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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을 활짝 열고 삽시다 (히 4: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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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활짝 열고 삽시다 (히 4:12-16)

미국 선교사 한 분이 아프리카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식인종에게 붙잡혔습니다. 선교사는 자기는 이제 마지막이라 생각했습니다. 식인종들은 그 선교사를 그들의 추장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추장 앞에 선 선교사가 추장을 자세히 보니 어디서 많이 본 사람 같았습니다. 선교사가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는 자기와 함께 신학교에서 공부했던 아프리카 학생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너무 반가워 추장에게 자기와 함께 미국 신학교에서 공부하지 않았느냐고 하니 알아 보고 반가와하더랍니다. 

선교사는 그 추장이 자기를 분명히 살려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선교사는 추장에게 "당신은 신학을 공부한 후 당신의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추장은 물론 변화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신학을 하기 전에는 사람을 잡아 먹을 때 그냥 먹었는데, 신학을 한 후로는 반드시 식사기도를 하고 먹는다."고 했습니다. 
예수 믿고 변화된 것이 고작 식사기도하게 된 사람들을 풍자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고 식사기도나 하는 정도 변화된 사람은 아니지요? 삶이 다 바뀌셨지요?
예수님을 믿지만 삶은 바뀌지 않아서 고민입니다.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시간 다 점잖고 교양있고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마음은 어떻습니까? 마음도 그렇게 훌륭하고 단정하십니까?
우리는 마음은 거의 신경쓰지 않습니다. 
누가 자신의 마음을 보리라고 상상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 마음이 누군가에게 보인다고 생각한다면 마음도 틀림없이 가꿀 것입니다.
마음을 정리하고 버릴 것을 버리고 나아가 아름답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외모에 왜 신경을 씁니까? 화장품은 왜 그렇게 많으며 대한민국은 성형수술로 유명한 나라이지 않습니까? 아름답고 멋있게 보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나쁠 리 있겠습니까? 그러나 몸은 씻지 않아서 더럽고 냄새가 나는데, 얼굴만 화장을 예쁘게 한 사람 같으니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가 꼭 그와 같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벧전 3:3-4 여러분은 머리를 꾸미며 금붙이를 달거나 옷을 차려 입거나 하여 겉치장을 하지 말고, 썩지 않는 온유하고 정숙한 마음으로 속 사람을 단장하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값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보십니다.

요 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우리 마음은 어떻습니까? 

렘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음이 이렇게 추악한데 얼굴만 꾸미니 문제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이 이렇다는 것을 모릅니다.
우리 중에 누군가 살인한 사람이나 간음한 사람이나 도둑질한 사람, 파렴치범, 성추행범이 있음을 안다면 그 사람을 대하는 것 조차 꺼려 할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마 5:27-28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죽이고 싶은 생각, 음욕, 탐심, 거짓을 품으면 실제로 그런 죄를 지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우리는 어떤 자로 보일까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다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히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하나님 앞에는 아무 피조물도 숨겨진 것이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 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롬 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

집에 누가 와서 함께 사는 것을 불편해 하고 싫으시지요?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것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하였으니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셨습니까? 
영성일기를 써보면 예수님을 항상 생각하고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잘 안된다고 합니다.
솔직히 싫은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롬 1:28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성경은 구체적인 예를 열거하십니다.

롬 1:29-31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이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마음이 이처럼 더럽고 추하지만 이것을 죄라고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완전히 속고 있는 것입니다. 

요일 1: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마음의 생각이 왜 그렇게 큰 죄입니까? 이해가 안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마음은 어떤 곳인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마음은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사는 집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마치 결혼에 비유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마귀가 주는 마음을 품었다고 합시다. 괜찮은 것입니까?
결혼한 남자가 집에 아내 말고 다른 여자를 끌어 들여 산다면, 결혼한 여자가 집에 다른 남자를 들인다면 괜찮은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마음 상태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실행에 옮기지 않고 생각으로만 지은 죄도 다 유죄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하고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면 남의 말 할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너무 많이 알면서도 한 가지 모르는 것 있어요. 자기가 지옥에 갈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하여는 많이 압니다. 누구 누구 문제라는 것은 잘 압니다. 그러나 자기가 죄인인 것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까? 우리가 다 지옥에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감각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큰 은혜에도 감각이 없습니다. 지옥에 갈 자라는 의식이 없으니 십자가의 속죄에도 무감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중요함을 깨달은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사탄 앞에서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자랑하셨습니다. 무엇을 보고 그렇게 판단하셨습니까? 

욥 1:5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은 마음이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임을 안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시 73: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행 13:22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마음이 어떤지 아는 자는 예수님을 굳게 붙잡게 됩니다.
14절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늘에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고백을 굳게 지킵시다. 

‘굳게 지키라' 는 말은 누군가 소중한 것을 빼앗아간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우리가 붙잡은 예수님을 떼어 놓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마귀입니다.
마귀는 핍박도 주고 유혹도 하고 좌절도 주고 나태함도 주어서 예수님의 손을 놓게 만듭니다. 핍박당하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님을 결코 놓치지 말라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순교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옥에 갈 거냐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화해자입니다. 
예수님은 온전한 하나님이시고 또한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때문에 그분은 완전한 대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우리 마음이 아무리 더러워도 품어주신다는 것입니다.

