 공경하며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은 후에 친밀감도 생기는 것입니다. 이 질서가, 이 순서가 깨지면 안 됩니다. 요즘 아빠들은 참 자상합디다. 저만 해도 그렇게 못했는데 요즘 우리 부교역자들이나 교회의 젊은 아빠들 보면 애들에게도 정말 잘 자상하고 부인에게도 정말 잘 해줍니다. 아빠가 아이도 안고, 기저귀 가방도 들고, 애들하고도 얼마나 잘 놀아줍니까? 때로는 부럽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끔 아주 버릇없는 아이들을 보게 됩니다. 아빠 엄마에게, 또 할아버지 할머니나 주변 어른들에게 아주 버릇없이 굴거나 고집 피우고 제 멋대로만 하려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애들이 다 그런 거 아니냐 하지만 간혹 너무 심한 애들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건 거꾸로 됐다!” 먼저 부모 공경 어른 공경하는 법을 배우고 난 후 친밀감인데 공경이나 경외가 없이 친밀감만 있으니 질서가 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서가 참 중요합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십시오. 부모나 어른도, 특히 하나님과의 관계는 반드시 공경과 경외가 먼저고 그 다음이 친밀감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그토록 경외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몇 주에 걸쳐 이 경외라는 중요한 말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경외에 대해 깊이 들어가 알아보고 깨닫고 실천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기 바랍니다.

❚경외를 가르쳐라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오늘의 본문 신명기 6장에 나오는 경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1절부터 6절에 나온 말씀만 살펴보고 다음 주일에 나머지 7절부터 살펴보도록 하지요.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신명기 6장은 정말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고백입니다. 대표적인 내용이 4절과 5절입니다. 같이 읽읍시다.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 하나님만이 나의 유일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저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얼마나 기막힌 신앙고백입니까? “나는 하나님만 섬기겠습니다. 나는 하나님만 사랑하겠습니다.” 이 세상 어떤 사랑고백이 이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신앙고백을 뭐라고 부르는가 하면 4절 첫 머리에 나온 “이스라엘아 들으라”가 히브리말로 ‘쉐마 이스라엘’입니다. 따라합시다. 바로 이 신명기 6장에 나온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을 ‘쉐마 이스라엘’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쉐마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고백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스라엘 민족의 자녀 교육방법이기도 합니다. 6절부터 9절까지 함께 읽읍시다.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우리가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만 사랑하기로 한다면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일 먼저 내 ‘마음’에 새기고, 그 다음에는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서 집에 앉아있을 떄나 길을 걸어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날 때나 항상 24시간 이 말씀을 강론하고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말씀 구절을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고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도 기록해서 들어올 때나 나갈 때나 항상 말씀을 주변에서 볼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독특한 자녀 교육방법인 ‘쉐마 교육방법’입니다. 학자들이 연구를 해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즉 유대인이 왜 그렇게 똑똑하게 세계적인 석학과 저명인사가 그렇게 많이 나오나? 연구해 보니 바로 이 ‘쉐마 교육방법’ 때문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자녀문제나 특히 자녀교육에 얼마나 관심이 많습니까?(월삭기도회 때 자녀기도가 가장 크지요?) 그런데 자녀교육에 있어 수학공식이나 영어단어 하나 더 외우게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볼 수 있게 하고 항상 들으면서 말씀을 암송하고 배우게 해서 자녀를 교육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자녀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교육하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세상 어떤 학문이나 지식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깨닫게 하면 하나님이 지혜도 주시고 지식도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바로 앞 1~3절에 나옵니다. 다시 한 번 같이 읽습니다.

1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2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3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

신명기는 모세의 고별설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친 후 이제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 설교를 합니다. 자신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마지막 고별설교, 유언 같은 설교를 한 것입니다. 설교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너희가 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거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라. 그러면 복을 받는다. 불순종하면 저주다. 가나안에 들어가거든 제발 하나님께 복 받는 삶을 살아라!” 간곡한 유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신명기 6:1~3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을 당부합니까? “(1절) 지금까지 1~5장에 말한 것처럼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그대로 지켜라. 

