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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혜 있는 자 같이 하라 (엡 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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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있는 자 같이 하라 (엡 5:16-17)

우리나라에 전해오는 이야기 중에 이런 동화 가운데 꼬마 신랑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남자가 어릴 때 장가를 갔던 때가 있습니다. 이제 일곱, 여덟 된 꼬마가 스무 살이 다 된 처녀와 결혼을 해서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부부생활이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남편 노릇은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부인의 속만 썩입니다. 걸핏하면 말 태워 달라고 하며 부인에게 장난질만 칩니다. 부인이 속이 상하지만 시부모님이 계시니 꼼짝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참고 그저 나이 들기만 기다리며 삽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시부모님이 외출을 나갔습니다. 속도 모르는 남편은 오늘도 여전히 말 태워달라고 조릅니다. 화가 난 부인은 남편을 지붕 위로 던져버렸습니다. 시골집 나지막한 초가지붕, 박이 주렁주렁 열려 있는 그 지붕 위에 던져버린 것입니다. 졸지에 지붕 위에 던져진 꼬마신랑이 겁이 나서 울면서 부인에게 내려달라고 하소연을 합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부인은 그동안 쌓였던 분풀이를 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갔는데 느닷없이 시부모님이 집으로 들이닥쳤습니다.

어떻게 해볼 겨를도 없이 꼼짝없이 들켜버렸습니다. 아들이 지붕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을 본 부모님이 놀라서 묻습니다. ‘얘, 너 왜 거기 올라가 있느냐?’ 큰 일 났습니다. 이제 신랑이 입만 벙끗 하면 부인은 꼼짝 없이 보따리 싸 들고 친정으로 돌아가야 할 판입니다. 

그런데 이 꼬마 신랑이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큰 박을 딸까요, 작은 박을 딸까요?’ 이것이 지혜입니다. 그 나이 몇 안 된 꼬마에게 이런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어떻습니까? 나이가 이보다 몇 곱절 되어도 이런 지혜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지혜 있는 자 같이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15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그런즉’ 이라고 했습니다. 앞에 있는 말씀을 받는 접속사입니다. 

우리 본문 앞에 있는 말씀은 한 마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하나님을 몰랐고, 어두움에 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빛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즉’ 다시 말해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빛의 자녀답게 지혜롭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라고 했습니다. 하루하루 주어진 모든 일들을 그냥 되는 데로 살지 말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자세히 주의해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은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라고 말씀하시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은 지혜로운 삶은 세월을 아끼는 삶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6절에서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때가 악하니라’는 말은 주어진 시간을 선용할 수 없도록 유혹하는 것이 많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을 영어 성경 NIV에서는 ‘세월’을 ‘기회’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모든 기회를 최고, 최선의 것으로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월을 ‘삶의 자리에 주어지는 기회’로 번역한 것입니다. ‘때가 악하다’는 말은 이 기회를 잘못 사용하도록 유혹하는 혼탁한 시대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이 17절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라’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기회를 자신의 이익과 이기적인 생각을 중심으로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하다는 말씀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3년 동안 가장 가까이에서 따라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따라 다녔지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고 따라 다닌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과는 관계없이 자신의 뜻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3년간 따라 다녔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그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살도록 내버려 두지를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그를 유혹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자리보다 더 높아지고 영향력 있는 자리에 서라고 유혹했습니다. 더 많은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 유혹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그 유혹에 무너져 예수님을 배신하고 은 30냥에 팔아 넘겼습니다. 

그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결국은 스스로의 목숨을 끊으며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3년의 시간이 그에게는 독이 되었습니다. 세월이 약이 아니라 독이 된 것입니다. 세월은 우리에게 약이 될 수도 있지만 도리어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세월 즉 시간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용하였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구약에 보면 다니엘이라는 청년이 나옵니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이스라엘에서 잡아온 포로들 가운데 똑똑한 젊은이들을 잘 키워서 나라의 인재로 등용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젊은이들과 함께 숙식을 하며 교육과 훈련을 받게 했습니다. 왕은 인재 등용을 위해 교육을 받는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좋은 음식을 아낌없이 제공하게 했습니다. 그 교육 기간은 3년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왕이 먹는 음식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먹지 말아야 한 음식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자신을 관리하는 환관장에서 왕이 주는 고기와 포도주를 먹지 않고 채식을 중심으로 식사를 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환관장은 만약 그렇게 해서 너희들이 왕 앞에 설 때에 초췌한 모습으로 서면 내가 죽음을 당할 수가 있다고 걱정했습니다. 

