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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후에야 들으신 기도 (삼하 21:12-14, 요 2: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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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야 들으신 기도 (삼하 21:12-14, 요 2:19-22)

비행기 안에서 어떤 젊은이가 노트북을 꺼내놓고 계속 웃고 있습니다. 헤드폰을 끼고 웃고 있는 것을 보니 재미있는 영화를 보는 모양입니다. 그 젊은이는 연방 혼자서 ‘큭큭’ 웃고 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보여주는 기내영화보다 자기 노트북 영화가 더 재미있는 듯합니다. 이 젊은이는 영화에 몰두한 나머지 비행기의 안내방송을 다 놓칩니다. 자신에게 도취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소리가 더 크면 더 중요한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자신의 소리가 지나치게 크면 결정적인 순간을 놓칠 수가 있습니다. 
  
자기의 소리에 도취되어 하늘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외치는 어떤 소리도 듣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소리만 듣고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세상의 소리만 듣고 하늘의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기도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기도이고, 내가 들을 때에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키엘케골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기도는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점점 더 조용하게 되어서 결국 기도는 듣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기도는 듣는 것인데 많은 사람은 듣지는 않고 말을 하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좋은 기도를 드리지 못합니다. 응답받는 기도가 되지 못합니다. 착한 기도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의 비유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기도는 자랑이나 보고가 아닙니다. 자기가 다 결정해놓고 하나님께 허락해 달라고 졸라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단순하게 하나님의 뜻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수학이 아니기 때문에 횟수가 기도의 힘이 아닙니다. 기도는 수사학이 아니므로 웅변이 기도의 힘이 아닙니다. 기도는 기하학이 아니므로 길고 짧은 것이 기도의 힘이 아닙니다. 기도는 음악이 아니므로 음성의 아름다움이 기도의 힘이 아닙니다. 기도는 논리학이 아니므로 논리 정연한 그 방법이 기도의 힘이 아닙니다. 심지어 신학까지도 기도의 힘은 되지 못합니다. 마음의 열심, 강청하는 열정이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의 요소입니다. 
  
누가복음에는 ‘과부와 재판장 비유’가 있습니다. 과부는 재판장에게 와서 무슨 그리 큰 원한이 맺혔는지 “내 원한을 풀어주소서”라고 애원합니다. 재판장은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지 않으면 계속 자기를 괴롭힐 것이라고 하여 “내가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나를 괴롭게 하리라”고 합니다. 재판장은 과부가 예뻐서가 아니라 강청하기 때문에 소원을 들어주고 원한을 풀어주었습니다. 하나님도 이런 강청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비유이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산상보훈에도 기도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는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이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주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떡 대신 돌을 구하고, 생선대신 뱀을 달라고 합니다. 이런 요구를 절대로 하나님은 들으시고 주실 리가 없습니다. 이런 요구는 성취 안 되는 것이 응답입니다. 
  
하나님이 들으시지 않는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4:2-3에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울과 다윗의 악연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전쟁에 승리한 때문입니다. 나라를 위하여 좋은 일이었지만 백성들이 다윗을 지지하자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이런 사울에 대하여 원수를 갚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을 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역대상 10장에는 사울이 죽은 것은 하나님이 직접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폐위시키시고 죽이신 것입니다. 그 후에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시신을 가족묘에 이장해 주었습니다. 다윗이 이 일을 한 후에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첫째, 인간의 진정한 화해 후에 기도를 들으십니다. 

사무엘하 21:12에는 “다윗이 가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서 가져가니”라고 합니다. 14절에는 “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라고 합니다. 사울과 아들 요나단의 유해를 가족묘에 합장해 주었다는 것은 진정한 화해의 표시입니다. 요즘에 사과를 하든, 용서를 빌든 진정성 얘기를 많이 합니다. 아무리 사과해도 진정서이 없어 보이면 사과 자체가 시비가 됩니다. 다윗의 행동에는 진정성이 보입니다.  
  
사울과 요나단의 뼈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 의해 야베스 땅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 지냈습니다. 다윗은 이런 이들의 뼈를 가족묘에 이장하여 장사지내 주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집안에 악의가 없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이런 이장을 결단하였던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감정이 있어 끊임없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에 대하여 감정이 없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고 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31:10에는 “그의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으매”라고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과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거리에 못 박아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고 사울의 가문에 수치를 주었습니다. 벧산 거리에 있던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몰래 가지고 온 것입니다. 야베스 사람들이 가지고 온 시체를 이제 다윗이 기스의 묘에 이장하였습니다. 
  
