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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혜 있는 자 같이 하라(2) (엡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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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있는 자 같이 하라(2) (엡 5:18)

랜디 호프만이라는 목사이면서 예술가인 분입니다. 그 분의 특징은 해변 가에서 모래와 바닷물을 가지고 20여 년에 걸쳐 모래 조각품을 만드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 등의 대표적인 작품들이 있습니다. 그 분이 해변 가에서 모래와 바닷물로 조각품을 만드는 이유는 작품을 통해 선교 활동을 하기 위함입니다. 모래 조각 작품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연약한 재료를 가지고도 위대한 예술 작품들이 창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우리 인간도 모래와 같이 보잘것없고 조류가 밀려오거나 바람이 불면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에 의해  위대한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래와 같은 연약한 인생이고, 바닷물이 밀려오고 밀려가듯이 하루하루 지나가는 시간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바 되면 우리의 연약함과 주어진 시간들 속에서 위대한 작품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누구의 손에 맡기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지혜가 없는 자처럼 살지 말고 지혜가 있는 자처럼 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혜 있는 자의 삶의 첫 번째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고 세월을 아끼며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시간을 양적인 개념을 중심으로 ‘얼마나 살았느냐?’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질적인 개념을 중심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았느냐?’에 중점을 두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로운 삶입니다.

지혜로운 삶의 두 번째는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18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봅시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바울을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하면서 술 취한 사람과 성령 충만한 사람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술 취함과 성령 충만을 대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서를 쓸 당시인 1세기에 디오니소스를 주신(酒神), 즉 술의 신으로 섬기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포도주를 마시는 ‘ORGIES’ 즉 디오니소스제를 열었습니다. 그들은 진탕 먹고 마시며 난잡하게 놀며 디오니소스를 예배했습니다. 절제되지 않은 폭음의 문화는 결국 폭력과 음란으로 이어졌고 사회의 타락으로 이어졌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런 어리석은 문화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가르침으로 온전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술 취한 것과 성령 충만함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마가 다락방에서 120명의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를 할 때 성령께서 강하게 임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 나타나는 현상을 보고 사람들이 조롱하면서 ‘새 술에 취하였다’ 고 말했습니다. 술 취함과 성령 충만은 비숫한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비슷한 점은 ‘지배하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술에 취한 사람은 술의 지배 아래로 들어갑니다. 술에 취하면 알콜이 혈관 속에 들어가 온 몸을 다스리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를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본문에는 ‘술 취함’을 ‘방탕’한 삶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방탕’이라는 단어는 주색잡기에 빠져 행실이 좋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또 자제력, 통제력을 잃어 무질서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짐승처럼 행동하고 가정을 깨드리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주폭이 일으키는 사회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폭력과 음란의 주된 원인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성령으로 충만해 지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갑니다. 무질서하고 흐트러진 삶을 하나님의 마음과 가치를 가지고 바르게 세워갑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와 힘으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인격이라는 것은 이성과 감성과 의지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인격이 덜 된 사람이라는 말은 이성과 감성과 의지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지를 못하고 느끼는 것이 매우 즉흥적이고 조절이 안 되며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인격이 된 사람이라는 말은 이성과 감성과 의지가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즉 생각과 느끼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조화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술에 취하거나 성령에 충만해지면 이성 부분인 생각과 말이 바뀝니다. 술 먹은 사람은 말을 횡성 수설 합니다.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합니다. 술 먹은 사람의 말은 거칠고 사납습니다. 해야 할 말과 해서 안 될 말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평상시에는 하지 못하는 말을 술김에 다 합니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남을 욕하고 상처 되는 악담을 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축복을 말합니다.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고 긍정적인 말을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하지 않고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을 합니다.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된다’는 말을 하고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할 수 있다’는 말을 합니다. 말이 바뀐다는 것은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절대로 말이 바뀔 수가 없습니다.

