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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변화를 꿈꾸라 (룻 1:8-14)

첨부 1


변화를 꿈꾸라 (룻 1:8-14)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6)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7)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8)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9)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10)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11)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12)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13)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14)
<룻기 1장 6~14절>

할렐루야!
오늘은 <세계성찬주일>입니다.
세계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성찬식을 행합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흉년이 드니라

오늘 본문 룻기는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룻 1:1) 로 시작됩니다. 
본문에 여러 사람이 나오지만
룻기는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중심인물입니다.

그들은 유다 베들레헴 사람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이란 말의 뜻은 ‘빵집, 떡집’이고, 
그 이름은 풍요로움을 나타냈습니다. 
그런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그 위기를 모면하고자 모압 지방으로 이주를 했습니다. 

여러분, 이사 갈 때 신앙생활 잘 할 수 있는 지,
교회에 잘 갈 수 있는지, 신앙적인 일에 상처가 되는 것은 아닌지, 
흔들림이 되는 기회가 되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 가야 합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집값이 오를 것 같아서, 
혹은 환경이 좋아서, 풍요로울 것 같아서 이사가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이들은 그냥 살기 위해 
부족함을 피해 풍족함을 찾아 모압으로 나선 것입니다. 

모압은 사해 남동쪽에 있는 지역으로 (지도참조)
지리적으로는 베들레헴과 그리 멀지 않았지만
우호적인 곳이 아니었습니다.
모압 족속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아들 모압의 후손들입니다.

모압 지방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벗어난 
이방지역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풍성함을 따라 
그곳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이방인의 삶에 동화되어 갔고,
두 아들은 모압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들은 흉년을 피하기 위해 그곳에서 살았지만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두 아들마저 죽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 홀로된 여인은
고아와 나그네와 함께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계층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홀로된 여인을 보호하고 돌봐주라는 
규례가 있었습니다. (레22:13; 신14:28-29; 16:10-11,14; 24:17-22)
그러나 그런 규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홀로된 여인들은 부당한 착취와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선지자들은 그런 여인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신랄한 비판을 하곤 했습니다. 
(사 1:17, 23; 겔 22:7,10) <아가페성경사전, 참조>

홀로 남게 된 나오미가 바로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나오미의 가정에 닥친 연속적 재앙은
약속의 땅을 떠난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오미 스스로도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다’(13절) 고 하며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목회와 신학 편집부, 『사사기 ․ 룻기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두란노, 2009, pp.490-491. 참조>

흉년이라는 위기를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나오미는 흉년보다 더 힘든 절망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흉년 같은 위기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위기는 언제나 변화를 가져옵니다. 
위기를 만나게 되면 그 위기에 대처해 변해야 삽니다. 
그래서 위기를 ‘위험한 기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걸림돌이 되었던 위기의 순간을 지혜롭게 헤쳐 나가면
위기를 오히려 발전과 성장의 디딤돌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세계적인 기업이라 하더라도
위기에 적절하게 변화하지 못하면 무너지고 맙니다. 

‘코닥(kodak)’은 필름 회사의 대표적인 기업으로 
필름 시장을 이끌었습니다.
회사가 생긴 지 131년이 된 코닥은 
1980년대에는 종업원 16만 명을 거느리고, 
세계필름 시장의 2/3를 지배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코닥이 올해 1월 파산보호신청을 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디지털 시대를 대비하지 못하여 치명타를 맞은 것입니다. 

요즘, 휴대용 디지털 카메라가 얼마나 잘 찍힙니까?
요즘엔 휴대전화로도 훌륭한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필름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카메라 기술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었기 때문에 
필름을 사용하지 않아도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언제 어디서나 전송도 가능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1975년 디지털 카메라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기업이 바로 코닥이었습니다. 

코닥은 아날로그 카메라에 이어 
디지털 카메라 시대도 이끌 수 있는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세계 시장의 2/3를 장악한 필름사업에만 안주했던 것입니다. 
결국, 한 때 100달러에 육박했던 코닥의 주가는 
1달러 아래로 추락하게 되었고,
결국 파산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동아일보> 2012.01.21. & <한겨레> 2012.01.09. 기사 참조」