가문의 악연이란 옛날 서부영화나 홍콩 무술영화의 단골 주제입니다. 악당들이 원수 가정에 들어와 불을 지르고 가족을 다 죽입니다. 그런데 그 집 하인이 그 집 아들을 몰래 숨겨 도망칩니다. 아들은 자기 아버지와 가족들이 무참히 살해당하는 것을 눈여겨봅니다. 그리고 산에 올라가 총 쏘는 것을 연마하고 무술을 닦습니다. 그리고는 장성하여 산에서 내려와 원수를 복수하러 갑니다. 대개 무술영화에는 악당의 무술이 훨씬 고수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일격으로 악당을 물리치고 등에 칼을 차고 멀리 사라집니다. 서부영화는 복수를 하고 말을 타고 황야로 사라집니다. 
  
영화는 인간의 삶을 말합니다. 드라마는 언제나 우리 주변 이야기들입니다. 가문의 악연이란 언제나 세습되는 갈등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가문의 악연이란 인간사에 흔히 있는 일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 집안끼리 갈등을 빚는 일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섹스피어의 4대 비극을 아시지요? ‘햄릿’, ‘맥베스’, ‘오셀로’, ‘리어왕’이 4대 비극이라고 합니다. 비극이 무엇입니까? 얽히고 설킨 가문의 비극입니다. 대를 잇는 갈등과 복수가 인간 역사의 비극입니다. 4대 비극은 아니지만 ‘로미오와 줄리엣’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로나의 두 가문인 캐퓨렛 가문과 몬탸큐 가문은 서로 상극인데 로미오가 원수 집안의 딸 줄리엣을 사랑하게 되는 줄거리입니다. 그 소설에는 집안의 분쟁이 하인들에게까지 이어져 하인들도 원수로 삽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두 사람이 다 죽는 비극적 종말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가문의 불화는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사무엘하 3:1에는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고 합니다. 사울과 다윗의 가문 사이에 전쟁이 계속되었습니다. 초기 이스라엘의 명문인 두 가문이 어떤 사이인가를 잘 말해줍니다. 그런데 다윗은 상극인 사울의 가문과 극적으로 화해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큰 불화는 조상의 묘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조상의 묘, 특히 아버지의 묘를 파헤쳤다고 가정해 보세요. 아마 가장 분노하고 그 사람을 알면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가장 큰 형벌은 ‘부관참시’(剖棺斬屍)일 것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죄인의 시체를 다시 파내어 형벌을 가하는 것입니다. 이 형벌은 자손들에게 가장 수치스런 벌입니다. 일본인들은 걸핏하면 말뚝을 박습디다. 묘지나 산이나 기념될 장소에 말뚝을 박아 우리를 화나게 합니다.  
  
반면에 가문이나 후손에게 가장 큰 호의는 묘소를 잘 세워주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분이지만 유해를 잘 보존해 주는 것은 가장 고마운 일입니다. 얼마 전에는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미군 유해가 다시 조국으로 돌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1950년 12월에 북한에서 전사한 한국군의 유해 두 구도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미군과 함께 전사하여 미군인 줄 알고 미국까지 보내졌던 유해가 DNA 검사를 해보니 한국군이었고 신원이 밝혀진 것입니다. 이들의 유해가 62년 만에 지난 5월 한국으로 돌아와 국립묘지에 안장이 되었습니다. 그 때 가족들이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릅니다. 
  
성경에는 사울의 집은 망하고 다윗의 집은 흥하였다고 합니다. 흥한 쪽에서 먼저 망한 쪽을 향하여 화해의 제스처를 해야 합니다. 강자가 약자에게 손을 내밀어야 화해가 됩니다. 망한 쪽이나 약자는 손을 쉽게 내밀지 못합니다. 사울가와 화목한 다윗은 바로 이런 관용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화목하게 하다’는 말의 헬라어의 뜻은 ‘상태를 되돌려 놓는다’는 뜻입니다. 뜯어진 것을 다시 꿰매다는 뜻입니다. 흩어진 것을 모으다는 뜻입니다. 화목하게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제 자리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화목이 얼마나 소중한 인간관계의 일입니까? 
  
