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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록하고 낭독하게 하신 이유 (렘 3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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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하고 낭독하게 하신 이유 (렘 36:1-8)       

유다 왕국이 기울어갈 무렵,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한 번도 선지자가 되고 싶어 한 적도 없고, 자원한 적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를 택하셨습니다. 예레미야 1장 5절을 보면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선지자로 선택받은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로 인해 예레미야는 선지자로 살면서 많은 고난을 당했고,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또 예레미야만 부름 받은 게 아닙니다. <바룩>이란 사람 역시 부름을 받았는데, 그는 예레미야의 비서 겸 서기였습니다. 그들은 함께 고난을 받았습니다. 

여기는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원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부르셔서 힘든 인생을 살게 하신 것일까요? 

그 대답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서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혹은 <여호와께로부터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는 식의 표현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말씀을 주셔서 왕들과 백성들에게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서기였던 바룩은 4절에서 보는 대로 예레미야가 받은 말씀을 글로 기록하기도 하고, 5-6절에서 보는 것처럼 예레미야를 대신하여 기록한 말씀을 사람들에게 낭독해주기도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다음 질문을 하게 됩니다. 도대체 말씀이 무엇이기에 예레미야와 바룩을 세워 백성들에게 전하게 하셨을까요? 말씀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집착하신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여러분, 말씀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강조하는 것일까요? 왜 예배 시간의 절반 이상을 말씀을 나누는 설교에 할애하는 것일까요? 왜 말씀을 읽고 말씀대로 살자고 하는 것일까요? 저는 이 시간 우리들이 말씀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가지게 되길 원합니다. 

우선 말씀을 강조하는 이유는 <말씀은 세상 모든 것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말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고, 말씀하시자마자 빛이 만들어졌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이하를 보면 이렇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아멘. 결국 말씀으로 모든 것을 지으셨으니, 말씀은 모든 생명의 근원인 셈입니다. 

또 말씀은 <믿음의 출발점이요, 근거>입니다. 믿음은 어디서 생겨날까요?  유명한 복음전도자 무디 선생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하나님께 믿음을 달라고 정말 많이 기도했다. 내가 믿음을 가지기 위해 기도한 시간을 합치면 몇 달은 족히 될 것이다. 나는 믿음이란 어느 날 번갯불과 같이 나를 갑자기 사로잡아 달아오르게 할 어떤 것인 줄 생각했다. 그러나 수없이 기도해도 믿음이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로마서 10장을 읽다가 놀라운 말씀을 발견했다. “그런즉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 즉시 난 성경책을 부둥켜안았고, 성경을 펴서 말씀을 읽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말씀을 읽는 동안 내 안에 믿음이 생겨나 자라기 시작했다. 내 믿음은 말씀에서 시작되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신앙을 얻게 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말씀이 선포되고, 거기 성령이 역사하실 때 우리 안에 믿음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콩나물시루에 물을 부으면 물이 다 흘러나가도 콩나물이 자라는 것처럼,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그 말씀이 다 사라지는 것처럼 보여도 믿음은 우리 안에서 자라나게 되어 있습니다. 

또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근거가 됩니다. 

탈북자인 <이순옥> 여사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 호주를 비롯한 곳곳에서 북한의 참상을 증언했습니다. 그 분은 북한의 감옥과 교화소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던 분입니다. 그 증언이 책으로 엮어져 나왔는데, 그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교화소 안에는 용광로 시설이 있는 작업장이 있는데, 그 곳에서는 무기 생산에 필요한 것들을 만든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 곳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도하게 됩니다. 옷도 거의 입지 않고 고무로 된 치마만 걸친 수백 명의 사람들을 보게 되었는데, 멀리서 보니 그들은 머리가 둘 달린 괴물 같이 보였다고 합니다. 나중에 가까이 가 보니 고문을 당해 머리에 혹이 하나씩 달려 있었고, 척추가 내려앉아 꼽추처럼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혹독한 형벌을 당했으면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그곳의 간수들은 그들을 <하늘을 믿는 미친놈들>이라고 욕을 했다고 합니다. 