세계를 주름잡던 핀란드의 휴대전화 회사 ‘노키아’도 이와 비슷합니다.
노키아는 1990년대부터 세계 휴대전화 시장의 1인자였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변해 사람들은 
일반전화가 아닌 스마트폰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휴대전화로 인터넷을 하고, 사진도 보내는 등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러나 노키아는 일반전화에만 집중하여 
새롭게 변화된 스마트폰 시장에 뛰어들지 않았습니다.
결국 회사의 가치가 10년 전의 10분 1 수준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코닥처럼 노키아도 
세계 최초로 스마트폰 제조기술을 가진 기업이었습니다. 
스마트폰을 개발하지 않아도 1등을 계속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시대의 변화를 따르지 않았던 것이 몰락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런 예는 코닥이나 노키아의 경우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지무지하게 많습니다. 
우리나라 기업의 평균수명은 27년이고, 
전 세계 기업의 평균수명은 13년이라고 합니다. 
쫓고 쫓기는 치열한 경쟁으로 
100년 장수기업을 찾아보기 힘든 세상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로 
훌륭한 제품을 만들고 있는 일류기업이라도
눈앞에 있는 작은 위기에 대처하지 못하고 
제대로 변화하지 못하면 문을 닫아야만 하는 세상입니다. 

신앙 생활하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생활하다보면 흉년과 같은 위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세상은 자꾸 변화되는데도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면
가정에서 … 직장에서 … 학업에서 … 그 밖의 사회에서 … 
삶의 기반을 흔드는 어려움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위기가 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위기가 찾아왔을 때
불평하거나 투정부린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면, 위기를 만나면
사람의 방법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적인 지혜로 해결하려 하다보면 
나오미와 같은 절망으로 빠져들기 쉽습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하나님이 살라고 명하신 가나안 땅을 벗어나
이방지역인 모압으로 먹을 것을 찾아 간 것은
풍요롭기는 하나 하나님의 뜻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은총의 날개 아래 있어야 합니다.
그곳을 벗어나면 영과 육이 죽습니다. 

삶의 위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을 느끼게 하거나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경험케 하기 위해
하나님은 때때로 위기 즉, ‘위험한 기회’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럴 때 우리가 잘 대처해 나간다면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입맞춤 vs 좇아감

나오미는 기근을 피해 잠깐 동안만 거기서 살 생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 10년을 살았습니다. 
아마 고향땅의 기근이 계속된 것처럼 보입니다.(6절)
아는 사람도 없는 타지에서 
10년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강화섬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나 자라기만 했지 오래 살지 않았습니다.
섬에서 벗어나 더 오래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강화사람입니다.
강화에 가면 고향사람 왔다고 좋아합니다.
신기한 것은 강화에 가서 30년, 50년을 살고 있어도
강화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면 객지 사람입니다.
이것이 고향입니다.

나오미도 마찬가지입니다.
타향살이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남편과 아들들이 다 죽고 난 후 
두 며느리와 과부로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거기서 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남자도 없이 새로운 곳에 가서 정착한다는 것은
더 두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나오미가 희망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고향에 풍년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며느리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룻기 1장에는 ‘돌아가다’는 히브리어 동사가 많이 쓰였는데,
이는 ‘회개하다’의 의미로도 사용되는 말입니다.
즉, 나오미는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돌이켜 
지난 10년간의 삶을 정리하고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길 원했던 것입니다. 
절망의 상황에서 벗어나 
구원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려는 변화를 꿈꿨습니다.

삶의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 것은 
나오미의 두 며느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이제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8절)고 했습니다. 
나오미가 과부였기 때문에 똑같은 삶을 살아야 할 
며느리들의 마음을 잘 이해했을 것입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한다”고 축복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며느리는 소리 높여 울면서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가겠다’(9절)고 했습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다시 한 번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두 며느리는 다시 한 번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결국 오르바는 입을 맞췄고, 
입을 맞췄다는 것은 작별인사를 나눴다는 뜻입니다. 
룻은 어머니를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나오미는 입을 맞추지 않은 룻에게 
다시 한 번 돌아가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룻은 확고했습니다.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룻 1:16-17)

나오미가 대단한 부자이거나 엄청난 능력을 소유해서가 아닙니다. 
룻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런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어머니 나오미의 삶에 역사하심을 보고
그것을 새로운 삶의 지표로 삼은 것입니다. 

오르바는 자신의 민족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룻은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변화를 꿈꾸며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랐습니다.
오르바는 이방가운데 사라진 반면에
룻은 믿음으로 메시아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오르바는 익숙한 곳으로 갔지만 … 룻은 변화를 선택했습니다.
그 변화의 선택은 홀로 사는 여인의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변화를 꿈꿔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화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압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변화해야 한다 …
-변화가 없으면 발전이 없다 …
-변화만이 살 길이다 …
그러나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정작 사람들은 변화보다는 안정을 선호합니다. 

