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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능력 - 하나님의 교회(3) (고전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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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능력 - 하나님의 교회(3) (고전 1:18-25)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아픔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며 복음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뜻과 섭리가 그 안에 담겨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십자가를 과연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이 땅에 뿌리신 하나님의 눈물’이라고 말입니다. 이 눈물에는 하나님의 여러 가지 감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픔과 슬픔도 있고, 탄식과 진노도 있고, 기쁨도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악세사리처럼 생각합니다. 가슴에도 걸고, 귀에도 겁니다. 때로는 손에 들고 다니기도 합니다. 그러나 2000년 전 십자가는 치욕의 상징이었습니다. 로마가 시행했던 가장 처참한 죽음의 형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사람들에게 익숙하거나 가까운 것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셨는지, 그 사랑 때문에 얼마나 고통 받으셨는지에 대한 흔적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통해 십자가를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아픔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이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을 그저 묵묵히 지켜보셔야 했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자식들이 아파할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그저 안타깝게 여기는 그 마음처럼 아니, 그것과는 상상할 수도, 비교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마음이 십자가 속에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하나님께서 그냥 지켜보셨던 것은 하나님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지혜가 없어서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천군 천사를 보내 그 일들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려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다 살라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참으셨습니다. 기다리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죽는 것을 그냥 지켜만 보셨습니다. 바로 그 속에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야기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침묵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하나님을 향해서 항변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들보다 인간들을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대한 항의였습니다. 왜 인간의 모든 죄악을 내가 대신 져야 하는가에 대한 울부짖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신 예수님은 기쁨으로 십자가의 길에 순종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죄인이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나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안에 참된 교회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아파하는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외로운 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탄식하는 자와 근심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자, 죄책감에 억눌려 신음하는 자, 질병으로 애통해하는 자, 이 모든 이들에게 찾아오셔서 “내 앞으로 나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땅의 모든 연약한 자와 낮은 자의 슬픔과 탄식에 참여하게 되신 것입니다. 그들과 연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십자가를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복된 소식이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의 눈물처럼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초청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처음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저주의 사건인데 어떻게 저주받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 때문에 교회가 세워진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갈등과 분쟁이 가득하고 그 가운데 파벌이 생겼습니다. 사도바울은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가 갈등하고 분파할 수 있을까? 있을 수 없다!’ 참된 교회라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서로 연합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 교회가 제대로 된 믿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들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도들의 이름으로 분파를 만드는 이유를 바울은 두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교만과 오만입니다. 내가 남들보다 더 잘났다는 것입니다. 나만 옳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시기와 질투심입니다. 남이 잘되는 것은 못 보겠다는 것입니다. 남이 잘나가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들이 교회 안에서 분파와 분쟁을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린도전서 3:3) 

시기와 분쟁은 육신에 속한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바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이름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높아져야 그것이 참된 교회임을 바울은 역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픈 사랑 위에 세워진 참된 교회는 찢어질 수 없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탄식이며 사랑의 진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을 깨닫지 못하고 거부하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바울은 지적합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지혜자라고 스스로 자랑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권력을 자랑했던 제사장들과 로마 총독 빌라도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그들의 지혜와 권력을 무력화시키셨고 무효화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낮아지심을 통해서 자기 자랑에 빠져있는 사람들, 자기 지혜를 자랑하는 사람들, 자신이 가진 권력을 뽐내는 사람들을 다 끄집어내셨습니다. 있는 자, 스스로 자랑하는 자, 시기 질투하는 자에게 매를 들어 치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복음 속에 숨겨진 비밀입니다.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린도전서 1:19)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향해서 질문하십니다. “진정한 지혜자가 있더냐? 이 땅에 권력자가 있더냐? 이 땅에 지성과 이성으로 올바르게 판단하는 자가 있더냐? 만약 그렇다고 하면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왔을 때, 그를 적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느냐?” 결국 십자가 사건이 인간이 가진 지혜와 지성의 한계를 표현하는 것이고, 인간의 계획이 잘못되어 있음을 선포한 하나님의 역사라고 바울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팡세(Pensées)를 쓴 파스칼(Blaise Pascal)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자. 우리는 모든 것이 아닌 일부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 우리의 육체가 공간적으로 한계를 지닌 것처럼 우리의 지성도 한계를 지니고 있다.” 과학이나 인간의 이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우주의 신비가 있고, 역사의 신비가 있고, 인간의 신비가 있습니다. 이 신비를 신비로 인정하는 것, 그것이 지혜로운 태도입니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파우스트(Faust)에서 생각하는 자의 고뇌와 탄식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 나는 철학도, 법학도, 의학도, 심지어 신학까지도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 철저히 공부하였다. 그러나 지금 여기 서 있는 나는 가련한 바보. 전보다 더 똑똑해진 것은 하나도 없구나. 석사니, 박사니, 허울 좋은 이름만 들으며 그럭저럭 10년이란 세월을 위로 아래로 이리저리 내 학생들의 코를 끌고 다녔을 뿐. 우리가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고 보니 내 가슴은 거의 타버릴 것만 같다” 