하늘을 믿는 이 사람들은 누굴까요? 다름 아닌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간수들은 징을 박아 만든 구두로 그들을 밟고 짓이기곤 했다고 합니다. 피투성이가 되고 뼈가 부러져나갔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와중에서도 그들은 <주여, 주여>하면서 찬송을 부르고 있었고, 그 얼굴에는 고통이 보이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얻어맞다가 죽으면 시뻘건 쇳물을 갖다 부어 숯처럼 만들었는데, 공장 안에 살타는 냄새가 진동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들은 왜 그런 고생을 하고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나요? 천국에 가 봤습니까? 그들로 하여금 끝까지 버티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비록 천국에 가 보지 않았지만 성경책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천국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눈으로 보지 않았지만, 성경책에 기록되어 있기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신앙과 삶의 근거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 와서 예배드리는 것, 힘들게 번 돈을 드려 선교와 봉사를 위해 사용하는 것, 시간 드려 봉사하는 것, 손해를 보고도 바보 같이 참는 것, 농어촌 교회에서 가난한 목회자로 평생을 섬기는 것, 조건이 좋은 사람보다 믿음의 사람을 배우자로 맞이하고자 기도하는 이유, 남들 다 하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이유......여러분, 이에 대한 대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우리 믿음의 근거는 사라질 것입니다. 

자, 이처럼 말씀은 창조의 능력이요, 신앙을 주는 힘이요, 기독교인들의 삶의 근거이기에 말씀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세워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는 이유도 당시의 유다 백성들을 신앙으로 인도하고, 바른 삶을 살게 하여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이 다스리던 주전 627년부터 선지자로 섬겼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주전 605년의 일로서 그가 선지자가 된 지 23년째 되던 해입니다. 당시 근동의 국제정치 상황은 매우 급격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해 바벨론은 갈그미스에서 애굽을 격파하여 완전한 패자로 등장했습니다. 애굽과 바벨론이 서로 견제하고 있을 때는 작은 나라들은 두 나라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면서 그런대로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이 천하를 장악하게 되면서 주변 국가들은 바벨론에게 먹힐 위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격동기에 유다 백성을 붙들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격동의 시대에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부르짖어 기도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받길 원하셨습니다. 

3절을 보면 말씀을 기록하여 선포하게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가지신 기대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3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유다 가문이 내가 그들에게 내리려 한 모든 재난을 듣고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리니 그리하면 내가 그 악과 죄를 용서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이 말씀을 듣고 악한 길에서 돌이켜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고 축복을 얻길 기대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예레미야와 바룩을 세워서 말씀을 위해 섬기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당시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와 바룩을 통해 두루마리에 기록된 말씀을 주셨다면, 오늘 우리에게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배 때마다 세우신 하나님의 종들을 통하여 말씀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십니까? 유다 백성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얻길 원하신 것처럼, 우리가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와 구원과 축복을 얻길 원하십니다. 오늘 이 시간 이 부족한 목사로 하여금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이유도 똑같습니다. 땅끝교회 성도 여러분, 예배 때마다 듣는 말씀, 날마다 읽으시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얻으시길 기원합니다. 말씀을 믿고 구원을 받으십시오. 말씀에 약속된 복을 얻으시길 기원합니다. 

이제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로 귀결됩니다. 즉 우리는 말씀을 마음을 열어 받고 있는가, 아니면 거부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다 백성들은 어떠하였습니까? 

말씀에 대한 유다 백성의 태도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회개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말씀 앞에서 이런 태도를 보인 사람은 요시야 왕과 그 당시의 백성들이었습니다. 