특히 (2절) 너와 네 아들 손자 대대손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을 잘 지키도록 가르쳐라. 그래야 네 자녀손들의 날이 장구하게 될 것이다. (3절) 그래야 그들이 복을 받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크게 번성할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이 뭐냐? 바로 ‘경외’입니다. 너 자신 뿐 아니라 아들 손자 대대손손 하나님 경외하는 법만 가르치면 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얼마나 단순합니까? 이렇게 하나님만 경외하면, 그래서 그 말씀만 순종하면 너의 자녀 대대손손 복을 받고 크게 번성한다는 말 아닙니까? 이게 바로 ‘경외의 원리’입니다.

❚경외의 원리

여러분께 다시 한 번 묻습니다. ‘경외’가 뭐라고요? 경(敬), 하나님을 공경하고, 외(畏),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아라.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최고로 알고 가장 높이 받드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최고고 하나님만 제일입니다. ‘하나님 제일주의, 하나님 중심주의, 하나님 우선주의’ 제가 입이 닳도록 강조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 짓지 말고, 하나님께 불순종하지 말고 정직하게 깨끗하게 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복잡할 것 없어요. 우리가 하나님 잘 공경해서 받들고, 하나님 두려워해서 죄 안 짓고 순종하면 하나님이 나에게도 복 주시고, 내 자녀들에게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면 내 자녀 대대손손 복 받고 형통하게 하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이게 바로 ‘경외의 원리’란 말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얼마나 간단합니까? 그리고 얼마나 명확합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하나님 경외하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자녀들에게도 하나님 경외를 제일 먼저 가르치십시오.

천주교는 김수환 추기경을, 불교는 성철이라는 승려를 내세워서 참 덕을 많이 봤습니다. 단 한 사람의 성직자 덕분에 불교와 천주교가 상당히 부흥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한탄합니다. “우리 개신교에는 왜 이런 존경할 만한 목사님이 없나?” 아닙니다. 바로 우리 교단의 한경직 목사님이 그런 분입니다. 한 목사님이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 유학할 때 폐병에 걸렸습니다. 당시만 해도 폐병은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었습니다. 

“하나님, 저를 살려만 주신다면 제 삶을 온전히 바치겠습니다” 기도했습니다. 몸이 회복되자 그는 약속대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삽니다. 한 목사님은 1992년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템플턴상을 아시아인 최초로 수상하는 자리에서 “저는 죄를 많이 지은 죄인입니다. 신사참배도 한 사람입니다.” 고개를 숙이며 자기 죄를 고백했습니다. 템플턴상 수상금 102만 달러(10억이 넘지요)를 받자마자 북한을 위해 써달라며 전액을 내놓으면서 “1분 동안 백만장자가 돼봤다”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목사님이 돌아가시면서 가족들에게 남긴 유언이 이렇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없다. 땅 한 평, 집 한 칸이 없다. 내가 너희들을 위해 남기는 것은 없지만 너희들을 위해 늘 기도하고 있다.” 향년 98세로 작은 방에서 삶을 마감한 한경직 목사님이 남긴 것은 1인용 침대와 안경, 해진 양복 몇 벌, 그리고 낡은 성경책이 전부였습니다.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통장 하나 만든 적이 없고 그의 삶은 사랑과 나눔 그 자체였습니다.

한경직 목사님 생존 시 목회자 몇 분이 찾아가 “우리들에게 도움 되는 말씀 한마디 해 주세요” 했더니 목사님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딱 한 마디 하시더랍니다.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목사님들이 그 말을 듣고 처음에는 너무 초보적인 말씀이라 약간 서운하게 느껴졌는데 가만히 두고두고 생각해보니 참 은혜가 되더랍니다. 

“그래, 예수 잘 믿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겠는가?” 특히 성도들을 잘 목양하고 귀감이 되어야 할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는 예수 잘 믿으라고 설교하면서 정작 자신은 예수 잘못 믿어서 얼마나 많은 문제가 되고 있습니까? 그래서 한경직 목사님의 이 짧은 말 한 마디에 너무나 깊은 뜻이 들어있고 가장 중요한 진리가 들어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장로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집사님 권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성도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잘 믿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 잘 믿고 하나님 경외하는 것보다 더 귀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기본으로 돌아갑시다. 그래서 다른 모든 것 제쳐놓고 예수 잘 믿읍시다. 하나님 경외 잘 합시다. 자녀들에게 이 기본진리를 가르칩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우리는 하늘 아버지에게 무엇이든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분이 가지신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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