15절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기에 우리가 겪는 모든 연약함과 고통을 맛보셨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시험도 당해 보셨습니다. 가난 때문에 고통도 당해 보셨습니다. 출신이 천하다고 멸시도 당해 보셨습니다. 슬픔을 가슴에 안고 애통하여 울어도 보셨습니다. 
죽음의 공포로 밤새도록 씨름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는 시험을 다 겪어 보셨습니다.
18절 “...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
그래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동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라는 생각이 자주 드는 분이 있습니까? 그 생각은 마귀가 주는 거짓말입니다. 
여러분은 잘 아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가게 됩니다. 
16절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할렐루야! 은혜의 보좌라고 했습니다. 심판의 보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들도 1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부들부들 떨고 들어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이 심판의 보좌가 아니라 은혜의 보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이 아버지 앞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바뀐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누릴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우리가 회개하고 마음이 정결함을 받았으면 항상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말할 수 없이 더러운 가운데 용서해주시고 깨끗하게 해 주신 것은 그 상태에 결코 머물러 있지 말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반복하여 짓고 삽니다. 용서받고 또 나가서 옛날대로 살고 또 예수님께 와서 용서받고 또 나가서 죄를 짓고 삽니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벧후 2:20-22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그러면 왜 반복하여 죄를 짓고 사는 것입니까?
마음을 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을 열고 사는 것을 이상하다, 어렵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미 하나님이 보시는 눈 앞에 환히 다 드러나 있습니다.

13절 하나님 앞에는 아무 피조물도 숨겨진 것이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 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마음을 열고 살아야 삶이 변합니다. 마음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억누르는 생활이 아니라 나타내는 생활입니다. 
인간의 승리는 억누르는 것이다. 속으로 찡그리고 겉으로 웃는다. 성질이 나오는 것을 힘써 누른다. 죄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속으로 감춘다. 이렇게 함으로 예수 믿는 것이 힘들고 참 기쁨을 모르고, 육신의 병도 생깁니다.

유교의 공자는 修身을 가르쳤다. 이것은 계속 함양하고 억제하는 것으로서 이것이 성공해야 성인이 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이런 유교식으로 사는 성도가 많습니다. 그는 매사에 조심하고 숨기고 감추고 삽니다. 율법적인 신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의 삶은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나타내는 생활임을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예수의 제자는 드러내고 또 드러냅니다. 조금도 억누르지 않고도 문제가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 마음이 예수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은 (1)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이고 (2) 우리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제부터는 마음을 열고 사십시오. 영성일기를 쓰고 나누어 보십시오.

한 사모님은 교우들과 함께 일기를 나누라는 것에 권면에 순종하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람 제자훈련 교재에서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을 감추고 살지 말고, 완전히 드러내고 살라는 구절이 생각이 납니다. 가르치면서도 그 구절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나는 죽었다고 고백하지만 여전히 죄된 육신을 가지고 있으니 인간 냄새 풀풀나는 자신을 드러내면 예수님보다는 자아가 드러나게 되지 않을까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모님들과 함께 영성일기를 나누면서 용기를 갖게 되었답니다.
“일기를 공개하는 것이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지만, 함께 일기쓰는 사모님들이 득달같이 댓글을 달아주며, 막내라고 얼마나 예뻐해주시고, 정직하다고 칭찬해 주시니, 저도 이렇게 해도 되는구나 받아들여지는 마음이 들어 용기내서 더욱 솔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모님도 교우들과 영성일기 나눔방을 열었답니다.
그러면서 사모님에게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앞장서는 자리에 있으니, 얼마나 부담이 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부담감이 저를 제대로 주님을 바라보게하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그렇게 큐티하고, 말씀보려고 애를 써도 안되더니, 영성일기반을 시작하고부터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늦더라도 하게 되니 책임이 무섭긴 무서운가 봅니다.“
영성일기 나눔방을 이끌어가면서 사모님에게 더 놀라운 변화가 생겼습니다.
“성도들과 함께 일기를 통하여 아픈 마음을 나누다 보니 기도 중에 계속 생각나고, 말씀봐도 생각나니, 깊이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성도들과 일기를 나누려고 했을 때 왜 그렇게 두렵고 마음이 힘들어했던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저녁 집회에서 영성일기를 함께 나누는 교인들이 얼마나 반갑던지요, 그렇게 반갑네요, 정말 진~한 애정의 눈길을 보내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한 자매가 제 페북에 댓글을 달아 올렸습니다.“영성일기 바쁜 직장인에겐 매일 쓴다는 것이 너무 힘들어요!”그런데 저는 일기 안 쓰기 너무 힘들어요! 
마준철 목사님 표현대로 양치질 안하고 지내기 쉬워요, 힘들어요? 양치질 처음 배울 때 쉬웠어요, 힘들었어요? 생각도 나지 않지만 힘들었을 거예요! 마음을 열고 사는 생활이 익숙하냐 아니냐 차이입니다.

여러분, 주님 앞에 설 때 우리 마음이 다 드러납니다. 그것이 우리의 진실한 모습입니다. 평생 마음을 감추고 산 사람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께만 아닙니다. 우리 서로에게도 끔찍한 일입니다. 누구를 쳐다 볼 수 있겠습니까?
부부 사이에 마음을 열고 사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까? 
부모 자녀간 마음을 열고 사십니까? 속회 가족들에게 마음은 여셨습니까? 

지금부터 주님 앞에 설 때 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어야 주님이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핍박이 와도 죽음이 눈 앞에 와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유기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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