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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 다시 생각하기 (마 16: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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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다시 생각하기 (마 16:17-18)

[마태복음 16장 17-18절]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교회가 명백하게 세상과 구별될 때
교회는 세상의 관심을 끌게 되어 있다.
처음에는 세상이 교회를 미워할지라도,
결국, 세상은 교회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게 될 것이다. - D. Martyn Lloyd Jones

부목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교회에 갔더니 교사들이 “우리 교회에는 술, 담배 하는 애들이 한 명도 없답니다.”라며 자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목사님이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술, 담배 하는 애들을 모두 쫓아내셨습니까? 아니면 그들을 말씀으로 감화시켜 이제 술, 담배를 안 하게 된 것입니까?” 
그러자 교사들이 아무 말도 못 했다고 합니다.

"건강한 교회란 어떤 것인가?"
오늘은 이런 물음을 가지고 창립기념 주일을 함께 맞으려 합니다. 아마도 다음 주까지 교회에 대한 말씀을 나눌 것입니다.

요즘 크리스천들에게 가장 큰 고민이 있다면 “교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실상은 믿음에 대한 고민보다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인 교회가 과연 바람직한가를 고민합니다.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사람들이 교회에 실망할지 몰라도 하나님에 대하여는 실망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하나님께서 바람직하지 못한 교회를 버리실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저는 여러분과 함께 두 가지 측면에서 교회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그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
먼저 오늘 말씀의 배경을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표적을 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바로 전 15장에서 떡 일곱 개로 4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셨고, 그 이전에는 보리 떡 5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도 남은 기적을 행하신 이후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16장을 읽다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가며 먹을 것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씀도 빵에 들어가는 누룩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당시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다닌 이유가 무엇이었느냐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예수님께 나와 또 기적을 보기 원했고, 예수님은 그것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이 모였는데, 그들이 바랐던 것이 무엇이냐면 “표적”이었습니다. 
기적적으로 빵이 생기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병든 자가 낫고. 
기적을 본 사람들은 더 큰 기적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모이는 것을 보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왜 그들이 모이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사람이 늘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때마다 더 큰 기적 보기를 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기적의 장소를 피하셨습니다. 

기적은 제한적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장소에서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게다가 빵을 먹는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또 시간이 지나면 배가 고파지고, 죽은 자를 살렸지만, 그는 또 죽게 될 것이고, 병든 자를 고치셔도 그 사람은 언젠가 또 병에 걸려 죽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려움을 당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고쳐주셨지만, 예수님 사역의 목적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왜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듭니까? 마치 예수님 당시에 기적을 보고 모였던 사람처럼 교회에서 구하는 것이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는데 교회에 누룩이 만연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마태복음 16장 14-16절을 보세요.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세례요한이 누구입니까?

당시에 아주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독설을 퍼부으며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치는 멋진 사람입니다. 그의 삶도 참 멋집니다. 그렇게 따르는 사람이 많은데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석청을 먹으며 삽니다. 
자신들이 하지 못하는 삶을 사는 그를 바라보면 사람들은 그를 영웅처럼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마치 멋지게 삶을 사는 영웅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엘리야가 누구인가요?

구약에 가장 위대한 선지자 중의 하나입니다. 가장 큰 기적을 행한 사람입니다. 엘리야 하면 “능력”이 생각나는 사람입니다. 갈멜산에서 이방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승리한 사람, 그래서 850명의 이방 선지자들의 목을 잘랐던 사람입니다. 그는 불의 선지자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면 엘리야를 연상하게 합니다.

예레미야가 누구인가요?

그의 별명은 눈물의 선지자였고, 이스라엘 민족을 생각하면 눈물 흘리며 기도했던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전했던 선지자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 예레미야를 연상하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요?

지금 이 시대에는 많은 사람이 좋은 교회를 찾아, 좋은 목사님을 찾아다닙니다. 
신유와 기적이 일어나든, 독설로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든, 살아가는 모습이 매력적이든, 주일 설교 메시지가 탁월하든.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를 찾아다닙니다. 옮겨 다니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그래 사람들이 그런 이유로 교회를 다닌다고 하자, 그리고 그런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자. 그런데 너희는 왜 나를 믿으며, 이 교회에 있는데?”
이 물음이 오늘 우리에게 물으시는 근본적인 물음이고, 이 물음에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답이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이 물음에 세워진 교회가 “반석”입니다. 

이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는 오늘 본문에 보니까,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기사와 표적도 교회가 세워지는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오직 믿음이 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집니다. 기적도, 표적도 없어지는 때가옵니다.

우리가 바라는 축복의 시간을 즐기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자들의 삶 위에 세워지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입니다. 
그 어떤 신앙의 고백도 없는 교회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지는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영어로는 "the gates of Hades"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약에는 ‘스올’이라 고 하는데, 어둠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는 그 어떤 어둠의 세력도 이기지 못합니다. 
여기서 또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늘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에 음부의 권세가 침투합니다. 넘어뜨리려 합니다. 하지만 절대로 이기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7장 25절에 보면,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반석 위에 세운 집과 모래 위에 세운 집이 차이를 드러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교회는 반석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럼 반석이 무엇인가요?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에게 물으시는 것이 무엇인가요? 
“그래, 사람들은 나를 세례요한, 엘리야, 혹은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하는데, 너희는 나를 누구로 믿느냐?”라는 것이죠.