술에 취하거나 성령에 충만해지면 감성 부분이 바뀝니다. 느끼는 것이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감정이 술에 지배를 받으면 부분적으로 좋은 감정을 갖는 것 같지만 결국 그것은 위장된 감정입니다. 술에서 깨어나면 도리어 더 불안해 지고 슬픔을 느낍니다. 술에 의한 감정은 불안감, 열등감, 소외감, 분노, 슬픔입니다. 감정의 희노애락을 자기중심적으로 표현합니다. 그것도 술에 취해 술기운에 의지해서 표현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해 질 때 느끼는 느낌은 감사와 기쁨입니다. 절망이 아닌 희망입니다. 희노애락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느끼고 표현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 보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에 충만하면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우리의 감정을 조절하게 됩니다.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 19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시와 찬송고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의 표현되는 삶입니다.

술에 취하면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통제력을 잃으니 아무 곳에서나 실례를 하고, 아무 곳에서나 눕습니다. 아무렇게나 행동합니다. 그리고는 술에서 깨고 나면 자신이 했던 행동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탈무드에 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담이 포도 씨를 심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단이 아담에게 ‘무엇을 심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담은 포도 씨를 심었는데 이것이 커서 나무가 되면 달고 향기가 아주 좋은 열매가 맺힌다고 자랑했습니다. 포도나무가 자라서 탐스러운 열매가 맺혔습니다. 아담은 포도를 따서 포도주를 만들었습니다. 포도주를 다 만들고 잠시 쉬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아담이 잠든 사이에 사단은 양과 사자와 원숭이와 돼지를 잡아서 그 피를 받아 가지고는 아담이 만들어 놓은 포도주에 섞었습니다. 그래서 술을 한두 잔 마시면 사람이 양처럼 순해진답니다. 

술을 더 많이 마시면 사자처럼 사나워진답니다. 술을 더 마시면 원숭이처럼 흐느적거리며 걷는답니다. 술을 더 마시면 돼지처럼 아무 곳에서나 눕고 싸고 지저분해진답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술을 먹으면 자신의 의지가, 행동이 통제가 되지 않습니다. 술은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중심으로 행동을 바르게 세웁니다. 자기 이익이나, 힘, 영향력 중심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의 삶을 보면 성령을 충만하게 받았을 때와 성령을 충만하게 받지 못했을 때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성령과 전혀 관계없이 살 때의 모습을 보면 그는 의욕이 매우 앞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정작자기가 죽음의 위기에 몰렸을 때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갔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도 그는 고향인 갈릴리로 돌아가 다시 어부 생활을 할 정도로 무기력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그 분의 명령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마가 다락방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 충만함을 받은 후에는 그의 모든 행동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원망과 불평 보다는 감사와 희망을 노래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삶은 힘든 환경에 눌리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 환경을 극복하며 그 환경을 통해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진정한 성령 충만함은 종교적인 신비한 현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함은 바로 매일매일 이어지는 우리의 삶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아는 것과 느끼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 분의 가치를 중심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들이 주목해야 하는 것은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시제입니다. 이 명령형의 시제는 현재시제입니다. 과거가 아닙니다. 미래도 아닙니다. 바로 오늘 현재입니다. 성령 충만함은 과거의 것으로 이야기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의 신앙을 보면 대부분이 과거형입니다. 옛날에는 이렇게 했다. 이렇게 섬겼다. 이렇게 기도했고, 헌신했다고 말합니다. 과거형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의 역사는 현재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금은 못하지만 언젠가는 이런 삶을 살겠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봉사할 것이고 헌신하고 나이가 더 들고, 환경이 더 나아지면 믿음의 삶을 온전히 살겠다고 말합니다. 미래를 말하는 것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믿음은 오늘의 믿음입니다. ‘HEAR AND NOW’ ‘지금 여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두움에 있었을 때의 어리석음이 아니라 빛의 세계로 나왔으니 하나님의 지혜를 덧입어 사는 삶이되기를 소망합니다. 세상의 것, 즉 술에 취해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만드는 삶이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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