구약은 화목제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반목하여 인간이 죄를 짓습니다. 죄란 분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과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기 위하여 제물을 바쳐 화목하게 하시는 법을 정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화목제물입니다. 화목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한데 구약에서는 짐승들을 잡아 그 피로 화목제물을 삼았습니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셔서 생명을 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다시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둘이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것을 땜질하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16에는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피로 화목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자기 육체로 허시고”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십자가로 둘이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것을 화목하게 합니다. 하늘과 땅이 화목하게 합니다. 이것이 세로 막대기입니다. 나와 너를 화목하게 합니다. 이것이 가로 막대기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참 의미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남북전쟁 후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맙시다. 모두를 향해 사랑의 마음을 품읍시다”. 승자가 내민 손입니다. 승자가 내민 것이 아니라 손을 내밀므로 완전한 승자가 된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이 서로 화해가 가능할 때 이때 비로소 하나님은 귀를 열고 기도를 들으십니다. 

  
둘째, 화해를 온전히 실천한 후에 기도를 들으십니다. 

사무엘하 21:14 하반절에는 “모두 왕의 명령을 따라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고 합니다. 온전한 화해는 명령을 따라 “행하니라”는 말씀에 나타납니다. 화해를 온전히 행동으로 실천했을 때에 하나님은 이 때 비로소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방해물을 제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방해물을 제거하는 행함 즉 실천이 있어야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가문과 가문,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맺힌 것을 온전히 풀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므로 예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이루는 것입니다. 
 
‘케빈 베이컨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서로 모르는 두 사람이 6.6명을 거치면 연이 닿는 것이 판명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 관계를 따지다 보면 평균 6단계 만에 베이컨과 연이 닿는다는 이론입니다. 다른 보고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더 가까워 4단계 만에 연이 닿는 사람을 만난다고 합니다. 알고 보면 다 알만 한 사람이며, 관계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원수질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에는 나와 원수질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여기에 화해의 당위성이 있습니다. 
  
마 5:23-24에는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합니다. 25절에는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요지는 서로 화해하고 인간관계의 매듭을 반드시 풀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입이 아니라 삶으로 해야 합니다. 용서는 입이 아니라 몸으로 해야 합니다. 화해는 입이 아니라 행함으로 해야 합니다. 회개는 입이 아니라 아니 온 삶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행함입니다. 실천을 통하여 진정성이 나타납니다. 실천을 통하여 비로소 마음이 표현됩니다. 
  
예수님의 화해 법칙을 보세요. 제자 나다나엘을 처음 제자로 뽑으실 때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가장 낮추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나다나엘의 태도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가장 낮추는 자를 가장 높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을 보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용서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예수님은 입으로가 아니라 온 몸으로 화해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생명을 버림으로 화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으로 제물이 되신 주님이십니다. 죄를 지은 인간을 온 몸으로 사랑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렇게 찬송합니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헨리 포드는 “화해하는 것은 시작이고, 도와주는 것은 진보이고, 함께 일하는 것은 성공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화해는 더 큰 결과를 이끌어냅니다. 화해를 실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실천이 중요한 것을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의 결론에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실천을 권유하십니다. 바울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합니다. 야고보서 2:12에는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고 행함을 권합니다. 우리의 행함으로 믿음이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에 실천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시멜로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완벽하게 만들려면 단어 하나를 더 넣어야 합니다. “아는 것을 실천해야 힘이다”. 실천하지 않는 앎은 진정한 배움이 아닙니다. 실천이 없는 화해는 하나님이 절대로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사막의 수도사인 포에멘은 “혀가 말한 것을 따르도록 마음을 가르쳐라. 설교를 잘 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많아도 설교한 그대로 실천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꼬집었습니다. 실천이 없으면 허공을 치는 꽹과리 소리에 불과합니다. 
  
그 후에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나라의 필요를 충족하시고 이루어주셨습니다. 사울 가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진정되었음을 의미합니다. 3년 동안의 긴 기근이 종식되고, 비가 그 땅에 내렸습니다.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인 기도는 방해물을 적극적으로 제거하고 몸으로 화해를 이루면 응답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땅에 기근이 물러가고, 비가 내리고, 태풍이 비껴가고, 수확이 풍성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인간관계에서 화해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결론 

종교개혁자 루터와 쯔빙글리는 종교개혁의 방향이 반대였습니다. 수시로 의견이 충돌되고, 때로은 대화 가운데 얼굴을 붉혔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스위스의 산에 오르고 있을 때 두 마리의 염소가 매우 좁은 다리 위에서 서로 노려보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 다리 중간에서 두 마리가 비켜주지 않고 오도 가도 못하고 한 판 싸움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마리가 다리 위에 납작 엎드려 주었습니다. 다른 염소는 그 염소의 등을 밟고 유유히 다리를 건넜습니다. 두 사람은 이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화해의 악수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염소에게서 겸손과 양보를 배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염소보다는 나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본성으로 살면 양보하고 배려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면 화해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화해를 실천한 후에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과 막힘이 없이 통하는 기도가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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