마태복음 16장 16절에 아주 유명한 베드로의 고백이 나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수제자로 삼으시고 그를 쓰신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고백 위에 있습니다. 아마도 성경에 나오는 12명의 제자 중의 가장 많은 단점이 있는 사람, 그리고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가장 많은 꾸중을 듣고 실수를 많이 한 사람이 베드로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쓰신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바로 그의 고백입니다.

교회를 다시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많은 일, 선행, 기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고 교회를 쓰시는 분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교회가 고백해야 하는 것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교회란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림을 받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고백 위에서 우리는 “주되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란 그분이 왕이 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분 앞에 늘 겸손해야 합니다. 교회가 행하는 어떤 것도 그분을 앞서지 못하며, 교회가 행하는 그 어떤 것도 그분의 영광을 가로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구별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세워주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 나는 주인공이 아니라 하나님께 쓰임 받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영화를 찍을 때 엑스트라가 있습니다. 감독이 그 사람을 엑스트라로 사용했기 때문이고, 아무리 주연이 중요해도 그 사람 모두가 합쳐져야 영화가 완성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엑스트라라고 해도 그 삶의 인생에서 그 사람은 여전히 주인공입니다. 
제가 말하는 것이 이해가 되나요?
교회가 세워진 것은 분명히 사명이 있어서 주인공으로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사용되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 드라마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얼마 전 [목회와 신학]이라는 잡지에서 “목회자의 영적 생활과 건강관리”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제가 늘 빌빌하잖아요, 그 글을 쓸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제가 부속실에 있는 직원한테 물었습니다. 
“그런데 내 영적인 상태는 건강해? 안 건강해?” 
그 물음에 대 놓고 안 건강하다고 얘기할 사람이 없겠죠. 
“예, 목사님은 건강하죠.”라고 대답을 하더군요.

그런데 제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제가 영적으로 건강한 이유는 육적으로 건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제가 육체적으로 회복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두 가지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는, 내가 알고 있는 지식보다 뛰어난 지식을 가진 의사를 신뢰하자,

다른 하나는, 매월 2박 3일 동안 말씀을 듣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아픈 상태에서 한 시간 설교를 하는 기도원이었지만, 그곳에서 저는 설교를 마치면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으며 많이 충전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요즘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가장 건강한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가 목사가 되어 어느 정도 이름도 나고, 여기저기 불려다니면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제가 주인공이 아닌 곳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늘 그곳에서 나의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제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신 것이, 내가 아무리 중요한 일을 해도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무의미하다는 것, 그리고 내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그 장소에 있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일인지 모른다는 것. 
그래서 결심을 하게 되었죠. 내가 주인공이 아니어도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주인공으로 세우신 자리에 있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셨을까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고백이 없는 교회는 늘 자신이 주인공 되려 하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일에는 어떤 일도 하지 않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부러워하는 것들을 보세요. 정말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할 수 있나요? 하나님께서 세우셨다고 자신할 수 있나요?
참된 교회의 표식이 무엇입니까? 정말 예수님이 주가 되시고 그리스도가 되셨느냐는 것이죠. 
“교회론”이 좀 명확해지지 않습니까? 
바로 그 고백 위에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십니다.

“내가 세운다!”

교회를 다시 생각하며 우리가 가장 주목해 보아야 할 말이 있다면, 오늘 말씀의 ‘주어’입니다. 교회를 세우신 분이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단체든 가장 중요한 것을 잃으면, 본질을 잃는 것입니다.

F. B Meyer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도 갑자기 밑바닥으로 떨어지지는 않는다. 영적인 침식은 점진적으로 서서히 파괴되면서 일어난다. 그것은 개개인 안에서 일어날 수 있고, 또 교회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침식”이 무서운 것은 

언제나 천천히,
언제나 조용히,
언제나 미묘하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사실 기준과 이정표가 없으면 대개 침식 현상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허물어져 가는 무서운 것이지요. 찰스 스윈돌 목사는 [교회의 각성]이라는 책에서 교회의 침식을 경계하라고 경고합니다.

C. S. 루이스는 그의 책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실로 지옥에 이르는 가장 안전한 길은 점진적인 길이다. 즉 급회전도 없고, 이정표도 없고, 표지판도 없는, 부드럽고 완만한 비탈길이다.”
“이정표”는 두 가지 점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성취하려고 하는 일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보여주는 성취의 척도가 되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가려는 길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표류하는지를 보여주므로 방향을 돌리라고 촉구합니다.