교회에서 어떤 사람들이 변화를 싫어합니까?
솔직히 목사들이 변화를 싫어합니다.
교회 다닌 지 오래된 분들, 직분이 있는 분들이 변화를 싫어합니다.
달라지는 것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변화해야 합니다. 변화를 꿈꿔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새로운 삶으로 도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2013년 목회주제를 ‘도전과 변화’로 정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삶의 비전과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이뤄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도록 권할 것입니다. 
내년 1월 1일부터 ‘도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많은 것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시설도 고치고, 각종 조직도 개편하려고 합니다. 
부흥회를 기점으로 선교회도 바꾸고, 속회도 바꾸고, 
부서도 바꾸고, 책임지고 일하던 이들도 
대부분 새롭게 하여 변화를 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언제나 투덜대는 이들이 생깁니다.
그들은 변화를/도전을 막아섭니다,
선교회를 개편하고, 속회를 바꾼다고 하면 
투덜대는 이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속회 바꾸면, 선교회 바꾸면 교회 안나오겠다’고
말하는 이들이 꼭 있습니다.그런 이들이 변화와 도전의 방해꾼들입니다.
이제 그런 사람은 자신을 바꾸어야 합니다.
아니면 그런 사람은 바꿀 대상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말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는 
1962년 라이스대학 연설에서
‘10년 이내에 인간이 달 위를 걷게 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그 연설이 끝나고 
수많은 과학자들이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과학자들은 자신의 모든 지식과 연구결과를 총동원해서
‘유인 우주선이 달 위에 착륙할 수 없는 이유’를 
정리해서 제출했습니다.

그 후 케네디는 더 이상 그들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가능하다’고 말한 과학자들만 만났습니다.
마침내 1969년 8월 ‘닐 암스트롱(Neil Amstrong)’은
달 위를 걸었습니다. 
케네디가 계속해서 ‘불가능한 이유’만 이야기하는 
과학자들과 만났더라면 비전을 실현시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과 만나 
어떤 일을 하느냐는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큰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요즘 자주 만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어떤 사람과 가까이 지내십니까?
부정적인 말과 태도로 주위 사람을 주눅 들게 하거나 
무능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만나지 마세요.
<강헌구 지음, 「가슴 뛰는 삶」, 
서울: 쌤앤파커스., 2008. pp.149~150. 인용>

저는 부정적인 말을 내세우는 사람을 만나지 않습니다. 
만나서 도움이 될 것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더 많이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전도와 선교 사역도 더 확대하고,
더 많은 분들과 더 많은 교회를 품으려고 합니다. 
그 일을 위해 도전과 변화에 
여러분 모두가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3년이 되려면 아직 멀었지만
저는 지금부터 새롭게 변화될 기둥교회를 꿈꾸고 있습니다.
준비하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선정합니다.
변화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 제게 일 맡겨 주셨습니다.

그것만 생각하면 심장이 뛰고 힘이 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저 혼자만의 생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함께 비전과 목표를 공유해야 합니다. 
함께 발걸음을 옮겨갈 동행자가 필요합니다.

저는 차츰 차츰 변화에 관한 설교를 통해서
그 보따리들을 풀어낼 생각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과 십자가만 빼고 다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구원의 진리와 관련된 복음의 본질은 결코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외의 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모두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앞에 있는 위기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나이 늙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보여주실 땅으로 향하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창12:1)
위기입니다. 인간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아야 할 나이에
모험으로 새 땅을 향해 가라고 하니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모세는 태어나자마자 죽을 위기에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신 것도 
바로 왕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생명의 위협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눈을 보지 못하는 위기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또한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 자가
오히려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하는 자로 변하자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신앙생활에는 언제나 위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위기를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이시며
그것을 통해 새로운 변화를 이끄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가정에, 일터에, 학업에서 …
어떤 위기에 처해 있으십니까? 
어떤 어려움이 있으십니까?
그러나 그 어려움이나 위기도 감사하며
변화될 것을 꿈꾸시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새 길로 도전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함께 변화될 것을 꿈꾸며 
도전을 다짐하고 여러분의 몸도, 마음도, 영적인 자세도
새롭게 새롭게 다짐하며 사는 
복된 삶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수 믿게 하시고 구원 받은 사람으로 살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 안에 사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변화를 위하여 
도전을 주저하지 않는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변화를 꿈꾸고 도전을 각오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거룩한 주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들었습니다.
이 말씀을 가슴속 깊이 새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떤 변화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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