이것은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는 괴테의 자기 고백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의 한계를 느끼는 것이 인간의 본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자기 한계를 느꼈을 때, 우리는 파우스트처럼 마법과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덮어버릴 수 있습니다. 아니면, 신앙의 선배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신앙, 참된 믿음으로 극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수모를 당하고 부끄러움을 겪은 그 십자가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날마다 결단하게 됩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삶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인간 실존 전체를 뒤흔들어 놓습니다. 마치 거대한 태풍으로 이 땅의 모든 쓰레기들이 뒤집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러한 불안함은 우리로 하여금 결단하게 하고 결정하게 합니다. 더 이상 인생의 방관자로, 구경꾼으로 살지 않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2000년 동안 모든 믿음의 선배들이 갖고 있었던 열정과 헌신은 이 십자가의 복음으로부터 나왔습니다. 모든 믿음의 선배들은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실존 전체를 걸고 믿음의 대상을 결정했습니다. 십자가의 지혜 속에 들어갈 것인가? 나의 이성을 택할 것인가?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나 자신을 믿을 것인가? 참된 신앙으로 살아갈 것인가? 나의 신념으로 살아갈 것인가? 십자가 복음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비난하며 도망갈 것인가? 끊임없이 결단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내 지식과 헌신, 결심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자랑과 교만이 무너지는 자리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의 스스로 자랑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고린도전서 1:20)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똑똑한 자들을 모두 미련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혜자와 선비와 변론가를 모두 무력화시키셨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삶에서 경험했습니다. 바울만큼 자랑하고 뽐낼 것이 많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헬라적 철학에 통달한 인물이었습니다. 동시에 히브리적 종교와 지혜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자랑을 하나님 앞에서 다 내버렸습니다. 자신의 지혜와 깨달음이 하나님 앞에서 무력해졌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인간을 두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택함 받은 거룩한 자들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이방인으로 인간을 구분했습니다. 헬라사람들은 인간을 철학을 아는 지혜자와 철학을 알지 못하는 야만인으로 구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런 구분법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남자와 여자, 있는 자와 없는 자, 노인과 젊은이, 피부색에 의한 구분 등이 다 해체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구분법이 생긴다고 이야기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 오직 두 종류의 인간으로 구분되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임으로 구원을 받는 사람과 그 도를 버림으로 멸망을 받는 자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구분은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멸망하는 사람과 구원받는 사람이 미리 따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든지 열려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으면 늘 진정한 지혜자가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자리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결코 교만해져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 교만한 것은 치유할 방법이 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 앞에 설 때,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설 때, 그 교만은 변하여 겸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내가 하나님께 충성했다고 하면서, 나의 업적을 자랑하고 교만해지면 치유 방법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뿐입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기쁨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담겨진 하나님의 마음은 기쁨입니다. 구원의 역사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린도전서 1:21) 

세상의 지혜자들과 토론하고 변론하는 것에 의해서 신앙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전도라고 하는 미련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통해서 믿음의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좋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열어주신 새로운 길입니다. 

누군가를 전도할 때 왜 예수를 믿어야 되는지, 예수를 믿으면 뭐가 어떻게 되는지, 하나님은 왜 살아계시는지, 변증론적으로 아무리 증거해도 그들은 쉽게 믿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받은 기쁨과 즐거움, 감격, 은혜, 축복의 사실들을 이야기하십시오. 증언자처럼, “예수 믿고 내게는 이런 기쁨이 생겼습니다. 예수 믿고 내게 있던 이런 죄가 용서받았습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었습니다.”라고 전하십시오. 이 전도의 미련한 것, 즉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라는 사실을 전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구원받는 사람들을 더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신앙이란 내게 신비한 증거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비밀스러운 사랑의 관계가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의 도가 교회의 근거입니다. 

내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서 있는가? 그 분 앞에 서면 내가 무릎을 꿇는가? 그 분만이 나의 주님이신가? 그 분만이 나의 생명이시고, 나의 지혜이신가? 스스로 다시 한 번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웃들에게 “저 예수 그리스도가 내 주님입니다. 그분이 나의 생명이시고 나의 구원이십니다.”라고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 속에 하나님의 슬픔이 있습니다. 십자가 속에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들어있습니다. 십자가 속에 하나님의 기쁨이 들어있습니다. 이 놀라운 십자가의 도를 오늘도 가슴에 새기면서 주님 앞에서 마음껏 찬양하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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