교회에 대한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반복되는 “내가”라는 말입니다. 본문 18절을 묵상하면 아주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할 때, 제자들은 교회가 뭔지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직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will' 세우실 것입니다. 단지 ‘교회’라는 헬라어의 'ekklesia'라는 말은 '-으로 부터'를 뜻하는 'ek'와 ‘부르다’라는 뜻의 ‘칼레오’의 합성어입니다. 즉,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불러내 세우실 그 무엇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주님께서 세우시는 교회가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불림을 받은 공동체”
그것이 교회입니다.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실 때부터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건축가는 그리스도이심을 밝히고 계십니다.
오늘 창립기념일을 지나면서, 아니 매년 창립기념일을 지날 때마다 우리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를 바라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좀 더 깊이 “내가”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보도록 하죠.
처음 교회가 세워지기 전부터 예수님께서 디자인하신 교회는 사람을 사용하시지만, 주님의 뜻대로 세워진 교회인 것 같죠? 건물을 지을 때는 concept가 있습니다. 단순한 건물의 모양이 아닌 생각이 들어 있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를 지을 때는 어떤 건물을 지을 것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하는 교회를 지을까가 중요한 질문이겠죠? 

눈에 보이는 가시적 교회는 외부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불가시적 교회인 교회의 “영”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되겠죠.
또한, 오늘 말씀 중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동사가 하나 있습니다. "will"
아직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칭찬을 받고 있는 베드로도 예수님이 세우실 교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곧 주님께서 세우실 교회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세워진 교회는 환난과 핍박 가운데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분명한 신앙의 고백과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신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반석에 세우지 않는다면, 분명한 신앙의 고백이 없다면 금방 무너져 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우시는 첫 번째 교회는 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위대한 일을 행하여 왔습니다. 초대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명백한 고백 위에서 세워졌다면, 그 핍박을 이기고 승리의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교회가 명백한 고백을 잃어버렸을 때, 더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가 아닌, 교권과 교황과 교회의 건물이 주인이 되었을 때, 종교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교회가 세워짐으로 교회의 사명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경건을 회복했고,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주어진 축복은 선교의 도구로 쓰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축복이 또다시 힘을 가지기 시작하며,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 그 땅을 지배하려는 명예와 욕망이 주님의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저기 세워졌던 교회들, 자신의 학식과 명예를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흩어져 이 땅을 변화시켰던 복음의 능력이 다시 세상의 물질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더 많이 모이고,
더 커지고,
더 많은 일을 하는 교회가 “주님의 명예”를 가로채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그때마다, 교회의 본질을 벗어나고, 사명을 다하지 못할 때마다 사라질 것 같았던 교회가 사라지지 않고 다음 세대를 이어가며 여전히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교회가 세워지면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 어떤 돈과 명예도, 사단의 세력도 교회를 넘어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단지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홍수가 나게 될 것입니다. 아니 필연적으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어려움 속에서 그 교회가 참 교회인지 아닌지가 증명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 교회 창립 31주년을 생각하며 다시 생각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교회의 소유권”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실 교회, 우리 교회는 지금 완성이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일하시고 세워 가시는 주님 앞에서 우리가 반석 위에 서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몇 주 전 어머니기도실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제가 어머니 기도실에 갈 때는 꼭 펜과 메모지를 들고 갑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눈을 뜨고 있을 때가 참 많습니다. 기도하면 주시는 생각을 적고, 보기 위해서지요.
지금 우리가 광야 같지 않은 광야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너무 감사한 것은 이 시대를 지배하는 이기주의와 편의주의에서 교회의 주인이 누구인지,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배우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번 리모델링을 하면서 참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설계에서부터 TFT 모임에서 예산도 거의 완벽하게 세운 것 같습니다. 
내년에 조금은 빚을 지면 사역에도 큰 차질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교인들에게 부담을 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헌금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새벽에 자꾸 그런 생각을 주십니다. 교회는 “피 값으로” “헌신으로”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돈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고백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헌신이 될 수 있을까?
돈이 없는 사람은 과부의 두 렙돈을 귀하다 받으신 하나님 앞에 후손들을 위한 믿음의 자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이 어려운 때를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며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자리를 채워주세요. 당신이 받은 축복을 말없이 흘려주세요. 
당신의 상이 하늘에서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의도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누구의 공로도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기꺼이 헌신하는 만나 공동체의 예배 자리를 만드는 일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 같이 헌신하며, 다 같이 참여하고, 다 같이 예배하는 감격이 있는 교회. 그리고 이 교회에서 하나님이 주인 되셔서 일하시는 것을 기대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여러분 중에는 리모델링에 참여하며 헌금한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권리도 주장하지 마십시오. 이 땅의 것은 언젠가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냥 값없이 사용되는 것에 대한 감사의 고백이 있기를, 
당신의 공로 때문에 예배의 방해가 되지 않기를.

이 교회는 주님이 주인 되셔서 세우심을 고백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이 교회를 리모델링하고 목회를 하면서 저에게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이 공로의식입니다. 제가 무엇을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믿음과 헌신 위에서 하나님께서 반석 같은 교회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명을 다하는 순간까지 사용하실 교회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참 좋은 교회!”

이 땅의 소망이 되는 교회를 만들어 가실 하나님을 기대하는 기대감이 이 광야 교회에서, 새로운 성전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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