요시야 왕은 오랫동안 손보지 않고 방치되었던 성전을 수리하게 했습니다. 성전을 수리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발견하여 가져왔습니다. 그 때까지 성전 먼지구덩이에 방치되었던 말씀 두루마리를 발견한 것입니다. 서기관 사반이 요시야 왕과 신하들 앞에서 말씀을 낭독했습니다. 요시야 왕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열왕기하 22장 10절 이하를 보면 <또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사반이 왕의 앞에서 읽으매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의 옷을 찢으니라>라고 했습니다. 요시야 왕은 자신의 왕복을 찢으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열왕기하 22장 18절 이하를 보면 이렇습니다. <너희를 보내 여호와께 묻게 한 유다 왕에게는 너희가 이렇게 말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들은 말들에 대하여는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대하여 빈 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 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보라 내가 너로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 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 눈이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사자들이 왕에게 보고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요시야 왕에게는 바벨론에 나라가 멸망하는 재앙을 보지 않게 하셨습니다.  말씀을 두려움으로 받는 사람에게 주신 위로요,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아래를 보면 여호야김 왕의 반응이 나옵니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했으나,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불에 태웠습니다. 

<여후디가 서너 쪽을 낭독하면 왕이 면도칼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두루마리를 모두 태웠더라  왕과 그의 신하들이 이 모든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자기들의 옷을 찢지 아니하였고  엘라단과 들라야와 그마랴가 왕께 두루마리를 불사르지 말도록 아뢰어도 왕이 듣지 아니하였으며  왕이 왕의 아들 여라므엘과 아스리엘의 아들 스라야와 압디엘의 아들 셀레먀에게 명령하여 서기관 바룩과 선지자 예레미야를 잡으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그들을 숨기셨더라>  

그 결과가 무엇일까요? 결국 유다 왕국은 바벨론에게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말씀에 대해 어떤 응답을 하시는지요?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말씀을 받으십시오. 아멘으로 받으십시오. 말씀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말씀 안에 생명과 축복과 평안과 승리가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말씀을 떠나면 성공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실패할 것입니다.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시길 바랍니다. 

언젠가 부동산 투자에 관한 글이 신문에 실렸는데, 그 제목이 <망하는 길 열 가지>였습니다. 망하는 길 첫째가 <전문가나 컨설팅업체의 말을 100% 믿는다.>입니다. 거기에 이런 사례가 실려 있었습니다. 

<부동산 투자에 대해 강의하는 유명 대학 K교수, 그의 강의는 늘 인기가 있다. 많은 사람을 몰고 다닌다.  그런 그가 한 강연장에서 그 잘하던 강의를 중간에 망친 적이 있다. 왜냐하면 자신이 세를 들어 살고 있는 집 주인이 청중 속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여러분, 그 교수는 강의는 잘 했지만 정작 자신은 파산하여 있던 집도 날리고,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집 주인이 강의를 들으면서 얼마나 웃었겠습니까? 

승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평생 말씀에 매달려 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모든 업적과 말과 사상이 근거할 수 있는 유일한 기반이며, 반석이다.>  <나는 말씀 없이는 낙원에서도 살 수 없으나, 말씀이 있는 곳이라면 지옥에서도 용이하게 살 수 있다.>  

여러분, <거북이 교인,Turtle Christian>이란 말을 아십니까? 새는 9일간 먹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은 12일간, 개는 20일간 견딜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북이는 500일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거북이 교인이란 오래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고도 용케 죽지 않고 교회에 드나드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 우리 모두 이토록 중요한 말씀을 날마다 먹길 원합니다. 

작고하신 하용조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위대한 사람 옆에 서 있다고 해서 저절로 위대해지지 않습니다. 배부른 사람 옆에 있다고 해서  배불러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십시오. 말씀을 따르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교회나 목사를 따라 다니지 마십시오. 사람을 따르다 보면 꼭 얻는 것이 있습니다. 실망과 상처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좇으십시오.> 

인생의 난국을 만날 때나 평안할 때, 어떤 순간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누가복음 10장 4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입니다. 그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고, 우리를 세워줄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각자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 지키시길 바랍니다. 두 기독교인이 같은 좌석에 앉아 기차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한 사람이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옆 사람은 배고픈 눈초리로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혹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아시나요?> 그러자 샌드위치를 먹던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거참 좋은 말씀입니다. 나는 또 다른 성경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말씀이지요.> 

사람들은 각자 편리한대로, 유리한대로 말씀을 적용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모든 말씀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이 가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영혼이 살찌게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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