다니엘은 그러면 열흘간 그렇게 해 보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괜찮으면 채식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환관장이 그렇게 허락을 하고 열흘 후에 보니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의 얼굴이 다른 소년들 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환관장은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원하는 대로 채식을 하도록 허락을 했습니다. 3년 후에 그들이 느부갓네살 왕의 앞에 섰을 때 그들의 준수함과 지혜로움이 드러나 왕의 택함을 받게 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바벨론 궁정에서 보낸 3년은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어리석은 모습이었습니다. 자신들이 누릴 수 있는 모든 부귀영화를 뒤로 하는 어리석은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세 친구가 선택한 것은 세상의 가치와 이기적인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중심으로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선택한 3년의 시간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실 복을 준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가룟 유다에게도 예수님을 따르는 3년의 시간, 기회가 주어졌고, 다니엘에게도 3년이라는 시간,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과 기회를 어떤 기준을 가지고 어떻게 사용하였느냐에 따라 그들의 삶의 결과는 전혀 달라졌습니다. 한 사람은 멸망의 기준이 되었고 한 사람에게는 구원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시간과 기회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이 시간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시간은 양적인 시간 개념과 질적인 시간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시간을 어떤 개념을 가지고 대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양적인 개념의 시간으로 인생을 살면 ‘얼마나 살았느냐?’ 가 삶의 기준이 됩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도 인생에 있어서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장수하는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을 살았다고 해서 그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오랜 시간 살았다고 해서 성공한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오랜 시간이 우리에게 큰 고통과 슬픔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고령화 시대가 되면서 오래 사는 것이 꼭 축복이 될 수만도 없을 것입니다.

질적인 시간 개념을 가지고 인생을 살면 ‘무엇을 하면서 살았느냐’에 초점을 맞추어 삽니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분명한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얼마나 살았느냐는 양적인 시간 개념을 가지고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그 시간을 가지고 무엇을 하며 살았느냐는 질적인 시간 개념을 가지고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의 삶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지혜가 없는 사람과 지혜가 있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시편 90편에 보면 모세가 지은 시가 나옵니다. 모세는 120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서 한 순간처럼 지나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은 몇 년을 살았는지를 헤아리며 남들보다 더 오랜 시간을 산 사람들을 부러워할지 모르지만 그 시간들도 지나고 보면 한 순간임을 말합니다. 몇 년의 차이가 큰 것처럼 생각하고 남들보다 좀 더 오래 사는 소망을 갖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길든지 짧든지 지나온 시간들은 한 순간인 것을 말합니다.

모세는 10절에서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모세는 자신의 인생의 시간을 양적인 시간 개념으로 계산하지 않고 질적인 시간 개념으로 계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날 수를 계수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단순히 더 살 수 있는 날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남은 날 수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그 내용물을 내놓을 수 있는 삶을 사는 지혜를 갖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몇 번에 걸쳐 소개한 분이 있습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입니다. 그 분은 일일일생주의를 주장한 분입니다. 하루가 자신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하루를 살고 저녁에 잠들면 그것은 죽은 것이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면 살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인생을 하루살이에 비유하며 하루를 사는 것처럼 살자고 주장했습니다. 

그 분은 자신이 몇 년을 살았다고 말하지 않고 몇 일을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70년을 살았다면 그 분은 25550일을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개념으로 보면 만약 우리들이 앞으로 10년을 더 산다고 하면 3650번을 자고 일어나면 죽는 겁니다. 20년을 더 산다고 하면 7300번을 자고 일어나면 죽습니다. 30년을 더 산다면 10950번을 자면 죽습니다. 

여러분을 몇 년을 더 사실 것 같습니까? 그 년 수를 날짜로 계산하면 몇 번을 자고 일어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얼마나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면서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월을 아끼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뜻에 따라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단한 사역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들에게 일상생활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실하게 사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인생도, 가정도, 직장도 작은 것에 성실한 것들이 모아져 건강한 인생, 건강한 가정, 건강한 직장과 교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 성실하지 못하고 어느 한 방을 노리는 사람들에게서 진정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하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재물의 복을 주시지 않아서, 건강을 주시지 않아서, 가정을 든든히 세워주시지 않아서, 직장에서 승진시켜 주시지 않아서, 교회의 직분자로 세워주시지 않아서 라고 원망을 하며 불평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큰 사역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곳에서 작은 일에 충성하며 순종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혹시 그런 한 방의 일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과 주변 사람들에게 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독이 되고 아픔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작은 일에 성실하게 임하며 순종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오는 한 주간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성실하게 사는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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